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동화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맥박을 짚으며, 뛰는 소리를 듣고 보기라도 하려는 듯 온 감각 기능을 다 모으는 것 같다. 옷을 살짝 걷어 복부 곳곳을 꼭꼭 눌러본다. 그러고는 혈을 찾아 발가락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침을 놓는다. 전기 자극까지 얹어 자르르한 진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간호사가 와서 침을 뽑고는 엎드리라 하여 허리에 물리치료를 시작한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의사가 와서 등판에 부항을 붙이고 허리 곳곳을 지그시 누르면서 침을 놓는다. 급소를 찌를 때는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굳은 몸이 풀어지면서 뭔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요통으로 고통받으며 몇 곳 병원을 전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통증 치료’라는 한 한의원의 안내 현수막을 보고 전화 상담부터 했다. 그 이튿날부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몸의 여러 가지 증세를 말하는 중에 평소 만성 변비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도 하자 의사는 함께 치료해 보겠다고 했다.
쉽게 치료되지는 않았다. 치료를 받은 지 달포가 넘어가고 두 달이 넘어가는 사이에 약간의 차도가 느껴지는 듯은 했지만, 뚜렷한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의사를 믿고 싶었다. 치료를 위해 갖은 의술을 다 기울이고 있는 듯할 뿐만 아니라 온갖 정성을 다해 병을 다스리려 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성이란 자기 일에 대한 애착에서 나오기도 하겠지만, 더 깊은 마음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환자의 아픔에 대한 연민인 것 같았다. 맥을 짚고, 혈이며 환부를 찾아 꾹꾹 누르는 그 손길, 손끝에 사랑이 보이는 듯했다. 의사는 불법佛法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중이라 했다. 그 공부하는 마음과 진료의 손길이 무관치 않은 것 같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는 날짜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어느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으면서 ‘즐거운 병원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 의사의 정성에 관한 칼럼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 글을 의사에게 보여주었더니, 쑥스러워하면서도 감격해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매체에서 검색해 보고는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며 감동과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어느 날 진료대에 누운 나에게 의사가, 자기는 내 병을 치료해 줄 것이니, 나는 자기에게 글 치료를 좀 해 달라 했다. 글 치료? 동화 창작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 써보고 있는데, 잘 안 되더라 했다. 내가 쓰고 있는 장르와는 다르지만, 써놓은 글을 보고 싶다 했다. 며칠 후 글 몇 편을 메일로 보내왔다.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 동화였다.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보여주도록 구성해 놓았는데, 쉬운 이야기로 엮어나가면서도 주제 의식이 뚜렷한 글들이었다. 정진하고 있다는 불법의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어린아이들이 은연중에 느끼게 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었다.
보내온 동화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아이들의 화를 먹고 자라는 도깨비가 마침 화난 아이를 찾아내어, 화를 한 시간만 지니고 있으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그 아이는 어느새 화가 풀어지고 말아 그 약속은 못 지켜졌다는 것이다. 모든 마음은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라는 불법의 진리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있었는데, 우리가 아는 둘의 경주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북이가 토끼를 만나 함께 길을 가기로 했는데, 거북이는 꽃도 즐기면서 가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염소며 다람쥐를 도와주다 보니, 오직 자기 목표만을 향해 달리고 있는 토끼보다 많이 처지게 되었다. 그걸 본 다람쥐가 자전거를 빌려주어 토끼에게로 달려가 둘이 함께 타고 목적지까지 재미나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보니 환자 진료에 성심을 다하는 심정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것에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아닌가. 지금 자기 앞에 누워 있는 환자가 의사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 여기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목표지향적으로만 살다 보면 현재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할 사랑과 행복을 놓치기 쉬운 우리의 삶을 의사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통해 돌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자기가 해야 할 일과 처지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사랑과 행복을 누리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의사의 그 정성과 사랑 때문일까. 내 병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배변도 순조로워져 가고 있고, 요통도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치유에 대한 믿음을 준 그 손길과 의사를 향한 나의 믿음도 치료제의 몫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의사의 동화 속에 나타난 순수한 상념과 무구한 상상력의 세계는 내가 오히려 본받아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어휘 몇 곳만 조언해 주며 꼭 책으로 만들어서 세상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꿈과 심성을 다독여 줄 수 있도록 하라고 곡진히 권유하였다. ♣(2025.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