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에 대하여
오래 사귄 친구 이름이 한동안 기억나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민망한 일은 아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보면 실례가 되거나 실망을 줄 것 같아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주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리라 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잊어버렸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 했더라? 한참을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욕실에 가서 무엇을 하리라 하고 방에서 욕실로 갔는데, 순간 내가 왜 여기 왔지? 어처구니없는 의문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엄살’. ‘다혈질’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응석’ ‘어리광’, ‘고혈질’, ‘고혈압’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말만 맴돌고, 그 말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이렇게 어찌 살아야 하나 하는 암담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 건망健忘이 부쩍 심해진 것 같다. 주위에 그런 사실을 털어놓으면 다른 이들도 자주 그런다면서, 다 나이 탓이라 했다.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건망을 다 앓아야 하는가. 그런데 건망에 ‘튼튼하다’는 뜻의 ‘건健’ 자는 왜 붙는 걸까. 잊는 게 튼튼하다는 말인가. 우습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나이 탓만 아니라 수면과 운동이 부족해도, 스트레스와 우울이 심해도, 과음과 흡연을 해도, 고혈압 당뇨 등 만성 질환이 있어도, 사회적 고립 및 대화 부족이나 정신적 자극 부족도 기억력과 인지력 저하를 초래하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했다.
그런 위험 요인 중 몇 가지가 마치 나를 지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근래 내가 처한 처지와 환경에서 그런 요인들이 거의 비롯된 것 같다. 요즘 와 더욱 심해진 것 같은 건망의 원인으로 와 닿는다.
어쩌다 홀로 사는 처지가 되었다. 잠을 잘 못 이룰 때도 있고,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을 겪기도 한다. 거기다가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만성 질병에 독작과 독백으로 고립감을 이겨내려 해보기도 한다. 건망의 위험 요인을 두루 갖추고 지내는 셈이다.
그럴 바에 모든 것을 싹 몰각해 버릴 수는 없을까. 우스갯소리로 주위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본인은 편한 병이 치매라기도 한다. 모든 걸 다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치매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잊고 싶은 것일수록 왜 그리 잊히지 않는 걸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잘 떠올라주면, 그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될까. 그런 일보다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실수며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 상처를 주거나 받은 일이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한 일이 실수며 시행착오인 줄도 모르고 저지를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상처도 그렇다. 내가 남에게 알게 모르게 준 상처도 많았을 것이다. 남들도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준 것이든 받은 것이든 상처 진 기억들이 뇌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내가 끼친 상처가 잘 잊히지 않는다.
세상살이를 모두 어찌 편안하게만 할 수 있을까만, 세상에 부대끼면서 살아오는 사이에 생겨난 고통스러운 상처 때문에 가끔씩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내 탓이 크겠지만, 이런 일들은 왜 내 건망의 목록에 들어주지 않는 걸까.
부처님의 어느 경전을 보면 ‘평안한 사람’이란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추억하여 우울해하지도 않는’ 사람이라 했다. 그렇게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이 또한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신적 자극이 부족하면 뇌 가소성可塑性이 감소하여 기억 회로가 퇴화한다고 했다. 정신 자극에 도움이 될까 해서 책 읽기며 글쓰기에 마음을 바쳐 보고, 시 외기를 즐겨 해본다. 그런 일이 아픈 기억들을 밀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다.
내가 즐겨 외는 시에는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조창환의 「나는 늙으려고」, 박주택의 「하루에게」, 계절에 따라서는 봄에는 신달자의 「봄의 금기 사항」, 여름에는 오세영의 「파도는」, 가을에는 문병란의 「반려返戾」, 겨울에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들을 즐겨 외지만, 내가 특별히 애송하는 시는 조병화의 「늘, 혹은」이다.
「늘, 혹은」은 “늘, 혹은 때때로 /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로 시작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 하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인생다운 일이라 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이라 했다.
사람이라도 좋고, 사물이라도 무방하다. 그렇게 시를 외며 정신에 자극을 조금이라도 주다 보면, 그리하여 늘 혹은 때때로 누구를, 무엇을 생각하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다 보면, 내 건망의 늪에도 청량한 샘물이 고일 수 있을까. 살아 있음이 확인될까.
건망이란 일깨워 가는 내 생각으로 조금은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아린 믿음도 가지면서 조용히 시 하나 외어 본다. ♣(202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