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괘릉리(掛陵里)
친애하는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 여러분!
지금은 왜소하게 웅크리고 앉아 ‘원동들’ 설한풍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들의 모교 영지초등학교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지난 1963년 괘릉초등학교가 분리되어 나가기 전 전성기에는 600여 명의 재학생에 한 해에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유수(有數)의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1963년 이전 우리들 모교의 학구(學區)인 방어리(防禦里)와 북토리(北吐里), 제내리(堤內里), 신계리(薪溪里), 괘릉리(掛陵里), 활성리(活城里), 시리(矢里 ; 지금의 시동)에는 때 묻은 가로등 전봇대에 달라붙은 껌딱지 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파일에서는 그 시절 우리들이 살던 영지초등학교 관할구역의 마을마다 얽히고설킨 아련한 사연들을 골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이 파일에서는 동대산맥(東大山脈)의 동산령(東山嶺) 기슭에 자리 잡은 괘릉리(掛陵里)와 관련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지기 이 용 우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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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의 향리 괘릉리(掛陵里)는 450여 년 전 이만동(李晩童)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이루어진 마을로 신라 제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이 위치하고 있어 ‘능말’, ‘능지촌(陵旨村)’ 또는 ‘괘동(掛洞)’이라 불렀다.
지금의 괘릉리(掛陵里)는 1914년, 일제(日帝)가 전국적으로 단행한 행정구역 통폐합(統廢合)에 따라 신계리의 ‘하섶’, ‘영못안’, ‘밤갓등’을 합하여 이룩한 마을이다. 이하에서는 괘릉리(掛陵里)의 중요 문화재(文化財)와 자연부락을 소개한다.
괘릉(원성왕릉)
괘릉리의 문화재(文化財)라면, 무엇보다 마을 이름을 탄생케 한 괘릉(掛陵), 즉 원성왕릉이다.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소재하는 괘릉은 왕릉(王陵)이 조성되기 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신라왕의 유해(遺骸)를 그 연못 위에 걸어 안장했다 해서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마을이름도 왕릉(王陵)이 소재하는 부락이라는 의미로 능말, 능지촌, 괘동(掛洞)을 거쳐 괘릉리(掛陵里)라 부르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학교에서든, 마을에서든, 면사무소에서든 '괘능리'라고 불렀는데, 언젠가부터 '괘릉리'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1996년 괘능국민학교 3회 졸업생 기념사진
괘릉은 7.53ha(22,590평)의 면적에 소나무가 울창한 넓은 능역(陵域)을 가지고 있으며, 형태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이 23m에 달하고, 높이는 6m에 이른다.
괘릉의 피장자(被葬者)에 대해서는 필자가 괘릉리(掛陵里)에 살 때까지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라는 설이 절대적이어서 상당기간 안내판에까지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신라(新羅)의 역대 군주 중 가장 큰 위업을 이룬 문무왕(文武王)의 능이 발견되지 않았고, 왕릉의 규모가 경주(慶州) 지역에 남아 있는 어느 왕릉보다 크고 넓은 데다 석조물들 또한 가장 웅대하여 3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문무왕릉(文武王陵)이 동해안에 있는 감포(甘浦)앞 바다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자 그 이후부터는 괘릉의 피장자를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서기 798년 12월에 당시의 신라의 국왕이 서거하자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곡사(鵠寺)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의 괘릉(원성왕릉)
그리고 당시의 곡사(鵠寺)는 현재의 말방리로 이건한 숭복사(崇福寺)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지금 괘릉 인근 말방리에 숭복사지(崇福寺址)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릉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성왕릉을 조성하기 전 괘릉 터에는 숭복사(崇福寺)가 있었는데, 그 절터가 워낙 명당이라 조정에서 사찰측과 협의하여 절터는 조정에서 매입하여 왕릉터로 삼고, 절은 지금의 말방리(末方里)로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괘릉의 피장자(被葬者)인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등극경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785년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죽자 당시의 왕위계승권자인 상재(上宰 : 수상)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있다.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선덕왕(宣德王) 사망이후 귀족회의에 의해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원성왕(元聖王)이 된 김경신(金敬信)의 무력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진골귀족으로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의 5세손으로 삼국사기에는 785년 선덕왕(宣德王)이 죽자 왕위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세력서열의 제일인자였던 그를 귀족회의에서 왕위계승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차재(次宰)인 상대등 김경신(金敬信), 즉 원성왕(元聖王)의 정변으로 즉위가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김주원(金周元)은 명주(溟州;강릉) 지방으로 물러나 스스로 도독(都督)이 되어 중앙과 대립하는 세력을 형성하였고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명주도독(溟州都督)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 의하여 세습되었고, 이들은 신라 말까지 지방 호족세력으로 남아 고려 초기에는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위에서 말한 선덕왕(宣德王)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아니고, 제37대 남자 왕을 말한다.
괘릉(掛陵)
여기에서 잠시 김경신의 모반(謀叛) 경위를 알아본다. 이찬(伊飡 ; 신라시대 17관등 중 두 번째 품계) 김주원(金周元)이 상재(上宰 : 수상)가 되어있을 때, 김경신(金敬信)은 각간(角干 ; 신라의 최고관등)으로서 왕위계승서열 두 번째인 차재(次宰)의 위치에 있었다.
김경신이 차재(次宰)의 위치에 있을 때의 어느 날 밤, 그는 복두(幞頭 ; 관모(冠帽)의 하나)를 벗고 소립(小笠 ; 작은 삿갓)을 쓰고 열 두 줄 가야금을 든 채 천관사(지금의 경주시 내남면 일남리에 있었던 절로서 옛날 천관녀(天官女)의 집이라 함)의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경신(金敬信)은 사람을 시켜 해몽(解夢)점을 쳐보게 했는데, 점술가가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목에 칼이 씌워질 징조(徵兆)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징조라는 설명을 듣고, 근심에 빠져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그 후 아찬(阿飡 ; 신라 때, 십칠 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의 벼슬) ‘여삼’이 찾아왔을 때 김경신(金敬信)은 다시 꿈 얘기를 하고, 해몽(解夢)을 부탁했다.
김경신(金敬信)의 얘기를 듣고 난 ‘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경신에게 절을 하며 “이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대위(大位)에 올라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그 꿈을 풀어 드리리다.”하자 김경신은 시종(侍從)하고 있던 사람들을 물러가 있게 하고 ‘여삼’에게 해몽을 청했다.
이에 ‘여삼’은 “복두(幞頭)를 벗은 것은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게 됨을 말합니다. 소립(小笠)을 쓴 것은 면류관(冕旒冠)을 쓸 징조입니다. 열 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세손(기록에 의하면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라 함)의 대를 이어받을 징조입니다. 그리고 천관청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가게 될 예시입니다.”라고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김경신(金敬信)은 “내 위엔 주원(周元)이 있는데 어찌 상위(上位)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라고 묻자 ‘여삼’은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드려 두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했고, 김경신은 그대로 따라 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은 붕어(崩御)했고, 조정안의 사람들이 상재(上宰)의 자리에 있는 김주원(金周元)을 받들어 왕으로 세우려고 그를 왕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그의 집이 북천(北川)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홍수가 나서 북천의 냇물이 불어나 며칠 동안 궁궐로 건너올 수가 없었고,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때 ‘차재(次宰)’인 각간 김경신(金敬信)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먼저 대궐에 들어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을 규합하여 즉위식(卽位式)을 갖고 왕으로 등극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을 따르던 무리들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모두 새로 등극한 임금인 김경신(金敬信)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하례를 올렸다. 이렇게 등극(登極)한 임금이 신라 제28대 원성왕(元聖王)이다.
괘릉(掛陵)
이때 원성왕(元聖王)은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로 왕이 되는 과정에서 그랬고, 왕이 된 뒤에는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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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掛陵) 얘기로 돌아간다. 괘릉의 구조는 남쪽인 앞에서부터 8각의 화표석(일명 망주석) 1쌍이 동서에 벌려 서 있고, 북쪽으로 가면서 무사(武士) 모습의 무인상(武人像) 1쌍, 선비 모습의 문인상(文人像) 1쌍, 돌사자 2쌍이 차례로 지키고 있으며, 조금 높은 곳에 상석(床石)이 앞에 놓인 무덤이 있다.
