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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김규식의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참석 여비 1만원(2억원) 지원.
보천교 재정 담당자인 김홍규의 상해임정에 대한 군자금 11만원(42억원) 지원 발각사건
보천교 간부 임규의 상해임정 간부 라용균에 5만원 전달
보천교 간부였던 신채호선생 부인 박자혜 여사의 만주 정의부에 군자금 지원 가교역할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 강홍렬과 배홍길 파견 및 의열단에 가입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에게 5만원 지원 등
한편, 비밀리에 전달되어야 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의 정확한 재정 지원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천교의 거액 독립자금( 현 가치 1,000억원 추정) 지원에 대한 정황과 언급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만주 관동청 경무국, 일본 검경문서나 재판기록에 나온다.
특히,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는 1923년 충청도의 보천교 신자 박운업이 “보천교는 상해임정에 있는 힘을 다하여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할 때 환영 나온 보천교 신도들에게 “우리는 전라도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는 말을 했다.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조경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그 이후에도 측근들에게 평소 이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천교의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무지하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한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교묘한 분열과 잔혹한 탄압정책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불교와 기독교만 종교로 규정하여 학무국에서 관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천교,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규정하여 경무국에서 감독하게 한다.
일제의 교활한 분열 및 이간책동은 결국 1925년 보천교를 친일단체로 매도케 함은 물론, 1936년 ’유사종교 해산령‘을 발동하여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총독부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과 보화문을 불교단체에 헐값으로 매각하여 현재 불교 조계종 본사인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의 핵심 목재로 사용되게 하였다. 본소 청기와는 청와대 구 본관 건물 기와로 사용되어 청와대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둘째, 일제가 획책한 식민사관에 기초한 식민사학자와 친일언론 및 종교인등 식민잔존 세력 간의 상호 카르텔이다.
이들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낙인을 찍어 왜곡 은폐시켰던 총독부의 행태를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는 보천교를 대한독립운동사 전체 맥락에서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많은 장애가 되고 있다.
오늘은 전체 대한독립운동사의 상징인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서 있다. 그 동안 식민사관의 프레임에 의해 “보천교는 오랫동안 왜곡 날조된 상태로 독립운동사의 미아로 남아있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이젠 보천교를 하나의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사의 큰 맥락에서 그 발자취를 사실 그대로 재평가하고 올바르게 복원하여 “우리 한민족 역사주권의 진정한 회복의 첫 출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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