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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6권 26일
본이 되는 생활(훈독본)
날짜 : 1968. 11. 2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과 일치해야
사람은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갑니다. 이와 같이 어떤 목적을 정하여 그 목적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섭리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도 맨 처음에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표준으로 해 나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목표에 대한 소망, 목표에 대한 책임 혹은 사명을 절감하면 절감할수록 생활에 있어서 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목표로 나오셨느냐 하면 여러분 개인을 목표로 하고 나오셨습니다. 한 남성이면 남성이나 여성이면 여성을 중심삼은 가정을 목표하셨고, 그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을 목표하셨고, 그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그렇게 하여 세계와 천주까지 목표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적해 나오시는 방향과 오늘날 우리가 목적하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둘이 되게 되면 하나의 목적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중심삼고 하루하루 책임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나 선생님은 정해진 기간 내에 그 목적을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한 인간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후세로 밀고 나가서 목적을 성사하실 수 있지만,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처럼 후세로 밀고 나가서 목적을 성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있어서 어떤 일이 연장된다는 것은 그 목적성사에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제한된 권내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 기준과 일치되지 않아서 그 뜻을 연장시키면 일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21-217)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날
우리에게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어떤 목표의 기준과 일치되어 하나님이 됐다고 하실 수 있는 기준, 본이 되는 기준에 섰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성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의 요인밖에 안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여 국가면 국가나 만민의 본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섰다고 할지라도 그 입장이 하늘의 전체적인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의 일점(一點)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면 갈수록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것은 나를 끌고 가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지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대개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은사로 기쁨에 넘쳐서 자기 일신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출발하는 그 자리에서 기쁨이나 인생의 가치를 느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의 자리에 지나지 않지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의 자리에 가려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자리를 거쳐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라는 것이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것은 점점 확대되고 커집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뜻을 중심삼고 나오던 소망의 일념보다도 내 자신이 뜻을 중심삼고 따라 나가는 시일이 쌓이면 쌓일수록 맨 처음에 출발하던 때보다 더 자극적인 하나님의 은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목적의 자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찾는 참된 생활, 본이 될 수 있는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찾으려면 우리 개체를 중심삼은 제한된 한계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제한된 권내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제한된 환경에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영원한 목적관에 일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현세의 우리로서는 자기의 어떤 주장을 중심삼고 “나는 이렇게 산다”는 본을 세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러한 자리까지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은 주체성을 지니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성복귀를 하여 주체성을 갖출 수 있는 그 날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자리, 하나님의 영광이 내 자신과 완전히 화합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목적의 자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적인 무대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과 상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권내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을 두고 볼 때, 나를 중심삼고 본이 되는 생활이라는 원칙과 기원을 세우게 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결과가 맺어지더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그 기준을 어디에 세워야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기준을 세우면 출발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거쳐가는 과정도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하고 결과도 하나님과 더불어 맺어야 합니다. (21-220)
어떻게 실적을 남기느냐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끌고 나오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제한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환경적인 여건이 무한한 그 세계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가 상충되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우리 생활의 본 되는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으로 삼고 하나님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대하실 수 있는 자리에 계실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어떻게 하시느냐? 인간을 중심삼지 않고는 그 목적을 이루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세상에 있어서 과거의 역사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섭리의 터전을 연결시켜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도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이 접하셨던 그 초점을 우리의 생활에 흡수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역사과정에 있었던 일, 그냥 지나간 그분들의 사연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역사적인 섭리의 인연을 연장시켜서 현실적인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먼저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모든 선조들이 하나님과 인연을 맺었던 심정의 자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준을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세우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하나님과 인연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미래에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221)
그러면 문제는 현재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결부시킬 수 있는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것은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명령을 받든가, 가정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종족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민족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해야 됩니다. 그렇게 최고의 자리에서 결정된 것을 우리 생활권에 흡수시켜 가지고 현실과 결부시키는 자리에서 역사적인 재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재현의 기준이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된 사실이 이루어졌더라도 그것을 내가 끌고 갈 수 있고 밀고 갈 수 있는 실적을 남겨야 비로소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던 생활적인 기준에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원한 재산이 되고 밑천이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점이 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뜻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우주사적인 뜻이 있고 개체로 보게 되면 개인의 뜻이 됩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목적, 가정의 목적, 국가의 목적, 세계의 목적, 천주의 목적이 전부 다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래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중심삼고 찾아 나오시던 기준을 상속받아 가지고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개체에서부터, 오래된 사람들은 그 동안 닦아 놓은 생활기반을 통하여 어떻게 실적을 남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각자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할 때 역사를 대표하여 본이 될 수 있는 생활기준을 세워서 개인이면 개인을 찾아 나오시느라고 지금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내용과 현실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정을 연결시키는 그 무엇을 남기고, 가정은 종족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기고, 종족은 민족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본이 될 수 있는 생활의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21-222)