능의 밑 둘레는 70m, 높이는 7.7m인데,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래쪽에 1m 높이로 돌을 둘렀는데, 그 돌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陽角)’하였다. 그 바깥에는 바닥에 돌을 깔고 가에는 난간석(欄干石)을 둘러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이들 난간석(欄干石)에는 석주(石柱) 3개에 걸었던 횡석주(橫石柱) 3개가 사라지고 없어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괘릉 뒤편마을인 ‘큰말’의 수봉정(秀峯亭)에 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1960년대 초까지도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지금은 무덤 앞에 있는 상석(床石)이 없었다. 누가 가져간 것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 지금은 제자리에 옮겨져 있다.
왕릉 입구 제일 앞 양쪽에 있는 화표석(華表石)도 카페지기가 상경(上京)한 1960년대 초까지 없었는데, 어디서 찾아왔는지 지금은 한 쌍이 제자리를 찾아 서 있다.
화표석(華表石)은 화표주(華表柱) 또는 망주석(望柱石)이라고도 하는데, 사자(死者)와 생자(生者)의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1950년대 초의 괘릉
(사진이 깨끗하지 못해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무덤 앞에 상석(床石)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문무인상 등이 복구되지 않아 매몰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카페지기가 괘릉리(掛陵里)에 살고 있을 때 괘릉, 즉 원성왕릉의 능원(陵園)은 기독교단체의 연례(年例) 연합예배(聯合禮拜)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1940년대부터 해마다 가을철이면 당시의 경주군(慶州郡) 외동면과 내동면(內東面) 지역의 교회들이 모두 이 능원에 모여 연합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널따란 능원(陵園)은 사시사철 동네 청소년들의 축구장(蹴球場)이 되기도 했었다. 틈만 나면 새끼줄로 만든 축구공을 맨발로 걷어차는 축구놀이를 하곤 했었다.
지금은 관리사무소를 두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만큼 유적지(遺蹟地)로서의 관리가 소홀했다고 볼 수 있다. 능원(陵園)의 관리는 1910년대가 가장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의 경우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주위의 소나무들이 도벌되어 능원의 배경도 전혀 볼품이 없다.
1917년대의 괘릉
당시로부터 1,100여년 전에 조성한 왕릉(王陵)이라면 아람들이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야 할 터인데, 십 여 년 정도밖에 안되는 메마른 소나무가 듬성듬성 보이는 것을 보면 원래 우거졌던 소나무는 모조리 베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의 경우 일제(日帝)의 묵인 없이는 소나무가지 하나도 자르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이토록 황폐해진 것은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기(精氣)가 깃든 왕릉을 의도적(意圖的)으로 훼손하기 위하여 천 여 년 이상 자란 소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냈기 때문이다.
문무인상(文武人像)도 흙 속에 반이나 묻혀 이리저리 비뚤어져 있고 이끼와 흙투성이가 되어 있다.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抹殺)하기 위하여 무슨 짓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능원 앞으로 흐르는 동천강(東川江) 상류의 하천이 범람(氾濫)하여 능원 입구가 매몰되었으나, 식민통치(植民統治)를 하고 있던 일제(日帝)가 의도적으로 복구를 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해방된 이후 얼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까지 문.무인상(文.武人像)들이 흙 속에 반쯤씩 묻혀있을 때는 이들 문무인상들이 필자들의 놀이터였고 장난감이 되기도 했었다.
틈만 나면 능원(陵園)에 가서 달리기 연습을 하기도 하고, 상석에 올라가 장난을 치다가 문인상(文人像)과 무인상의 어깨와 머리위에 기어오르기와 뛰어내리기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감산사
감산사(甘山寺)는 ‘하이골’ 아래쪽 괘릉재(동산령) 기슭에 있는 사찰인데, 원래의 절터에는 경상북도 문화제 제95호인 3층석탑(石塔)과 석등(石燈), 대석(臺石) 등이 남아 있었다.
감산사는 719년(신라 성덕왕18)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國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그동안 모두 소실(燒失)되고 절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중창(重創)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1915년에 발굴된 불상(佛像) 2구는 각각 국보(國寶) 제81호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과 국보 제82호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으로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페지기가 괘릉리에 살고 있을 때는 조그마한 초가집 불당(佛堂)에 영지초등학교 동창생이 살고 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집 앞 논 가운데 3층 석탑(石塔)이 잡초 속에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될 뿐 매일같이 ‘소맥이러’ 다니거나, 나무지게를 지고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 가본 일은 없었다.
지금의 감산사
감산사(甘山寺) 앞에는 ‘괘릉재’를 넘어 양북면 어일장(魚日場)과 감포항구로 가는 잿길과 나뭇길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지만,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졸업한 후 이 길을 따라 날마다 나무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해 나르며, 여름이면 동무들과 ‘소맥이기’를 다니던 추억의 잿길이었다.
감산사(甘山寺)의 유물과 관련해서는 일제(日帝)가 그들의 침략행위를 미화하려는 획책이 짙게 배어있기도 하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불상(佛像) 전시실에는 앞에서 말한 석조 불입상과 석조 보살입상 한 쌍이 진열되어 있다.
이 석조 불·보살입상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주 일대 고적(古蹟)을 조사하면서 당시 경주군(慶州郡)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현재의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의 감산사(甘山寺) 터에서 발견해 당시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 온 것이다. 옮겨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감산사 3층 석탑
1910년 7월에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사내정의(寺内正毅)’는 그 해 8월 29일 한일합병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초대 총독으로 눌러앉아 가혹한 무단통치로 조선(朝鮮) 8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는 1915년 조선총독부 시정(施政)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었다.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風水說)을 이용하여 건립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景福宮)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日本)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物産獎勵)로 조선민족의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조선문화(朝鮮文化)에 대한 깊은 배려가 깃들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정책의 확실한 증거가 제출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경주(慶州) 일대의 고적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일본인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당시의 외동면 신계리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앞에서 말한 두 불·보살입상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자, 총독부는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 개최를 위해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새로 지은 특설(特設) 미술관에 이들 불·보살입상을 전시하기로 하였다.
1915년 3월 경주(慶州)에서 이들 불상을 경성(京城 ; 서울)으로 옮겨와 특설미술관 전시실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 좌우에 세워 놓았다가 이 해 8월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景福宮)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했다.
공진회(共進會)가 끝난 12월에는 이 특설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보살상은 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국보 제81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일제(日帝)는 이로써 경복궁 탈취를 기정사실화했고, 다음 해인 1916년 7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光化門)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기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거기에 동원된 첫 희생물이 이 두 감산사 불·보살입상이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동산령(東山嶺) 기슭 논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이들 불상들이 경성(서울)까지 실려가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을 도와 준 것이다.
위에서 말한 ‘사내정의(寺内正毅 ; てらうち まさたけ)’는 일본말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라는 자로 일본 제국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후 1910년 5월부터 제3대 조선통감부 통감이 되었고, 한일합방 이후부터 1916년 10월 14일까지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을 지낸 자였다.
그리고 그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경복궁(景福宮) 건물 일부를 훼손하거나, 수축하여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였다.
출품(出品)된 품목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물품뿐만 아니라 일본(日本)의 생산품으로서 우리나라 국민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품목과 외국의 수입품(輸入品) 중에서 판로 확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품목들이 전시되었다.
영지 석불
영지(影池) 위쪽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97-1 번지에는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각한 ‘아사달’이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를 위해 만들었다는 석불상(石佛像)이 있다.
얼굴은 파손이 심해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허리, 양감 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 신라(新羅)의 석불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석불의 얼굴형체는 마멸(磨滅)된 것이 아니고, 원래 미완성(未完成)의 불상이라는 말도 있다. 이 석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지석불
이 석불과 관련하여 1968년 상연(上演)된 오페레타(operetta) ‘석가탑’에서는 ‘아사달(阿斯達)’로 분한 오페라 가수가 격렬한 톤으로 영지석불을 노래하여 ‘아사녀(阿斯女)’를 추모한 바 있다. 이 희가극(喜歌劇)에서 열창된 ‘너를 새기련다’를 소개한다.
