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실존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한 것도 외로움이 인간이 지닌 숙명으로서의 본질을 형상화한 말일 것이다. 외로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서는 외로움을 두고 누구나 지닌 개인적,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적인 문제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도 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를 만들고, 일본도 내각부 산하에 ‘고립·고독 대책 담당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 서울시에서도 ‘외로움 없는 서울’ 사업을 추진하여 ‘외로움’에 대처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외로움’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고독’, ‘고립’과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조차 ‘외로움’을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고독’을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풀이하여 뜻에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어느 신문에서 ‘고독사 절반 이상은 5060 중장년층 남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고독사를 “주로 홀로 사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사망하고,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경우를 가리킨다.”(조선일보, 2025.9.6.)라 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홀로 사망’한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관계가 모두 단절된 고립 상태에서 사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처지라면 고독한 처지가 아니라 매우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외로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지언정 ‘고독사’라고는 할 수 없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고립은 아니다. 고독 속에는 사랑도 있고 그리움도 있을 수 있다. 사랑이나 그리움은 늘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외로움은 모든 관계가 끊어진 고립 속에 있는 것이지만, 고독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계를 맺고 있기 마련이다.
외로움은 어딜 둘러봐도 절망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고독은 관계 속에서 따뜻한 위안을 받을 수도 있고,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지펴 올릴 수도 있다.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관계가 끊어진 삶이야말로 얼마나 외로운 것인가.
배우 오드리 햅번은 ‘나는 외톨이가 되고 싶진 않지만,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좋겠다.’라 했다고 한다. 외톨이가 되어 고립되는 건 싫지만, 혼자서 조용히 고독을 즐기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이처럼 고독은 자기 의지로 즐길 수 있고, 즐기고 싶은 것일 수 있다.
외로움은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괴로운 심리 상태다. 고독 속에도 쓸쓸함은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의 쓸쓸함과는 달리 아늑한 심리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고독은 스스로 찾아 즐길 수 있지만 외로움을 즐길 수는 없다. 즐길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다.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일 수 있지만, 외로움은 혼자인 것이 괴로울 뿐이다.
고독은 그 안에 머물고 싶을 수 있어도 외로움은 어서 탈출하고 싶다. 탈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거나 탈출할 수 있는 기력마저도 잃어버렸을 때,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죽음을 두고 세상에서는 ‘고독사’라고 하지만, ‘외로운 죽음’ 혹은 ‘고립사’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고독사’라 할 수는 없다. 스스로 고독을 찾아 즐기다가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는다면 그것은 ‘사고사’라 해야 할 것이다.
‘고립’은 주관적인 감정과 개인적인 상황의 문제일 수 있지만, 사회적인 관계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오늘날과 같이 여러 가지 관계가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사회 구조 속에서 자칫하면 일탈되고 소외되기 쉽다.
‘외로움’을 두고 사적 차원의 주관적 감정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하여 사회 정책으로 대처하려는 움직임도,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그 일탈과 소외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대책으로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바로 사회적인 고립의 문제를 해결하여, 누구든 사회 관계망에서 이탈하거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손잡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정책 부서에도 그런 점을 첫째의 해결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고독사’라는 용어부터 ‘고립사’로 바로 잡아야 한다. 모든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은, 자칫하면 유희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고독사’가 아니라‘고립사’고 ‘외로운 죽음’이다.
고립 상태에 옥죄어 죽어갈지언정. 고독해서 죽는 사람은 없다. ♣(2025.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