댑싸리 전설(4)
가을이 여물어가는가 싶더니 올해도 댑싸리가 발갛게 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렸을지도 모르는, 그렇지만 볼 수 없었던 빛깔이지요. 당신이 씨 뿌렸던 그 댑싸리의 후예들입니다. 가을비가 살포시 내리더니 빗물의 무게 때문인지 드러누운 것도 있네요.
그때 당신이 씨를 뿌린 건 당신이 떠나던 해의 봄이었지요. 그것이 움이 터서 싹이 올라와 잔잔한 이파리들을 피워낼 무렵 초여름에 당신은 환우를 안고 아이들에게로 떠났지요. 아이들 집에 있던 어느 날, 한데 몰려 있게 하지 말고 고샅에 한 줄로 옮겨 심어 달라 했지요.
당신이 댑싸리 씨를 뿌린 것도 처음이었고, 나도 당신이 뿌린 씨로 댑싸리를 처음 알았지요. 어디서 복슬복슬 이쁘게 자라는 댑싸리를 보고 가까이 두고 싶었던지, 가을에 발갛게 물드는 그 모습을 어여삐 여겼던지, 어쨌든 그것으로 당신과 내가 그것과 인연을 맺었지요.
약재藥材를 좋아하는 당신이라, 혹 약에 쓰려고 기르려 했던 건 아니었는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잎을 데쳐서 나물로 먹거나 국을 끓이기도 한다지만, 씨는 지부자地膚子라하여 간염, 간 경화며 피를 맑히는 데도 좋다는군요.
당신의 그러저러한 뜻을 들어볼 겨를도 없이 당신은 곁을 떠나 있다가 급기야는 댑싸리가 한창 푸르던 어느 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고 말았지요.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안고 떠나갔겠지요. 나에게는 원망하고 싶은 말도 많았을 것이고요.
당신이 뿌려놓은 댑싸리는 그런 사연도 모른 체 무럭무럭 잘 자라 잔잔한 잎들이 모여 커다란 달걀을 세워놓은 듯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강아지 털같이 복슬복슬 어여쁜 모습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오자 연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더니 눈이 아릴 듯 붉은빛이 되었습니다.
그 붉은빛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채 다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말들을 한꺼번에 다 토설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상념에 문득 얼굴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 붉은 빛이 작년에도 들었고, 올해도 지금 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뿌린 그 댑싸리가 가을 붉은빛에 이어 단풍이 지듯 잎과 씨를 떨구고 말라 갔지요. 겨울 지나 봄이 오면서 마른 댑싸리를 걷어낸 자리에 파릇파릇 싹이 돋더니, 당신이 가던 해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 고샅을 보기 좋게 채웠습니다.
그 댑싸리가 또 그렇게 붉은 물이 들었다가 씨를 남기고 가버린 자리에 올해도 그렇게 나고 살고 물들고 있습니다. 씨의 씨가 커서 저렇게 물이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가신 지 벌써 몇 해가 흘러가고 있네요.
댑싸리의 꽃말이 ‘오래 참는 사랑’, ‘고백’이라는 걸 당신은 아십니까? 내가 만약 그런 말을 당신에게 했다면, 빈 웃음을 어이없이 날릴지도 모를 일이지요. 언제 우리가 그렇게 살아 봤냐면서. 그래서 나에 대한 원망의 말도 많이 남았을는지 모르겠네요.
어찌하였거나 내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도 댑싸리는 피고 물들고 지기를 거듭하겠지요. 그냥 저들끼리 살도록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늘 보살피겠습니다. 나야 그것으로 나물을 해 먹을 수도 없고 약재로 쓸 수도 없는 일이지만, 따뜻이 살피며 지내겠습니다.
추석이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떠난 후 명절이면 그랬듯이 당신을 만나러 아이들에게로 달려갑니다. 추석을 맞아 댑싸리 소식을 안고 갔지요. 그 역귀성이 나의 일이 될 줄은 일찍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명절이면 언제나 아이들이 늙은 부모에게로 달려올 줄 알았지요.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들 집에서 당신을 만나야 하네요. 영정影幀과 지방紙榜으로 당신을 만나고, 그리하고는 아들 집 가까이에 있는 산집으로 달려갔지요. 비가 내리고 있더군요. 아들이 튼실히 지어준 집이라 비 맞을 일은 없겠지요,
당신 앞에 서 있는 나와 아이들의 얼굴에도 무엇이 흘러내리는 듯했지만, 빗물이겠지요. 지금 물들고 있는 댑싸리도 비를 맞고 있겠지요, 빗물이 무거워 드러누운 것도 있을 테지만, 날이 개면 다시 일어나 더욱 깊은 물이 들어가겠지요.
당신에게 올해도 댑싸리가 잘 자라 고운 물이 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내년 추석 때는 물론, 내가 살아 있는 날의 추석이면 언제나 물들어가는 댑싸리 소식을 전할 수 있겠지요. 언제까지나 전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당신이 좋아했을 그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내겠습니다. 당신이 못 보고 떠난 그 붉은빛을 보면서 그 빛 속에서 당신이 하는 말들을 묵묵히 듣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 모두 쏟으소서, 마음 가벼워질 때까지 붉게 붉게 물드소서. 댑싸리여, 당신이여-!♣(2025.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