너를 새기련다
신동엽
너를 조각 하련다
너를 새기련다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이 하늘 끝나는 날까지,
이 하늘 다하는 끝 끝까지
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
바위면 바위에 돌이면 돌 몸에
미소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
눈물짓고 살다 돌아간 네 모습
너를 새기련다.
나는 조각 하련다
너를 새기련다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정이 닳아서 마치가 되고
마치가 닳아서 손톱이 될지라도
심산유곡 바위마다 돌마다
네 모습 새기련다.
그 옛날 바람 속에서
미소 짓던 네 입모습
눈물 머금던 네 눈 모습
그 긴긴 밤 오뇌에 몸부림치던 네 허리
환희에 물결치던 네 모습
산과 들 다니면서
조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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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서의 ‘정(chisel 鼎)’은 공작물(工作物)을 깎는 공구(工具)의 하나로 쇠를 단압(鍛壓)하여 한쪽 끝은 날을 세우고 반대쪽은 평평하게 담금질하여 쓴다.
평평한 쪽을 망치로 때려 금속(金屬)이나 암석(巖石)을 쪼개는데, 망치로 치는 쪽은 ‘정머리’라 하고 날 쪽은 ‘부리’라 한다. 용도에 따라 ‘정’의 생김새와 종류는 다양하다.
돌을 깨뜨릴 때 쓰는 것은 청태목(靑笞木)으로 동여서 쓰는 ‘자루정’이 있고, 평면을 깎거나 얇은 재료를 절단하는 데는 ‘평정’이 쓰인다.
또 기계가공이 어려운 모서리 부분이나 구석 부분을 파내는 데 쓰는 ‘컬크정’이 있고, 그밖에 홈파기정(고깔정), 조각정, 못정, 쪼는 정, ‘보라’ 등이 있다. 그리고 가사에서의 ‘마치’는 ‘망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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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무영탑(無影塔) 전설의 원형과 시대적 전승, 그리고 그 전래과정(傳來過程)을 잠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무영탑의 최초 기록은 경주부사(慶州府使) ‘민주면(閔周冕 ; 1629년∼1670년)’이 1669년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의 영제조(影堤條)에서 ‘불국사 뒷산의 나무와 불국사의 단청이 다 비치므로 영제(影堤)라 했다’는 단순한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영지(影池)는 경주에서 30리, 불국사(佛國寺)에서는 10리 거리이며, 연못의 크기는 볍씨 23섬을 직파(直播)할 규모의 크기’라고 적고 있다.
이후 1752년(영조 28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조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日省錄)과 ‘청성잡기(靑城雜記)’의 ‘동도칠괴(東都七怪)’, 그리고 김영기․권오찬․김정균이 기록한 ‘경주 삼기팔괴(慶州 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불국영지(佛國影池)’에서도 무영탑(無影塔) 전설을 비치고 있으나, 내용이 너무 간단해 전설의 전체적인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무영탑(석가탑)
위에서 말한 ‘민주면(閔周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48년(인조 26)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1653년(효종 4)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민주면(閔周冕)은 1660년(현종 1) 인천부사(仁川府使 : 종3품)로 임명된 후 1665년 4월 길주목사(吉州牧使 : 정3품)를 거쳐, 같은 해 5월 광주부윤(廣州府尹: 종2품)으로 부임하면서 지방관으로서 관직 경력을 보태어 갔다.
1667∼1668년(현종 8∼9)에 서울로 잠시 돌아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 승지(承旨 : 정3품)를 역임했고, 1669년(현종 10) 다시 경주부윤(慶州府尹 : 종2품)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동경잡기(東京雜記)’를 편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저서 ‘동경잡기(東京雜記)는 ‘민주면’이 경주 지역을 대상으로 쓴 지리서로 각동(各同)·각방(各坊) 등을 통해 17세기 중반 경주지역의 통치구조와 수취구조는 물론 향촌사회의 운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인물 관련 항목에 소개된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서는 과거 경주지역의 인물사뿐 아니라 ‘동경잡기’ 편찬 당시 사족(士族)들의 동향과 경주 부민(府民)의 동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고적(古蹟)·불우(佛宇)·궁실(宮室)·학교(學校)·능묘(陵墓) 등에는 17세기 중반까지 경주지역에 있던 문화유적의 현황과 위치가 생생하게 남아 있고, 지금은 없어진 여러 유물·유적에 대한 당대의 정보가 담겨 있어 향후 경주의 시간적 공간적(空間的) 역사 자취를 온전하게 복원하는데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본다.
다른 읍지(邑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인 항목, 진한기(辰韓記)와 신라기(新羅記)에서 진한과 신라의 역사를 왕대별로 간단히 정리했다는 점, 경제나 정치·군사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인물 관련 항목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분류는 물론 서술내용의 비중이 다른 읍지보다 훨씬 높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소개한 청성잡기(靑城雜記)는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 ; 정조 당시의 문신)의 잡록집(雜錄集)으로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 영조의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을 통해 청직(淸職)에 임명되었고, 박재가(朴齋家), 박지원(朴趾源),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우한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문집(文集)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1편의 중국 고사를 소개한 뒤 자신의 평론을 붙인 췌언(揣言),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14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질언(質言), 400여 편의 고금의 야담을 모아 놓은 성언(醒言)이 그것이다. 조선후기 소품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자료에 속한다.
그리고 ‘삼기팔괴(三奇八怪)’는 경주의 예로부터 세 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 가지 괴상한 풍경을 말하는데, 3기(三奇)는 금척(金尺), 옥적(玉笛), 화주(火珠)를 말한다.
다보탑
8괴(八怪)는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倒沙), 계림황엽(鷄林黃葉), 압지부평(鴨池浮萍), 백률송순(栢栗松筍), 금장낙안(金丈落雁), 불국영지(佛國影池), 나원백탑(羅原白塔), 서산모연(西山慕煙), 금오만하(金鰲晩霞)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동도칠괴(東都七怪)’는 1801년경 ‘성대중’에 의해 채록(採錄)되었고, ‘삼기팔괴(三奇八怪)’는 현대에 와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동도칠괴’는 첫째, 동도의 옥피리는 문경새재를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둘째, 안압지의 부평초는 연못의 수위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항상 가라앉지 않고 셋째, 백률사 송순은 가지를 잘라도 움이 트고 넷째, 매월당의 북향화는 해를 등지고 피며 다섯째, 기림사의 감천(甘泉)(내용 탈락) 여섯째, 기림사 오색 작약은 역시 옮겨 심으면 제 빛깔이 나지 않으며 일곱째, 불국사의 무영탑은 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고 하며 이것을 동도(東都)의 일곱 가지 괴이한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영지(影池)
본론으로 돌아간다. 무영탑(無影塔)에 관한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전설을 실은 책은 ‘활암 동은(活庵 東隱)’이 1740년(영조 16)에 편찬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이다. 이 책은 시대 순으로 보아 무영탑(無影塔) 전설 가운데 초기의 것이면서 가장 대표성을 가진 원형적(元型的)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석가탑(釋迦塔)을 세운 석공은 이름 없는 당(唐)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 서라벌로 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였으며, 석가탑의 그림자가 영지(影池)에 비치지 않아 그 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또 불국사 무영탑(無影塔)을 노래한 시승(詩僧)에는 초의 의순(草衣 意恂)(1786~1866)이 ‘불국사회고(佛國寺回顧)’라는 9수의 연작시(連作詩)를 남겼는데, 여기서는 다보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광수(李光洙)의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 ; 1917년 전국 5도를 다니면서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기행문)에서는 신라조 당시 불국사의 창건 책임자 김대성(金大城)을 짝사랑하던 ‘아사녀’가 영지(影池)에 투신하는 슬픈 스토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런 모티프(motif ; 회화 ·조각 ·문학 등에서 표현·창작의 동기가 되는 작가의 내부충동)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출간된 ‘오사카 긴타로’의 ‘영지(影池 ; 1921년)’에서 석공(石工)은 이름 없는 당인(唐人)이었지만, ‘아사녀(阿斯女)’는 아사달의 누이에서 부인으로 바뀌게 된다.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阿斯女)’는 석가탑 그림자가 영지(影池)에 계속 비치지 않자 투신하고, 부인을 애타게 찾던 석공(石工)은 바위에 부인의 모습을 조각하고 끝내 자신도 영지(影池)에 투신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1929년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한 ‘고도순례 경주’ 중에서는 현진건(玄鎭健)의 ‘무영탑(無影塔) 전설’로 이어진다. 이 기록은 ‘고금창기(古今創記)’에서의 무영탑 전설과는 아주 다른 소설적 요소를 지닌다.