세계를 대표해서 본이 되어야
한 개인이면 개인이 민족과 국가를 구할 수 있는 본 되는 생활은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민족과 국가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기준을 찾고, 그 다음에는 민족과 국가를 이겨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본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서 살았는가를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한 순간 순간을 뒤에서는 하나님이 밀어 주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앞장서 나가면서 동역동사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매일매일 자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자리하고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대하고 나갈 때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자리에서 하나님과 결부된 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요? 아벨도 그런 자리에서 정성을 다했고, 노아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었고, 아브라함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고 기도할 때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왜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비참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했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타락한 세상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번식된 몸이니까 이 권내의 의식이나 인식을 가지고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기준과 접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성이 합할 수 있는 초점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터전을 닦아온 우리 선조들이 비참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아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자리가 후대에 연장되고 계승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 선 우리들이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본 되는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 나라와 세계를 대표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21-224)
통일교회의 주류는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옛날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은 기준에서 천사장이 유혹하던 그 자리를 넘어가야 했던 길,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자리를 넘어가던 길,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의 신세가 되어서 걷던 외로운 길, 모세가 가던 길, 예수님이 가던 길뿐만 아니라 역대의 모든 선조들이 갔던 길입니다. 그 길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지나갈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중심섭리의 때가 가정적인 시대면 가정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민족적인 시대면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국가적인 시대면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세계적인 시대면 세계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각 시대에 해당하는 시련과정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여기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옴으로 시작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짐을 지는 이것은 그야말로 여러분의 선조면 선조 앞에 본이 되는 길입니다. 아울러 지금 이 현실 세계의 만민들 앞에 본이 될 수 있는 길이요, 후손들 앞에 본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선조가 잘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나라가 크면 클수록 살림살이도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을 진 사람은 책임을 진 만큼 그 범위에 해당하는 복잡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책임이 크면 클수록, 책임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거기에 해당하는 십자가와 어려움이 동반됩니다. 그런 것을 피해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남을 시켜서 공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시점에서 역사를 몰고 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복귀섭리의 목적을 향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필요한 것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탁받을 사람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내게 옮겨서 국가를 거쳐 세계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통일교인도 현재의 이 자리에서 기뻐하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여기에 기반을 형성하여 수많은 교파들 앞에 밀고 나가고 민족을 거치고 세계를 묶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지상에 있어서의 본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뜻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여 본 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발전하는 역사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따라 나가지만 결국에는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목적이 어디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목적은 하나의 국가가 아닙니다. 세계도 아닙니다. 지상만이 아닙니다. 억천만 사탄들까지 추방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류의 목적을 향하여 우리는 희생하고 있습니다. (21-227)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부딪쳐도 먼저 부딪치고 상처를 입더라도 전체를 위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길, 그 길이 주류가 흘러가는 길입니다. 먼저 주류의 물줄기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반대되는 여건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동대의 능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반드시, 모든 물줄기는 주류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느냐? 이때에 우리는 노아의 심각했던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의 고향산천을 이별하고 가던 그 심정을 찾아가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민족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의분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내심에서 원수들의 모든 장벽을 일시에 폭파시키고 싶었던 간절함이 폭발되어 물질세계의 영화로운 모든 생활을 저버리고 뛰쳐나갔는데, 그와 같은 결의를 우리도 해야 됩니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승패라는 것은 과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원수를 대하여 싸워야 할 때 그 원수가 수십 년 동안 어떤 분야에 종사해서 전문가가 되었다면 그 실력을 가지고 참소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을 밟고 넘어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탕감복귀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피눈물과 피땀을 흘리는 자리, 보통의 인간들이 하기 좋아하는 자리가 아닌 슬픈 여건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연결되어 나갑니다. 그러기에 애국자는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과거의 역사가 비참했다면 그렇게 비참했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선전포고할 수 있는 자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현재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과 능동성을 길러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시대를 혁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애국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는 역사와 더불어 준비하여 엉클어진 역사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선지선열들의 생활기준은 하나의 재료는 될 수 있지만 전체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전체의 기준은 우리가 연결시켜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 성도들의 생활관념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 되는 생활의 기대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어려울 때 무엇이든지 끌어다가 인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한번 잡아당기면 전부 다 끌려옵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과거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지 않고는 더 큰 인연의 실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또 현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전력을 기울여 현재에 본이 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복 받던 그런 본이 될 수 있는 자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인연을 들고 나오던 그런 본이 될 수 있는 자리,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던 그런 기준을 여러분이 연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21-229)
본이 되는 생활의 기본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후대의 역사가 됩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역사는 사탄이 참소한 역사요, 하나님한테 불충했던 역사였기 때문에 앞으로 올 사람들에게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역사를 잘라 버리고 선한 역사를 연결시켜서 새로운 미래를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이 실현됩니다.
