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살아있었다
이태 만이다. 그리워하던 주지봉에 올랐다. 별다른 사정이 있는 날 말고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그 길의 풀이며 나무 하나 눈길 주지 않은 게 없고 그 산의 흙이며 돌덩이에 발길 대지 않은 곳이 없으리만큼 오르고 내렸다.
그 길과 산을 내 글 속에 고스란히 담아 책 한 권 엮기도 했다. 그 나무며 그 산이 품고 있는 숨결은 곧 나의 호흡이고 맥박이었고. 내뿜는 정기는 곧 내 삶의 살이 되고 근육이 되곤 했다. 그러던 산을 이태나 버려두어야 했다.
방안에서 혼절하여 쓰러졌다. 옆 사람이 가뭇없는 길을 떠나고 난 뒤 고적하게 지내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 겨우 핸드폰을 잡아 119를 불러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급기야는 대처 큰 병원 병실에 누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영양 불균형과 척주 골절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몸을 맡겨 두어야 했다. 두어 주일 후 겨우 내 몸을 내가 찾아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난날의 그 몸도 아니었고, 지난날 같은 내 생존도 지켜나갈 수 없게 되었다.
절망만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을 보내주었다. 하루 두어 시간이었지만,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손길을 받아 생존을 지키며 다 치유하지 못한 몸과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병원을 이웃 드나들 듯하면서 때로는 먼 길도 오가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생존만이 아니라 생활이 아주 조금씩 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게 이태 만이었다. 내 생활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지만, 조금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세상이 여간 고맙지 않다.
돌아 보이는 내 모습 중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숲길을 걷고 비탈길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오후, 지난날 오를 적보다는 조금 더 이른 시각에 등산화를 신고 나섰다. 그리움으로 설레며 떨리는 걸음을 떼었다.
조금 먼 지난날에는 나 말고도 이 산길을 오르고 내리던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가풀막에 가로목도 걸쳐 계단 삼아 오를 수 있도록도 해놓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오직 나만을 위한 나만의 길이 되었다. 그 길을 이태 동안이나 못 올랐으니-.
십수 년 전, 내가 그 산을 삼백 번 오른 것을 기념하여 주위 사람들이 뜻을 모아 내 이름까지 새겨넣은 표지석을 마루에 세워주기도 했다. 오를 때마다 ‘朱芝峰’ 세 글자를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기도 했는데, 그 돌은 잘 있을까. 길은 그대로 온전할까.
아득했다. 들머리부터 마른 넝쿨 풀들이 얼기설기 얽혀 길을 막고 있었다. 이것들이 다른 곳도 얼마나 이렇게 막고 있을까. 돌아설 수는 없다. 힘주어 뜯어내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니 앞이 트여왔다. 수풀 길 지나 큰 나무들 서 있는 곳으로 들었다.
비명 같은 환호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저앉아 낙엽 아래 잠들어 있는 그 흙에 손을 짚었다. 해방된 조국 땅에 첫발을 디딘 어느 독립지사가 흙에 입을 맞추며 감격했다는 일화가 헛말이 아님을 알 것 같았다.
그 감격을 안고 한 발 한 발 나가면서, 보이지 않는 길은 감각과 기억을 불러내었다. 그 나무, 그 바위가 그 자리 그 모습대로 있어 주었다. 향긋한 생강나무며 얼룩이 물푸레나무, 봄이면 해사한 꽃을 피우는 산벚나무도 그대로였다.
다만 내가 변했다. 보폭도. 보속도 지난날 같지 못했다. 바위며 가풀막을 딛고 오르기가 전 같지 않았다. 걸음이 둔해지고 무릎이 떨려왔다. 가을이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산에 오르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 가을에 힘을 냈다.
드디어 마루 직전 가풀막이다. 먼 지난날 누가 가로목 173개를 놓아 오르는 힘을 덜어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썩고 허물어졌다. 그래서 내가 그 계단 길 따라 밧줄을 메어놓기도 했다.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하얀 줄 빛이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만만치 않았다. 남아 있는 가로목을 딛고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오르기도 힘에 겨웠다. 짐승처럼 엎드려 네발로 가쁘게 기어오르기도 했다. 드디어 정상이다! 수풀에 묻히긴 했지만, 표지석 글자도, 내 이름도 그대로다.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가 있다니!
감격도 잠시, 날이 내 삶처럼 저물어 들었다. 전보다 집을 일찍 나서긴 했지만, 힘이 예 같지 않은 걸 몰랐다. 서둘러 감격을 거두고 내림 길을 잡았다. 내림 길엔 어둠이 더 빨리 내리지 않던가. 내 늙어가는 몸처럼. 어둠살 헤치고 내려왔을 때, 피인지 땀인지로 온몸이 젖었다.
집에 이르니 다스리고 있는 허리와 무릎이 쑤셔왔다. 내일 또 병원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나아가던 허리가 조금 더 아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몸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은 또 무엇인가. 길을 보았다. 내가 걷지 않은 세월 속에서도 길은 살아있었다.
내가 나아갈 길도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의 그 길처럼, 길은 내 앞으로 올 것이다. 내 그리움의 길이-. ♣(2025.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