이 소설에서 석공과 부인은 부여(夫餘) 사람으로 묘사되고, 석공(石工)의 이름은 ‘아사달(阿斯達)’로 정하면서, 서사구조를 복잡한 장편소설(長篇小說)로 각색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설 속 석공의 이야기를 사랑과 예술에 얽힌 아름답고 슬픈 비극적(悲劇的) 로맨스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무영탑(無影塔) 전설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하여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한 작품으로 무영탑 이야기의 전국화․세계화․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기여는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우리 민족의 영원한 전설로 승화시키고 있다.
현진건(玄鎭健) 이후 ‘아사녀(阿斯女)’와 ‘아사달’에 집중한 사람은 시인 신동엽(申東曄)이다. 그는 1960년, 혁명시 ‘아사녀’를 학생혁명시집에 발표했는데, 그에게 있어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적(自主的)인 삶을 살아가는 민중을 상징하고 있다.
신동엽은 이 시(詩)에서 불국사를 창건한 부여출신 석공의 이름을 옛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을 의인화하여 배달겨레의 상징(象徵)으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서 잠시 고조선(古朝鮮)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을 잠시 살펴본다. 고조선의 수도는 ‘아사달(阿斯達)’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의 수도는 ‘아사달(阿斯達)’ 이외에도 평양성, 왕검성, 검독, 험독 등 여러 곳이 등장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조선의 도읍지(都邑地)는 총 네 번 옮겨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으니 고(高)와 같은 때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도읍지가 네 번 옮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단군이 처음 평양성(平壤城)에 조선을 세웠고,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으며, 기자조선을 피해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신선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신라조(新羅朝) 경덕왕 시대에 이르러 백제출신 석공의 이름으로 변신시켜 빛나고 영광스러운 그 시절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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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석불(影池石佛)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설화가 있다. 옛 신라시대에 오누이 석공(石工)이 있었는데, 둘 다 명공(名工)이었다. 오누이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불국사(佛國寺)와 영지(影池)를 만들기로 하고, 오빠는 불국사를 짓고 누이동생은 영지(影池) 못을 만들기로 했다.
이에 누이는 재빨리 영지(影池) 못을 만들어 놓고, 불국사에서 어려운 공사를 맡아 애쓰는 오빠에게 국수를 만들어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누이는 오빠에게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안반’을 등에 지고 나섰다. 그때 문득 화려하고 장엄한 불국사(佛國寺)의 전경이 영지(影池) 못에 비쳤다.
누이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재주가 훌륭한 오빠이지만, 하늘 위에 있는 부처님 세계를 땅 위에 옮겨 짓는 그 위대(偉大)한 일을 그렇게 빨리 마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누이는 ‘안반’을 등에 진 채 못 안을 들여다보면서 발길을 옮길 줄 몰랐다. 오빠가 만든 불국사(影池)가 너무나 기기묘묘(奇奇妙妙)하였기 때문이다.
누이는 지금도 ‘안반’을 지고 앉아 못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것이 지금의 영지석불(影池石佛)이라는 것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차피 설화에 불과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지금도 ‘안반’을 지고 앉아 있는 아사녀
위에서 말한 ‘안반’이란 우리 고향 사투리로 ‘암반’ 또는 ‘떡암반’을 말하는 것으로 떡을 치거나 국수를 밀 때 받치는 ‘반(盤)’, 즉 ‘떡판’을 말한다.
“재수 존 늠은 엎어져도 ‘떡암반’에 엎어지는데, 재수가 업시머 디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능기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재수 좋은 놈은 엎어져도 ‘떡판’에 엎어지는데, 재수가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영지국민학교에 다닐 때 영지석불(影池石佛) 옆 암자 추녀 밑에 매달아 건조시키던 ‘곶감’을 동급생(同級生)들끼리 ‘목말’을 하고 훔쳐 먹던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두고두고 훔쳐 먹기 위해 ‘곳감’을 매단 꼬챙이마다 하나씩만 떼어내고, 떼어낸 빈자리를 숨기기 위해 전부를 가지런하게 재정렬(再整列)하여 속임수를 쓰느라 낮잠에서 깬 주인에게 현행범(現行犯)으로 잡힐뻔 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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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국사(佛國寺) 인근 진현동에는 석가탑에 담긴 ‘아사달’의 천년 예술혼을 기리고 영지(影池)에 머문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기념하는 ‘아사달·아사녀 사랑탑’이 완공되어 지난 2006년 7월 30일 현지에서 제막식(除幕式)을 가졌다.
아사달·아사녀 사랑탑 건립추진위원회가 5년간의 대역사 끝에 모두 2억8천만원의 예산으로 준공을 보아 제막식(除幕式)을 갖게 된 아사달·아사녀 사랑탑은 전북 익산(益山)에서 옮겨 온 화강암(花崗巖)을 재료로 김영찬 석공명장(石工名匠)이 정성을 부어 부조(浮彫)로 제작했다.
좌대(座臺) 높이 1.6m에 몸체 높이 2.7m로 모두 4.3m 규모인 이 사랑탑은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 서편 기슭 ‘동리·목월기념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리·목월기념관’은 불국사(佛國寺)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토함산 길 500m쯤 되는 비탈길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현대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경주(慶州) 출신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6~1978)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공간이다.
아사달, 아사녀 사랑탑
(저 멀리 영지저수지가 마주 보인다)
수봉정(秀峯亭)
수봉정(秀峯亭)은 당시 만석재산의 부호로서 구휼(救恤)과 의료사업, 교육사업에 이바지한 수봉(秀峯) 이규인(李圭寅, 1859~1936)의 고택(古宅)으로 1924년에 건립되었다.
초기에는 2층이었으나 1965년 단층(單層)으로 개축되었으며,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기거처(寄居處)는 접객공간으로 활용되던 건물로서 3칸 홑집이다.
그리고 열락당(悅樂堂)은 1927년 수봉의 아들인 이영우(李英宇)와 이종헌(李鍾憲, 1824~1947)이 건립하였으며 현재 사랑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정자건물에 가까운 평면과 양식을 지니고 있다.
1950년대의 수봉정
(이 당시에는 을씨년스러운 빈집으로 카페지기들이 아래
윗층을 오르내리며, 뿌꿈놀이(숨바꼭질)를 하곤 했었다)
수봉정(秀峯亭)의 배치는 정자를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우측에 이규인의 기거처(寄居處)였던 건물과 열락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주거공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배면에는 근래에 건립한 묘우(廟宇)가 첨가되어 대가족(大家族) 살림집의 유형을 지니고 있다.
수봉정(秀峯亭)은 정면 5칸, 측면 2.5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놓여 있는데, 좌측온돌방이 우측보다 배 정도 크다. 정면 5칸 모두 튓마루를 두고, 우측방 배면에는 벽장을 설치했다.
화강암 장대석(長大石) 기단 위에 장평과 막돌 초석(礎石)을 혼용하여 놓고 원주(圓柱)를 세우고 기둥 상부에는 주두를 놓았다. 주간은 소로로 수장한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건립연대는 일천하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건립된 전통 한옥의 일면을 살필 수 있으며, 특히 만석꾼인 이규인이 벼 4,000여석을 투자하여 일제강점기에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를 창설하여 교육사업에 이바지했다는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모태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수봉정(秀峯亭)’은 최근에 와서 건물을 개축하거나 새로 짓고, 건물명칭을 새로이 부여하거나 갖가지 현판(懸板)을 걸어 붙여 마치 무슨 서원(書院)을 방불케 하고 있으나, 카페지기가 태어나서 20여 년 동안 성장할 때는 ‘수봉정’이란 말 자체도 없이 그냥 ‘이좌수네 집’이라고 했었다.