오늘날 축복가정들을 보게 되면, 그저 자기 가정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보다도 나라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도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다가는 자기의 목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본이 되는 생활의 기본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사람, 우리의 역사를 밝히는 데 필요한 사람, 이 시대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사람, 우리의 터전을 닦는 데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적인 기준에서 내가 짐을 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10년이면 10년 기간에 이룩하는 업적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자기의 소유로 남겨 놓을 수 있는 재산이 되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복귀섭리의 과정에 얼마만큼의 흔적을 남길 거예요? 이 과정을 귀찮다고 집어치워서야 되겠어요? “아, 사람들이 수고하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뜻을 이루어 나가는 때와 환경을 확인할 줄 알아야 됩니다. (21-231)*
천일국 훈독경 제6권 26일, 원문
본이 되는 생활
날짜 : 1968. 11. 2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과 일치해야
사람은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갑니다. 이와 같이 어떤 목적을 정하여 그 목적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한 해의 목적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게 될 때도 일년의 목표를 세웠으면 그것을 생활 가운데 본으로 삼아 나가지 않고는 그 해에 세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두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어떤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를 표준으로 하여 생활이 그 목표와 일치되어 나가지 않고는 일생의 목표를 완수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섭리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도 맨 처음에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표준으로 해 나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목표에 대한 소망, 목표에 대한 책임 혹은 사명을 절감하면 절감할수록 생활에 있어서 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목표로 나오셨느냐 하면 여러분 개인을 목표로 하고 나오셨습니다. 즉, 우리 개체를 표준으로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한 남성이면 남성이나 여성이면 여성을 중심삼은 가정을 목표하셨고, 그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을 목표하셨고, 그 종족을 중심삼은 민족,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그렇게 하여 세계와 천주까지 목표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소목적을 완결시키지 않고는 대목적의 터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대목적을 완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필요함과 동시에 여러분 가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필요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필요하고 이 세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적해 나오시는 방향과 오늘날 우리가 목적하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둘이 되게 되면 하나의 목적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중심삼고 하루하루 책임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방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6천 년 동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그 목적을 지향해 나오셨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나 선생님은 정해진 기간 내에 그 목적을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한 인간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후세로 밀고 나가서 목적을 성사하실 수 있지만,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처럼 후세로 밀고 나가서 목적을 성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있어서 어떤 일이 연장된다는 것은 그 목적성사에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제한된 권내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 기준과 일치되지 않아서 그 뜻을 연장시키면 일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21-217)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날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어요! 우리에게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어떤 목표의 기준과 일치되어 하나님이 됐다고 하실 수 있는 기준, 본이 되는 기준에 섰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성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의 요인밖에 안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여 국가면 국가나 만민의 본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섰다고 할지라도 그 입장이 하늘의 전체적인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의 일점(一點)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 길은 가깝거나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면 갈수록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길을 알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것은 나를 끌고 가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지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 대개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은사로 기쁨에 넘쳐서 자기 일신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출발하는 그 자리에서 기쁨이나 인생의 가치를 느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의 자리에 지나지 않지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의 자리에 가려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자리를 거쳐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라는 것이 시일이 가면 갈수록 작아지느냐, 또 내가 뜻을 성사해 나가면 나갈수록 더 작아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점점 확대되고 커집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뜻을 중심삼고 나오던 소망의 일념보다도 내 자신이 뜻을 중심삼고 따라 나가는 시일이 쌓이면 쌓일수록 맨 처음에 출발하던 때보다 더 자극적인 하나님의 은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목적의 자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왕왕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생활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찾는 참된 생활, 본이 될 수 있는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찾으려면 우리 개체를 중심삼은 제한된 한계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 개체의 어떠한 소원이니, 목적이니, 생활의식이니, 생활감정이니 하는 것들을 지녀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한된 권내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제한된 환경에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넘어가야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즉, 제한된 환경권 내에 머물러 있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이 권내에서 갖는 생활습관이나 생활태도는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영원한 목적관에 일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현세의 우리로서는 자기의 어떤 주장을 중심삼고 “나는 이렇게 산다”는 본을 세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러한 자리까지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은 주체성을 지니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성복귀를 하여 주체성을 갖출 수 있는 그 날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자리, 하나님의 영광이 내 자신과 완전히 화합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목적의 자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적인 무대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목적과 상극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권내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을 두고 볼 때, 나를 중심삼고 본이 되는 생활이라는 원칙과 기원을 세우게 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결과가 맺어지더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그 기준을 어디에 세워야 하느냐? 그것은 자기를 중심삼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기준을 세우면 출발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거쳐가는 과정도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하고 결과도 하나님과 더불어 맺어야 합니다. (21-220)
