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 한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오던 생의 한 막을 거둔 지 어느새 십수 년 세월이 흘렀다. 번잡한 도회를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리라 하고, 산 좋고 물 좋다는 이 한촌을 찾아와 지금까지 그 세월을 살고 있다.
앞으로는 강이 맑게 흐르고 있고, 뒤로는 산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아침이면 강둑길을 걷고 저물녘에는 산을 올랐다. 강둑 풀숲길을 걸으면서 강물 맑게 흐르고 온갖 야생초들 하늘거리는 풍치를 보는 것도 유유했고, 철마다 빛깔과 모습을 달리하는 숲속 산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것도 더없이 자적했다.
살 만하다 싶었다. 내 생애에 언제 이런 별천지가 있었던가. 몇 철을 그 별천지 속을 거닐었을까. 어느 날 커다란 굴착기가 강둑을 마구 파헤쳐 나갔다. 철을 갈아가며 노랗고 하얗고 붉은 꽃을 함초롬히 피우던 풀꽃들이 여지없이 짓뭉개졌다.
파헤쳐진 길에 회반죽이 쏟아 부어지고, 풀꽃 길은 단단하고 편편한 포장길로 변했다. 비가 오면 질척이고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시게 하는 이런 길을 어찌 그대로 둘 것이냐며 마을 사람들이 진정하여 포장하는 것이라 했다. 나는 마을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 길엔 사람만이 아니라 차도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장은 마을 일에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마을을 편리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돌아보지 않고 면사무소에 달려가 마을 사람들의 뜻이라며 청을 넣어 일을 이루어 내곤 한다. 특히 그는 마을에 풀숲 길을 없애기 위해 애썼다.
마을 길 길섶에는 온갖 풀이 자라면서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곳에도 어느 날 굴착기가 와서 길섶의 풀꽃들을 다 걷어내더니 아스콘을 쏟아붓고, 둥글넓적한 바퀴 차가 매끈하게 다져나갔다. 길이 넓어져 차가 다니기 좋게 되었다며, 이장도 자랑삼고, 마을 사람들도 이장이 일을 잘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마을 고샅에서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도회지 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몇 해를 두고 살아도 나는 아직 마을 사람이 되지 못한 건가. 얼마를 더 살아야 마을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산에서도 내 상념,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는 일들이 참혹하게 벌어졌다. 어느 날 산을 오르다 보니 커다란 나무 둥치들이 이리저리 넘어져 나뒹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베어진 나무들이 내가 다니던 길을 마구 막고 있다. 내가 고사목 의자라 부르며 쉴 자리로 삼고 있던 누운 고사목 둥치도 마구 잘라놓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림청에서 나와 간벌 작업을 한 것이라 했다. 간벌이란 빽빽한 나무를 솎아 다른 나무가 잘 자라게 하려는 것이거늘, 이리 난잡하게 남벌하고 길까지 막아야 하는가. 산이 좋고 나무가 좋아 그 정서를 여러 편의 글로 남겨 책을 만들기도 했던 내 정념을 그들이 알 리는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산을 짓쑤셔 놓아야 하는가.
그뿐 아니다. 내가 방에 앉아 내다 보는 창밖의 산은 지금 가죽이 벗겨져 피를 죽죽 흘리고 있는 짐승같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산주가 산판 업자한테 나무를 팔아 산을 무참히 벗겨버린 것이다. 아무리 사유재산이라지만, 자연을 저리 처참하게 짓뭉갤 수 있는가. 늘 그 참경을 바라봐야 하는 나만 피해자로 여겨질 뿐, 마을 사람들에겐 예삿일에 지나지 않았다.
강둑길이 시멘트로 포장이 되면서 풀꽃들은 길섶에서 겨우 피고 지고 할 뿐이지만, 그 길섶에서 행렬을 이루고 있는 벚나무는 해마다 봄이면 화사하고 해사한 꽃을 피워내어 산의 산벚꽃과 어울리면서 온 마을을 꽃 천지로 만들고 있다. 그 풍경을 보노라면, 이 운치 하나만으로도 이 마을을 살 까닭이 없지 않다고 여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커다란 굴착기가 강둑에 올라 드리워진 벚나무 가지를 철천의 원수를 무찌르듯 마구 찍어대는데, 앞에서 이장 그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강둑 길을 걷다가 깜짝 놀라 왜 이러느냐 물으니 가지가 너무 성해 차가 다니는 데 지장이 된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했다. 톱으로 다듬을 수도 있지 않으냐 하니, 일일이 어찌 그리하느냐 했다.
강둑은 전장의 폐허를 방불케 했다. 포화로 찢겨 나간 팔다리 같은 가지가 즐비하고, 마저 부러뜨리지 못한 가지가 흉측하게 달려 덜렁거린다. 길바닥에는 잔해들이 널브러져 막 치열한 전투가 끝난 자리 같다. 진두지휘에 땀 뻘뻘 흘리고 있는 이장을 누가 보면 일 잘한다 할 걸, 나는 왜 그리 야속하고 비정하게 보이는가. 무력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
왜 나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없는 걸까. 아무도 뭐라지 않는 일을 두고 나만 이리 못 견뎌 하는 걸까. 나는 이방인인가.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누가 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고 하는 것만 같다. 나더러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떠나라는 소리가 자꾸 귓전을 맴도는 듯한 환청은 무슨 까닭인가. ♣(2025.7.26.)
첫댓글 선생님 더운 일기 건강을 먼저 아룁니다. 건강하신지요?
박탈당한 그리움도 차마 무슨 말로… 글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아파했는데, 철철이 곱게 피어 단장하는 아름다운 무지 아끼시던 그 길을 선생님 마음에 큰 상처 주셨습니다. 어떤 위로도 드릴 수 없어 더욱 애타는 심정입니다.
이 시간에도 마음 상해하지 않으실지 여간 짠하지 않습니다. 무도한 시대가 만드는 시절 인연일까요?
부디 선생님 귀체 보존에 마음이 좀 편해지셨으면 삼가 간절하게 빌어봅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공연한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군요.
세상의 마음이 제 마음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찌하였거나 생명이 있는 것들을
모두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