건물의 이름들은 언제 지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그런 이름 자체가 없었고, 만석꾼과 그 가족들이 ‘마름’이나 관리인, 일가붙이들에게 부속(附屬)된 주택을 나누어주고 경주읍내(慶州邑內)로 떠나버려 한낱 대가집 가정집에 불과했었다.
지금의 수봉정
(차선이 그려진 도로가 '신계-입실길'이다)
때문에 ‘수봉정(秀峯亭)’이 개수되기 전 2층으로 있을 때는 카페지기 등 동네 꼬마들의 숨바꼭질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집주인이 해방 이후의 좌파세력과 6.25당시의 빨치산들의 위협을 피해 안전한 경주시내로 이주하여 빈집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열락당(悅樂堂)이라는 건물은 동리 노인들의 휴게소 겸 공회당(公會堂)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년 수봉선생의 향례(享禮)를 집전하고 있는 괘동서사(掛洞書舍)와 묘우(廟宇)도 수봉선생 생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1998년 4월 30일 후손들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이렇던 수봉정(秀峯亭)은 1995년 1월 14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었고, 2차에 걸쳐 국비와 도비(道費) 및 시비(市費)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제 괘릉리의 자연부락과 중요 지형지물(地形地物)을 소개한다.
독 골
‘독골’은 사면이 산으로 가려있고 오목한 골짜기에 마을이 들어 있어 ‘독(항아리)’ 같은 형태라 하여 ‘독골’이라 칭한다. 위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인 불국사역(佛國寺驛)에서 1.5km 지점 선로 바로 서편 산 아래 쪽에 접하여 있고, 1984년 8월 18일 현재 6가구에 34명이 농사에 의존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차용하여 독립된 골짜기라는 의미의 ‘독곡(獨谷)’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는 후대인들이 편의상 붙인 잘못된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한자의 뜻도 ‘항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독골’에는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 이 용(李 勇)군이 살고 있었는데, 오래 전에 타계하고 역시 같은 동기생인 그의 아내 김억순양(동기회 부회장)이 지금껏 거주하고 있다.
이 용(李 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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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갓등, 밤갓
‘밤갓등’과 ‘밤갓’은 옛날에 밤나무가 울창(鬱蒼)하여 기다란 능선(稜線)이 밤나무 산이 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밤갓등’이라 불렀다. ‘밤갓’은 ‘밤갓등’의 윗마을이다. 현지에서는 ‘방깟띠’와 ‘방깟’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율곡(栗谷)’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또한 후대인(後代人)들이 편의상 붙인 한자(漢字)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밤갓등’과 ‘밤갓’은 골짜기(谷)가 아니고 산등성이다. 그리고 이 마을은 ‘밤갓’, ‘한이골(하이골)’, ‘감산사’, ‘영못안’과 함께 1914년 이전까지는 신계리(薪溪里)지역이었다.
이 마을에 밤나무가 많이 자생(自生)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이 마을의 북쪽 사면(斜面)에 위치한 신계리(薪溪里)의 ‘하섶’마을 앞 쪽에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는데, 이를 ‘율촌지(栗村池)’라고 부른 데서도 나타나 있다.
‘방깟띠’는 일제(日帝) 때 일본인이 야산을 개간하여 과수와 감자를 재배하는 밭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6.25동란이 발발하여 북한 공산군(共産軍)이 경주시 안강읍(安康邑)까지 진출하자 한동안 미공군(美空軍)의 야전비행장으로 활용되다가 UN군의 북진(北進)과 함께 폐쇄되었다.
당시의 야전비행장
일본인이 개간한 밭이 평평하고 기다란 능선(稜線)을 이루고 있어 당시의 F-51 ‘무스탕’전투기나 L-19정찰기의 이착륙장(離着陸場)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야전비행장 부지로 책정된 것이다.
이 야전비행장(野戰飛行場)이 개설되면서 카페지기의 모교 영지국민학교(影池國民學校)는 거의 6개월에 가까운 긴 겨울방학을 갖기도 했었다.
학교의 모든 교실이 이 야전비행장의 조종사(操縱士)와 경비병력(警備兵力)의 숙소 또는 작전상황실(作戰狀況室)로 징발되어 등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밤갓등’ 도로(신계리 진입로)
(지금은 모두 전답으로 변했고, 당시의 활주로는 외동읍 신계리의
진입로가 되어 있다. 그 넓던 활주로가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로
변해 있다. 멀리 '시동'과 '북토리'를 통과하는 금오산맥이 보인다)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미군(美軍)들이 들이닥쳐 집체만한 ‘따블빽’을 교실 안으로 사정없이 집어 던지는 통에 책보와 책걸상을 되는 대로 끼고, 들고 바깥으로 뛰어 나오느라 기겁을 했던 일이 지금도 뇌리에 스친다.
그리고 이들 미군(美軍)들이 철수한 뒤에는 졸업할 때까지 전교생(全校生)이 마룻바닥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미군(美軍)이 점령할 때 학생들이 집으로 메고, 이고, 지고 간 책상과 의자가 거의 돌아오지 않았고, 전쟁중이라 책상과 걸상을 보충할 교육재정(敎育財政)이 뒷받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휴전(休戰)이 된 후 ‘방깟디’ 비행장 활주로(滑走路)는 당시의 영지초등학교에 등하교하는 신계리(薪溪里) 학생들의 통학로와 신계리 마을에 진입하는 차도(車道)가 되었다.
‘방깟디’에는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김씨(慶州金氏) 13여 가구가 살며 양계, 양돈 등 축산에 노력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카페지의 동기생 김매화(金梅花)양이 거주하고 있었다.
김매화(金梅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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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갓’에는 영지초등학교와 외동중학교 한 해 선배(6회)이자 군대 동기생인 이하우(李夏雨)군이 거주하고 있다. 1964년까지 같은 부대에 근무하다가 그의 의병제대(依病除隊)와 함께 헤어진 후 40여년이 지난 2009년도에 고향에서 다시 만난 일이 있다.
지금의 밤갓
볕골(뺏골)
‘볕골(뺏골)’은 ‘큰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하여 볕이 잘 든다 하여 ‘볕골’이라 한다. 원성왕릉(元聖王陵)에서 약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 20여 가구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양곡(暘谷)’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역시 후대인들이 편의상(便宜上) 붙인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마을의 집 둘레에는 대나무들이 무성(茂盛)하고, 동네 앞에는 ‘하이골’ 골짜기에서 맑은 물이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개울로 흘러간다. 이 개울이 울산만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 ; 일명 禹朴川)의 발원지(發源地)가 된다.
‘볕골(뺏골)’의 뒤편 신계(薪溪)-입실(入室)길 변에는 몇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데, 이를 옛적에는 ‘앞디(앞등)’라고 했고, 지금은 표준어로 ‘앞등길’이라고 한다.
괘릉리(掛陵里)에는 ‘등’ 즉, ‘디’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마을이 세 곳이 있는데, ‘싸리밭등(사리밭디)’, ‘밤갓등(방갓디)’, ‘앞등(앞디)’이 이에 해당한다. ‘등(디)’는 모두 ‘등’ 즉, ‘산등성이’를 말한다.
카페지기가 향리에 거주할 당시 ‘앞등길’은 괘릉리(掛陵里) 웃말과 신계리, 당시의 내동면(內東面) 진현리에 살던 외동중학교 학생들의 통학로이기도 했고, 해마다 4월 초팔일이면 불국사(佛國寺)를 참배하거나 구경 가는 활성리 이남 외동읍 남부지역 주민들이 떼를 지어 오가기도 했었다.
괘릉초등학교
‘볕골’을 현지에서는 주로 ‘뺏꼴’이라고 하는데, 마을 입구 괘릉리 598번지에는 지난1963년 3월 2일 출범한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가 위치하고 있다.