어떻게 실적을 남기느냐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끌고 나오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제한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환경적인 여건이 무한한 그 세계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가 상충되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우리 생활의 본 되는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으로 삼고 하나님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대하실 수 있는 자리에 계실 수 없게 됩니다. 먼 거리에서 관념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뿐이지 사실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동기로 삼을 것인가 할 때 역사시대에 섭리의 뜻을 대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이나 우리의 선조들을 동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어떻게 하시느냐? 인간을 중심삼지 않고는 그 목적을 이루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세상에 있어서 과거의 역사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선열들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섭리의 터전을 연결시켜서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도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이 접하셨던 그 초점을 우리의 생활에 흡수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역사과정에 있었던 일, 그냥 지나간 그분들의 사연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역사적인 섭리의 인연을 연장시켜서 현실적인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먼저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모든 선조들이 하나님과 인연을 맺었던 심정의 자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준을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세우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섭리해 나오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하나님과 인연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미래에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221)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현재에 있어서 본이 될 수 있는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결부시킬 수 있는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것은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명령을 받든가, 가정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종족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민족을 중심삼고 명령을 받든가 해야 됩니다. 그렇게 최고의 자리에서 결정된 것을 우리 생활권에 흡수시켜 가지고 현실과 결부시키는 자리에서 역사적인 재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재현의 기준이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된 사실이 이루어졌더라도 그것을 두고 보는 자리에서는 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그것을 내가 끌고 갈 수 있고 밀고 갈 수 있는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과거부터 남겨진 생활기준, 즉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던 생활적인 기준에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원한 재산이 되고 밑천이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점이 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수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있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수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 있고, 이스라엘 흥망성쇠의 모든 여건들도 헤아릴 수 있는 날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냥 알고만 지나가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내가 아무리 안다고 하더라도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본이 될 수 있는 흔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뜻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우주사적인 뜻이 있고 개체로 보게 되면 개인의 뜻이 됩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목적, 가정의 목적, 국가의 목적, 세계의 목적, 천주의 목적이 전부 다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래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중심삼고 찾아 나오시던 기준을 상속받아 가지고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개체에서부터, 오래된 사람들은 그 동안 닦아 놓은 생활기반을 통하여 어떻게 실적을 남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각자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할 때 역사를 대표하여 본이 될 수 있는 생활기준을 세워서 개인이면 개인을 찾아 나오시느라고 지금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내용과 현실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정을 연결시키는 그 무엇을 남기고, 가정은 종족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기고, 종족은 민족을 연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본이 될 수 있는 생활의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21-222)
세계를 대표해서 본이 되어야
그러면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여러분이 그 뜻과 일치되어 있어요? 그렇게 일치되어서 뜻이 지향하는 목적을 향하여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어요? 그 뜻이 크면 큰 만큼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역사는 거기서부터 출발해 나갑니다. 역사의 본이 될 수 있는 자리에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여러분은 너무나 경솔합니다. 한 개인이면 개인이 민족과 국가를 구할 수 있는 본 되는 생활은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민족과 국가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기준을 찾고, 그 다음에는 민족과 국가를 이겨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본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서 살았는가를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멋대로 둥둥 떠다녔습니다.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고 방황했습니다. 오늘 한 순간 순간을 뒤에서는 하나님이 밀어 주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앞장서 나가면서 동역동사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매일매일 자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자리하고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떨어진 것을 말하고, 갈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간격이 벌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압축시켜 접촉시키려면 중간에서 제지하는 어떤 힘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간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기 때문에 그 간격을 압축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압축시키는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우리 몸으로는 할 수 없지만 심정세계에 입각한 그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강합니다. 