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대하여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 바깥쪽으로는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주위로는 산이 새 날개처럼 둘러 서 있다. 강둑 안쪽으로는 길을 따라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강에는 윤슬을 실은 강물이 흐른다. 사시장철 변함없는 풍경들이다.
아니다. 그 풍경이 한 시도 같은 적이 없다. 들판도 산도 달마다 철마다 모양이며 빛깔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강둑 벚나무도 철을 맞추어 쉼 없이 몸을 고쳐 가고, 물도 흐르는 자리 따라 몸짓을 달리해 간다.
이렇게 피고 지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저 무심히 흐르는 것이기만 하랴.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지녔던 모습들이 일거에 깨어지는 상처와 고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다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들, 저들 일이야 뭐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모두 자연이요, 하늘의 일이지 않은가. 그래도 물은 제 줄기를 지니고 흐를 수나 있고, 나무들도 풀들도 제철을 누릴 수나 있지, 나에게도 그런 제 줄기며 제철이라는 게 있었던가.
희로애락 우여곡절 만난萬難 끝에 한 생애를 마무리 짓고, 이제는 초원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야생마라도 될 수 있을까 했는데, 허몽 속에서나 그릴 수 있을 뿐이었다. 물은 흐르고 자갈만 처진다더니, 세월 따라 모든 게 흘러가고 쳐진 건 외로움과 병마뿐이다.
붙이도 떠나고, 티격태격하던 옆 사람도 가버리고, 마음에는 공허만 가득하고, 몸에는 숙병만 차 있다. 누구는 ‘아프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 했지만, 아파도 누가 옆에 있어야 몸도 마음도 기대어 볼 수나 있을 텐데, 내가 짚을 곳은 절망의 벽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세상이 그리 야박하지만은 않았다. 고단한 처지에서 나이 들고 병들어 기댈 곳 없는 이들을 살펴주는 제도가 있어, 그나마 몸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일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듯했다.
한 달에 정해진 날수를 두고 하루에 길지 않은 시간 도움을 받을 뿐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생존 수단이며 고단한 심사까지도 잠시나마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도 흐르는 시간 따라 기한이 다 차면 다시 통과의례를 치러야 한다.
마치 입학시험을 앞둔 학생 심정이라 할까. 기일이 하루하루 다가오면 불안에 더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게 짐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심정이란 마치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안수정등岸樹井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經에서는 사람 사는 걸 두고, 맹수에 쫓겨 낭떠러지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위에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등나무 줄기를 갉아 먹고, 아래 우물 속에는 굶주린 독사들이 먹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했다.
내 처지에 빗대어 보면, 나이와 병에 쫓기다가 겨우 살펴주는 제도를 만났는데, 시간이 그 제도의 끝으로 몰아내니 기다리는 것은 다시 노쇠와 병고뿐이라는 것이다. 이 절망을 어찌해야 할까. 강둑을 걸으며 보이는 산도 물도 모두 절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같다.
높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활동력을 과시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의지와 노력이 모자라 홀로 설 힘을 갖추지 못한 게 무렴한 상념으로 차오르지만, 가버린 일신의 세월이며 와버린 심신의 고단을 어찌 다스려야 할까.
관계 기관에서 방문 점검을 나왔다. 마치 입사 면접을 보는 것 같았다. 마음과 몸의 상태를 묻는 대로 답하는 가운데, 아무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비감할 뿐이라 했다. 잘 알겠다 하고 심사관이 돌아가며 의사 소견서를 내어 달라 했다.
지정 병원에 가서 의사의 친절한 진단을 여러모로 받는 중, 문진에서 이렇게 많은 분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가버린 사람을 하루라도 빨라 따라가고 싶다 했다. 의사는 그런 말씀 말라 했지만, 솔직한 심사이기도 했다.
그런 의례 끝에 세상이 고맙게도 다시 한번 나를 돌아봐 주었다. 몇 년 동안은 덜 외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거쳐야 할 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 통과가 희망으로 안겨 왔다. 피에르의 희망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운동가 아베 피에르(Abbe Pierre, 1912~2007) 신부는, 세상에 소망들은 많지만, 희망은 ‘삶의 의미, 단 하나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지경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 소망에서 내 삶의 의미를 얻었다. 몸부림치는 아수라의 생존이 아니라, 일상을 무난히라도 지켜갈 수 있는 사람의 생활, 그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았다. 또 언제 그 의례 앞에 서야 할 때가 올지라도, 지금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삶의 의미가 있다.
그 희망으로 강둑을 걷는다. 물 위에 반짝이는 윤슬이 찬란하고, 산빛은 오늘 더욱 찬연해 보인다. 내일은 나를 기다리는 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몸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도 즐겁고도 유익한 자리를 만들고 싶다.♣(2025.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