괘릉초등학교는 지난 1959년 12월 20일 3개의 가교실(假敎室)을 신축하여 당시 괘릉리(掛陵里), 활성리(活城里), 신계리(薪溪里) 등 3개 마을에 거주하던 영지국민학교(影池國民學校) 3학년 이하의 학생들을 위한 괘릉분교장(掛陵分敎場)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괘릉리, 활성리, 신계리 3개 마을에는 605호의 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지역 내에 학교가 없었던 터에 교육인구가 계속 증가하는데다, 영지국민학교(影池國民學校)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고 통학로에 놓인 위험요인 또한 너무 많아 관내 주민들은 독자적인 학교설립을 지속적으로 염원하고 있었다.
경주(慶州) 울산(蔚山) 간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철길과 7번국도의 도로횡단, 영지저수지에서의 하절기 익사(溺死) 사고 등 여러가지 위험요소로 인한 불안감을 없애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청원(請願)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당국에서 마침내 이를 수용함으로써 영지국민학교의 분교장(分敎場) 설립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분교장(分敎場) 승인을 얻어 낸 주민들은 독지가의 희사로 부지를 확보하고 교실을 신축하여 관내 거주 영지국민학교 저학년생(低學年生)들을 유치하는 분교장을 설치했고, 이후 신규교실을 증축하여 1962년 7월 28일에는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로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월 2일 9개 학급 464명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학교로서의 개교를 하게 되었다.
괘릉초등학교 구교사
(학교 앞을 흐르는 ‘우박천’ 제방에서 찍은 모습이다. 뒷쪽 교사 뒤편으로
괘릉리 ‘큰말’에 있는 ‘수봉정’과 신계리로 연결되는 신계-입실길이 있고,
그 도로 옆 산비탈에 천수답인 카페지기의 논이 있었다. 학교주위에 당시
로서는 유행이던 키큰 버드나무를 울타리처럼 심어 을씨년스럽기도하다)
괘릉분교(掛陵分校)는 당시 경주읍(慶州邑)내에 있던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의 목재(木材) 구교사(舊校舍)를 뜯어 옮겨지은 학교로서 1963년 3월 2일 괘릉국민학교(掛陵國民學校)로 독립하기 전까지는 7번국도 동편의 영지초등학교의 재학생들이 모두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40대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카페지기의 셋째 동생(이강우)과 경남 거제시와 경기도 부천시에 거주하는 넷째(이영우), 다섯째 동생(이상우)도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괘릉분교(掛陵分校)를 지을 때는 괘릉리, 신계리, 활성리에 거주하는 영지초등학교 8회 이전 졸업생들이 총동원(總動員)되다시피 하여 부지조성 작업과 건축(建築)에 참여했다.
동생들과 누이들에게 내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야 하는 영지초등학교 등하교(登下校) 길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팔다리를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이다.
카페지기도 이른바 부역(賦役)에 동원되어 학교건립에 참여한바 있다. 트럭을 타고 당시 경주읍내(慶州邑內)에 있었던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에 가서 철거해 놓은 구(舊)교사 기둥과 서까래들을 실어다 나르고, 운동장을 닦고, 건물을 짓느라 힘에 겨운 중노동을 했었다.
논을 매워 터를 만들고, 지금의 콘크리트 건물이 있기 전 목조교실(木造敎室) 3개를 겨우 지어 개교(開校)하던 엉성했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리고 학교 뒤 허름한 오두막집 한 채를 매입하여 교사(敎師)들이 자취하는 사택(舍宅)으로 활용하면서 밤마다 동네 청년들과 교사들이 어울려 ‘삼백’을 치던 시절 또한 아스라이 떠오른다.
여기에서의 ‘삼백’이란 화투놀이의 하나로 ‘육백’이라는 것과 비슷한 게임인데, 그 당시 괘릉분교(掛陵分校)에 새로 부임한 젊은 교사들이 도입한 화투놀이였다.
괘릉초등학교 신축자재로 사용했던 경주중학교 구 건물
(1938년 일제의 ‘경주공립 심상고등소학교’로 개교했던 건물이다)
1950년대 말, 영지초등학교 괘릉분교(掛陵分校) 교정(校庭)은 부락민의 ‘인민재판장(人民裁判場)’ 같은 기능을 하기도 했었다.
동리에서 상습적(常習的)으로 노름판을 벌여 뒷돈을 대주고, 고리(高利)의 이자를 뜯어내면서 순박(淳朴)한 동민들의 가산(家産)을 탕진케 하던 노름판 ‘물주(物主)’를 ‘약식재판(略式裁判)’ 같은 절차를 거친 후 뭇매를 가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학교 운동장(運動場)에 ‘피고인’을 꿀리고, 연단(演壇)에 올라 선 부락대표자가 기다란 죄목(罪目)을 나열한 후 온 동네 장정(壯丁)들이 돌아가면서 ‘지게 작대기’로 개 패듯이 곤장(棍杖)을 치고 나서 그길로 마을에서 추방(追放)하는 가혹한 형벌(刑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때의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는 이런 역할(役割)까지 담당했었다. 그때만 해도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괘릉초등학교(掛陵初等學校)는 지난 1964년 42명의 제1회 졸업생을 시작으로 총 2천9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한때 500명에 이르던 학생수가 1990년대 이후 이농현상(離農現象)으로 인한 급격한 감소로 2013학년도에는 전교생이 23명으로 줄어들었다.
지금의 괘릉초등학교
괘릉초등학교 학급편제(2013년 현재)
학년 |
1 |
2 |
3 |
4 |
5 |
6 |
계 |
유치원 |
학급수 |
1 |
- |
- |
1 |
- |
1 |
3 |
1 |
학
생
수 |
남 |
4 |
- |
2 |
2 |
2 |
5 |
15 |
4 |
여 |
2 |
- |
- |
3 |
1 |
2 |
8 |
6 |
계 |
6 |
- |
2 |
5 |
3 |
7 |
23 |
10 |
괘릉초등학교 교직원현황(2013년 현재)
구
분 |
교
장 |
부
장
교
사 |
교
사 |
유치원
교
사 |
돌
봄
교
사 |
일
반
직 |
주
무
관 |
조
리
원 |
교무행
정
사 |
계 |
남 |
1 |
1 |
1 |
- |
- |
1 |
1 |
- |
- |
5 |
여 |
- |
- |
3 |
1 |
1 |
- |
- |
1 |
1 |
7 |
계 |
1 |
1 |
4 |
1 |
1 |
1 |
1 |
1 |
1 |
12 |
싸리밭등(사리밭디)
‘싸리밭등’은 옛날에 싸리나무가 울창하여 ‘한밭(큰밭)’을 이루었다 하여 ‘싸리밭등’이라 하며, 여기에서 자란 굵은 싸리나무를 불국사(佛國寺) 창건 시 기둥감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1984년 8월 18일 현재 5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사리밭디’라고 한다. 별칭으로 ‘축전(竺田)’이라고도 하나, 실제로는 쓰이지 않던 이름이다. 지금도 길가 울타리에 대나무숲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고 있다. 현지인들이 ‘싸리밭등’을 ‘사리밭디’라고 부르는 것은 경상도 사람들은 ‘ㅆ’ 발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싸리밭등
이 마을의 주요 출향인사들은 모두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출신으로 수도권에서 장로교단 목회자(牧會者)로 시무하고 있는 김영문 목사, 김영택 목사, 김영융 목사(경기도 의왕시 부곡동 본향교회)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 동기생 이필란(李必蘭 ; 아명 이상자)양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목사(牧師)의 부인이 되어 지금은 인천광역시 유동 대명교회(032-762-5739, 011-9022- 0631)에 거주하고 있다.
이필란(李必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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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 말
‘샛말’은 카페지기의 고향마을로 ‘큰말’ 즉 ‘대리(大里)’와 ‘밤갓등’, ‘대리’와 ‘웽고개’ 사이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샛말’이라 불리며,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설씨(慶州薛氏) 등 38가구에 18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중리(中里)’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명칭도 후대인들이 임의로 붙인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샛말’은 괘릉(원성왕릉) 바로 뒷마을로 카페지기가 거주할 당시에는 농업뿐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농업 외에 젖소, 양계(養鷄), 양돈(養豚)에 힘써 많은 소득을 올려 여유 있는 농촌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나, 괘릉리 884번지의 아담한 기와집이 카페지기의 생가(生家)가 된다. 생가 사립문 앞 문전옥답(門前沃畓)도 필자네의 것이었다.