이와 같이 목적의식에 대한 강한 힘, 생활의식에 대한 강한 힘, 집념에 대한 강한 힘이 작용해야 그 간격을 좁혀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운명을 결정짓던 순간의 각오와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이 개인을 중심삼은 것이었다면 문제가 달랐겠지만 민족을 중심삼은 것이었기 때문에 심각했습니다. 나 하나 패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이 서러움을 당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또, 나 하나 패하게 될 때 세계적인 문제가 좌우되었기 때문에 심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자기가 수십 년 동안 수고하여 준비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대하고 나갈 때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자리에서 하나님과 결부된 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요? 아벨도 그런 자리에서 정성을 다했고, 노아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었고, 아브라함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고 기도할 때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왜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비참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했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타락한 세상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번식된 몸이니까 이 권내의 의식이나 인식을 가지고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기준과 접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성이 합할 수 있는 초점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터전을 닦아온 우리 선조들이 비참하고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아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자리가 후대에 연장되고 계승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 선 우리들이 현실에서 하나님 앞에 본 되는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 나라와 세계를 대표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21-224)
통일교회의 주류는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옛날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은 기준에서 천사장이 유혹하던 그 자리를 넘어가야 했던 길,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자리를 넘어가던 길,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의 신세가 되어서 걷던 외로운 길, 모세가 가던 길, 예수님이 가던 길뿐만 아니라 역대의 모든 선조들이 갔던 길입니다. 그 길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지나갈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중심섭리의 때가 가정적인 시대면 가정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민족적인 시대면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국가적인 시대면 국가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하고, 세계적인 시대면 세계적인 기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각 시대에 해당하는 시련과정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여기에 들어와서 전부 다 짐을 풀고 홀가분하게 자기 혼자서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그러나 짐을 풀어놓아서는 안됩니다. 짐을 바꿔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짐은 나와 상관이 없었던 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짊어지고 가는 이 짐은 우리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짊어진 짐이 무겁다고 해서 가벼운 짐으로 바꿔 져서는 안됩니다. 그 짐이 만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힘이 없으니까 가벼운 짐을 지겠다” 하게 되면,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할 큰 복의 터전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고대하고 만민이 필요로 하는 복을 나누어주셔야 하므로 짐을 무겁게 지면 질수록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복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에 귀한 복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민족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복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조상이 됩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여기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옴으로 시작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짐을 지는 이것은 그야말로 여러분의 선조면 선조 앞에 본이 되는 길입니다. 아울러 지금 이 현실 세계의 만민들 앞에 본이 될 수 있는 길이요, 후손들 앞에 본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선조가 잘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부터 박차를 가하고 여기서부터 힘을 다하여 나가야 합니다.
어떤 나라든지 나라가 크면 클수록 살림살이도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을 진 사람은 책임을 진 만큼 그 범위에 해당하는 복잡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표자와 미국의 대표자는 위치가 다릅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이 조그마한 삼천리 반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큰 나라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큰 나라의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와 연결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해결을 짓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운명과 운세에 보조를 맞춰 가지고 해결을 지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책임이 크면 클수록, 책임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거기에 해당하는 십자가와 어려움이 동반됩니다. 그런 것을 피해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남을 시켜서 공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시점에서 역사를 몰고 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복귀섭리의 목적을 향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필요한 것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탁받을 사람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내게 옮겨서 국가를 거쳐 세계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통일교인도 현재의 이 자리에서 기뻐하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여기에 기반을 형성하여 수많은 교파들 앞에 밀고 나가고 민족을 거치고 세계를 묶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지상에 있어서의 본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뜻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여 본 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발전하는 역사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따라 나가지만 결국에는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한강이면 한강을 중심삼고 볼 때 흐르는 주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류는 언제나 주류로 남습니다. 시대가 교체되고 환경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그 주류는 언제나 변함 없이 흘러갑니다. 그렇게 변함 없이 흐르는 주류와 함께 흘러 나가는 물줄기라고 하더라도 그 주류가 흘러가는 방향에 조금만 거슬리거나 조그마한 조건만 걸리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의 주류는 어디로 가느냐? 이 주류의 방향이 세계로 가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민족을 위하여 가다가 돌기 시작하면 세계의 주류와 인연이 끊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새로운 주류는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이어받습니다.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목적이 어디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목적은 하나의 국가가 아닙니다. 세계도 아닙니다. 지상만이 아닙니다. 억천만 사탄들까지 추방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류의 목적을 향하여 우리는 희생하고 있습니다.