카페지기의 생가
(담장 벽의 푸른 넝쿨은 장미넝쿨이다)
카페지기는 경주이씨 판윤공파 입향조(入鄕祖)인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 : 한성판윤, 즉 현재의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다가 세조의 단종폐위와 김종서 등 충신을 살해하는 폭정에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주로 낙향하였음)이후 계속 거주해 온 이 마을 토박이로 1962년까지 거주하였다.
‘샛말’에는 카페지기 형제를 비롯하여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생 7명이 거주했던 마을이다. 설경환(薛慶煥)군, 권상철(權相喆)군, 이상운(李相云)군, 이정희(李正喜)군, 카페지기의 동생 이성우(李聲雨)군, 당시의 외동면장의 차녀였던 설두생(薛斗生)양 등이 모두 ‘샛말’ 출신들이다.
모두들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하고 있지만, 설경환군은 지금도 대규모 축산업(畜産業)을 경영하면서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상운(李相云)군은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공단(蔚山工團)에 취업했으나, 당시에 흔히 발생하던 연탄가스 중독으로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설경환(薛慶煥) |
이상운(李相云) |
이정희(李正喜) |
권상철(權相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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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李聲雨) |
설두생(薛斗生) |
이용우(李容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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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말 풍경
(괘릉리 황사등(黃砂嶝 : 황시디)’ ‘기자(祈子)바위’에서 본 풍경이다)
영못안
‘영못안’은 신라시대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의 석공 아사달의 아내인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그림자라도 보려하던 못 영지(影池)저수지의 안쪽에 있다하여 ‘영못안’이라고 불리어졌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영지리(影池里)’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역시 후대인들이 편의상 붙인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영지석불이 있는 지역도 옛적에는 ‘영못안’으로 분류하였다.
‘영못안’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전 서(徐)씨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1984년 8월 18일 현재 33가구에 145명이 살고 있었다.
괘릉리 영못안 마을
이 마을은 괘릉리(掛陵里)의 한 자연부락으로 영지(影池)와 영지석불(影池石佛)이 소재하고 있다. 영지(影池)와 영지석불은 따로 소개한다.
‘영못안’에는 카페지기의 동기생 중 서순복(徐順福)군, 설선주(薛先珠)양, 김억순(金億順)양, 이숙자(李淑子)양, 김정자(金正子)양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김억순양은 같은 동기생인 고 이용(李勇)군과 결혼하여 지금도 괘릉리 ‘독골’에 거주하고 있고, 서순복(徐順福)군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서순복(徐順福) |
설선주(薛先珠) |
김억순(金億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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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李淑子) |
김정자(金正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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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고개
‘웽고개’는 신라(新羅)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노승(老僧)이 불국사(佛國寺)를 향해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을사람들에게 “웬 고개냐”고 물은 것이 ‘웬고개’라는 지명이 되었고, 여기에서 변형되어 왼곡, 어인고개, 영곡, 원고개, 웽고개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었다. 현지에서는 주로 ‘웽고개’라고 한다.
‘웽고개’는 7번국도변 괘릉리 입구에서 100여m 진입하여 ‘자미산’ 산모롱이를 넘어 부락 안으로 들어오는 산 고개를 말하는데, ‘부락’으로서의 ‘웽고개’는 7번국도 괘릉리 입구에서 자미산 능선 북쪽 지역의 마을과 전답지역, 그리고 지금의 ‘이스트힐 리조트(전 토비스콘도)’ 일원을 말한다.
고개 길 웽고개
‘웽고개’에는 7번 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관통하고 있다. 동해남부선은 당시의 부산진역(釜山鎭驛)에서 동해남부 해안을 따라 포항역(浦項驛)까지 이어지는 길이 145.8km의 철도다.
이름 그대로 동해남부(東海南部) 지역, 즉 부산진역에서 출발하여 해운대(海運臺), 기장, 좌천, 울산(蔚山), 경주(慶州), 안강(安康)을 거쳐 포항까지 이어지는 철로이다.
동해남부선은 일제(日帝)가 울산을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 개발하기 위해 1921년 10월 25일 협궤선(挾軌線)으로 개통한 조선철도주식회사(朝鮮鐵道株式會社) 소유 사설철도였던 울산~경주간 41km의 경동선(慶東線)을 매입하여 1930년 10월 1일 지금의 광궤선(廣軌線)으로 교체하여 확장함으로써 태어났다.
카페지기의 향리 괘릉리(掛陵里)는 마을 가운데를 동해남부선이 관통(貫通)하고 있으나, 열차(列車)가 정거하는 정거장은 없다. 그래서 향리에 살 때는 매일같이 기차(汽車)와 기찻길은 접했지만 기차를 타 본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구간 중에는 ‘웽고개’가 가장 가파른 고개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본제 ‘미카’ 증기기관차가 20여량의 곱배(유게 또는 무게화차)를 달고, 죽동리(竹洞里)에서부터 불국사역(佛國寺驛)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당시에는 기관차(機關車)의 수가 적어 기관차마다 20여량의 화물열차(貨物列車)를 끌고 다녔는데, 군수물자(軍需物資)등을 과도하게 적재한 열차의 경우 ‘웽고개’에 이르면 거의 바퀴가 돌지 않다시피 하는 서행(徐行)이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니던 학생으로 괘릉리(掛陵里), 신계리(薪溪里), 불국사 앞 진현동 등지에 살던 학우들과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 등 읍내로 통학하던 괘릉리 거주 통학생들은 수시로 ‘도둑차’를 타곤 했었다.
외동중학생들은 하교(下校)할 때 입실역(入室驛)에서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서 열차(주로 유개화차로 ‘곱배’라고 했다)를 타고, ‘웽고개’에 이르러 열차가 서행(徐行)하면 뛰어 내리고, 경주읍(慶州邑)내 통학생들은 아침마다 등교할 때 잽싸게 뛰어 올라타곤 했었다.
외중생(外中生)의 경우 뛰어내리는 시기를 놓쳐 낭떠러지나 마찬가지인 언덕에 굴러 다치기도 했고, 무서워서 뛰어 내리지 못하고 불국사역(佛國寺驛)까지 그냥 실려 갔다가 역무원(驛務員)에게 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주머니에 동전(銅錢)고리 하나도 넣고 다니지 않을 때였다. 여기에서 잠시 김창근 시인이 쓴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동해남부선
김창근
바다를 끼고 흐르는 시월의 창변(窓邊)
옛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익은 가을이 떠 내리고
젊은 날의 흐린 갈증을 일깨워
미련처럼 길게 누운 그림자
동해남부선 그 외진 철길 위로
후줄근히 젖어 남루한 우울이 밀리면
가버린 시절의 간이역 어느 시간표에도 없는 슬픔이
기적 소리에 실려 자꾸만 아득히 멀어지는데
행선지가 없어 더욱 막막한 어둠의 궤적에 올라
오늘은 누가 그렇게 또 떠나가는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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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토록 숱한 추억(追憶)들이 아로새겨진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이제 우리들의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도 소개한바 있지만, 9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일부구간과 이 철길을 따라 늘어선 경주역(慶州驛)과 불국사역, 외동읍지역의 죽동역, 입실역, 모화역 등 경주시내의 10개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의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경주시 외곽으로 이설(移設)되고 복선으로 전철화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선을 이설하는 것은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역사지구(歷史地區)를 동해남부선이 관통하고 있어 이전이 바람직하다는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경주 도심구간을 피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은 경부고속철도(京釜高速鐵道) 신경주역사(新慶州驛舍)가 들어설 건천읍 화천리 마을구간을 터널로 통과하고 모량리, 고란들 구간은 교량을 건설하며, 광명동 구간을 터널로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기존의 정거장 중 외동읍 구간의 모화(毛火), 죽동역(竹東驛), 경주시내구간의 불국사(佛國寺), 동방(東方), 경주역(慶州驛)은 폐지되고 입실(入室), 부조, 나원, 안강역은 이전 신설된다.