주류라는 것은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길을 택합니다. 그렇게 가는 길이 있다면 죽으나 사나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류는 가는 도중에 어떤 것과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무섭지 않습니다. (21-227)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딪쳐도 먼저 부딪치고 상처를 입더라도 전체를 위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길, 그 길이 주류가 흘러가는 길입니다. 그러지 않고 구경이나 하고 있다든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야 이 정도로 가면 되겠지” 한다면 지류밖에 안됩니다. 먼저 주류의 물줄기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반대되는 여건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동대의 능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반드시, 모든 물줄기는 주류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느냐? 이때에 우리는 노아의 심각했던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의 고향산천을 이별하고 가던 그 심정을 찾아가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민족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의분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내심에서 원수들의 모든 장벽을 일시에 폭파시키고 싶었던 간절함이 폭발되어 물질세계의 영화로운 모든 생활을 저버리고 뛰쳐나갔는데, 그와 같은 결의를 우리도 해야 됩니다.
이런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승패라는 것은 과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원수를 대하여 싸워야 할 때 그 원수가 수십 년 동안 어떤 분야에 종사해서 전문가가 되었다면 그 실력을 가지고 참소합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을 밟고 넘어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탕감복귀를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피눈물과 피땀을 흘리는 자리, 보통의 인간들이 하기 좋아하는 자리가 아닌 슬픈 여건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연결되어 나갑니다. 그러기에 애국자는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과거의 역사가 비참했다면 그렇게 비참했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선전포고할 수 있는 자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현재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과 능동성을 길러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시대를 혁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애국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과거의 선지선열들이 거쳐왔던 모든 뜻은 한 때의 것밖에 안됩니다. 그들을 영원한 표준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생활적으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부분이지 내 생활 전체에 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내 혜택을 받아야 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선지선열들이 남긴 실적을 연결시켜서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로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는 역사와 더불어 준비하여 엉클어진 역사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선지선열들의 생활기준은 하나의 재료는 될 수 있지만 전체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전체의 기준은 누가 연결시켜야 되느냐? 우리가 연결시켜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 성도들의 생활관념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본 되는 생활의 기대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어려울 때 무엇이든지 끌어다가 인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한번 잡아당기면 전부 다 끌려옵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과거의 그 누구보다도 강하지 않고는 더 큰 인연의 실체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또 현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의 이념은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전력을 기울여 현재에 본이 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복 받던 그런 본이 될 수 있는 자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인연을 들고 나오던 그런 본이 될 수 있는 자리,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던 그런 기준을 여러분이 연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동정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21-229)
본이 되는 생활의 기본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우리는 그 복잡한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난히 넘어갈 수 있고, 갔다가 다시 올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을 못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왔다갔다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의 노정은 개척노정이기 때문에 “너희들 오라” 하면 전부 다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목적을 완성해야 됩니다. 거기에 가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와 가지고 만민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갈 때 “아이구, 이 놈의 세상! 다시 올 것 생각하면 진저리난다” 했더라면 이 땅 위에 오지 못합니다. 그렇게 갔다가 와야 할 운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갈 때도 올 것을 생각하고 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도 이 민족의 선두에서 개척자의 길을 가고 있으니까 고개를 넘어 평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원의 닻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서 만민을 데리고 가서 살아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후대의 역사가 됩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역사는 사탄이 참소한 역사요, 하나님한테 불충했던 역사였기 때문에 앞으로 올 사람들에게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역사를 잘라 버리고 선한 역사를 연결시켜서 새로운 미래를 갖추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이 실현됩니다.
오늘날 축복가정들을 보게 되면, 그저 자기 가정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보다도 나라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도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다가는 자기의 목적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본이 되는 생활의 기본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사람, 우리의 역사를 밝히는 데 필요한 사람, 이 시대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사람, 우리의 터전을 닦는 데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적인 기준에서 내가 짐을 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10년이면 10년 기간에 이룩하는 업적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자기의 소유로 남겨 놓을 수 있는 재산이 되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복귀섭리의 과정에 얼마만큼의 흔적을 남길 거예요? 이 과정을 귀찮다고 집어치워서야 되겠어요? “아, 사람들이 수고하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뜻을 이루어 나가는 때와 환경을 확인할 줄 알아야 됩니다. (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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