그리고 중앙선 철도의 모량, 율동, 금장역은 폐지할 예정이다. 외동읍(外東邑) 구간 동해남부선의 경우 입실에서 모화까지는 복선전철(複線電鐵)로 형태를 달리하여 그 일부가 남아 있게는 되나, 지금의 역사(驛舍)마다 수북하게 담겨있는 출향민(出鄕民)들의 애틋하고 정겨운 추억들은 그 역사(驛舍)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의 동해남부선
여기에서 사라져가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의 역사를 잠시 되살펴 본다. 앞서 말한 대로 현재의 동해남부선 철도는 1910년대에 개통된 ‘경편철도(輕便鐵道 : 협궤철도)’로서의 ‘경동선’에서 연유한다.
당시의 ‘경동선’은 대구(大邱)에서 경주(慶州)를 거쳐 울산(蔚山)을 왕래하는 철도였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동선’은 경편철도, 즉 협궤철도(挾軌鐵道)로 나중의 표준궤도 또는 광궤(廣軌)라 불리던 폭 1.435미터의 선로보다는 훨씬 좁았다. 따라서 이 선로를 달리던 열차 역시 소형 협궤열차였다.
‘경동선(慶東線)’은 처음 1912년 7월에 부산진(釜山津)과 동래(東萊) 간의 사설철도를 운영 중이던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가 동래에서 울산, 경주, 대구, 포항을 잇는 철도부설 허가신청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경제 불황에 따른 자금부족으로 1915년에 그 허가는 실효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6년 2월 1일에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경부선(京釜線) 대구역(大邱驛)을 기점으로 동해안 학산역까지 연장하는 65.1km를 비롯하여 서악에서 불국사, 울산, 동래까지 그리고 울산에서 장생포간을 연결하는 총 연장 131.8km에 걸친 궤도 폭 2자 6치인 증기기관차용 철도부설을 신청하여 동년 2월 15일에 허가를 받았다.
이 노선은 1917년 2월에 대구(大邱)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1월에 대구와 하양간, 다음해인 1918년 11월에는 하양-포항 간이 개통되었다. 이를 동해중부선(東海中部線)이라 했다.
이 노선의 개통 배경에 대해 ‘조선교통사(朝鮮交通史)’는 “이 철도는 경상북도 남부의 웅도 대구(大邱)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연선의 농업, 기타 산업의 개발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동해안의 울산(蔚山), 포항(浦項)의 항만을 연결하여 해산물의 내륙수송 및 내륙물산의 일본, 조선 내 각 항(港)으로의 이출입에 활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 경주(慶州), 불국사(佛國寺)에 있는 신라 2천년의 고대유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편리를 제공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이 노선(路線) 개설의 목적은 경주관광(慶州觀光)과 내외 물자수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노선공사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즉, 국유철도(國有鐵道)가 아닌 사설철도(私設鐵道)이다 보니 언제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순조롭지 못했다.
불국사역으로 진입하는 그 시절 완행열차
(1920년대 울산과 경주역을 운행하던 협궤 증기기관차)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다음 보도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1920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울산철도공사 기공확정’이라는 제목으로 “카시이(香椎) 부산상업회의소 회두(會頭)가 대구(大邱)를 방문해서 조선중앙철도회사의 타케(武), 사토(佐藤) 양 전무와 스즈키(鈴木) 지배인과 회견하고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격의 없이 협의한 결과 현지 측량까지 필하야 공사에 착수할 계획이 확립되었는데, 작금 경제가 어려워 자본에 여유가 없어서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 노선의 필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간과하지 않고 부산(釜山) 및 조선가스에 대해 정식으로 교섭을 개시 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21년 10월 25일에 조선중앙철도 울산-불국사 구간이 개통되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개통일자를 한 달 앞두고 ‘중철 울산선개통기’라는 제하에 “조선중앙철도의 불국사 울산간(18리 6분)신설 선로는 불원간 준공되겟슴으로 내 10월 25일부터 운수영업을 개시할 예정으로 목하 전혀 차의 준비 중이라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1921. 9. 24).
이어서 개통일인 10월 25일자 동 신문에서는 ‘중앙철도 개업-불국사 울산간’이라는 제목으로 “예히 공사중이든 조선중앙철도선로 불국사 울산간 18리 6분, 조치원 청주간 14리 1분은 각기 준공되어 전자는 내 25일부터 후자는 11월1일부터 영업을 개시한다는대 경관국에서는 개통의 당일 각 신역에 대하야 연대수송을 행한다하며 대구로부터 울산에 지하는 각역의 이정운임은 좌와 여하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불국사, 일실(一室), 모화, 노계(老溪), 울산이라는 역명이 보이고, 이 가운데 대구(大邱)에서 울산(蔚山)간의 철도운임은 거리 68.7리에 1등석이 4원83전, 2등석은 3원95전으로 되어 있다. ‘일실’과 ‘노계’는 ‘입실(入室)’과 ‘호계(虎溪)’의 오자(誤字)로 보인다.
이 노선은 당초 부산(釜山)까지 연장할 계획(동아일보 1921년 10월 30일자)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1935년 12월 16일에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개통될 때까지 미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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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웽고개’가 위치하고 있는 ‘자미산(일명 ‘자밋등’이라고도 함)’은 울산만(蔚山灣)으로 흘러드는 동천강(東川江 ; 일명 禹朴川)과 영일만(迎日灣)으로 흘러드는 형산강(兄山江)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남쪽 사면(斜面)으로 흐르는 물은 ‘반꼴(盤洞)’개울과 우박천(禹朴川)을 거쳐 울산 동천강(東川江)으로 흘러가고, 북쪽 사면으로 흐르는 물은 ‘영못안’ 앞쪽 개울과 영지호수, 방어리 앞 하천을 거친 후 경주시내의 서천(西川)을 경유하여 영일만(迎日灣)으로 흘러간다.
‘웽고개’에는 2013년 7월, 당시의 가파른 고개와 지그재그로 이어진 진출입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샛말’ 앞 논들과 ‘웽고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마을 진입로(進入路)를 개설하여 국도(國道) 7호선과 마을의 접근성(接近性)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괘릉리(掛陵里) 마을진입로(리도 203호선)는 지난 2008년 1월 착공해 토지보상비(土地報償費) 4억 8천 5백 만원을 포함한 총사업비 11억원의 시비(市費)로 개설되었다.
괘릉리 마을 진입로 개통식
윗말(웃말)
‘윗말’은 ‘사리밭등’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며, ‘큰말’의 위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윗말’로 불리며, 불국사(佛國寺)에서 남서방 약 2.4k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1984년 8월 18일 현재 청안이씨(淸安李氏) 등 10여 가구 54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상리(上里)’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또한 후대인(後代人)들이 편의상 붙인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윗말’에는 카페지기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제7회 동기생인 유재철(柳在喆)군이 고향을 지키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영지초등학교 한해 선배(6회)이기도 하다.
큰마을(큰말)
‘큰말’은 띄엄띄엄 모여 이루어진 전체 마을 중 가장 많이 모인 집단마을이라 하여 ‘큰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거주 호수(戶數)나 인구(人口)로 봐서는 ‘샛말’이 가장 큰 마을인데, 만석꾼과 그 일가붙이들이 살던 동리라 해서 ‘큰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소한 지명(地名)에도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이 작용한 듯 하여 씁쓰레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 등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은 경주중고등학교(慶州中高等學校)를 설립한 만석꾼 고 이규인(李圭寅) 선생의 고향이다.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대리(大里)’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 또한 후대인(後代人)들이 편의상 붙인 지명일 뿐 본래의 이름은 아니다. 이 마을에는 수봉 이규인(李圭寅)선생을 기리는 수봉정(秀峯亭)이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이 그 당시 만석꾼이었던 수봉 이규인(李圭寅)선생의 고향이기는 하나, 그 후손들의 고향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카페지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들 가족을 본 일이 없고, 궁궐(宮闕) 같은 그의 저택(邸宅)에는 ‘마름’이나 서민출신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이규인(李圭寅) 선생이 사망하고, 일제가 패망한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전국적으로 실시한 농지개혁(農地改革)으로 만석꾼의 전답들을 정부가 매수하여 소작인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군왕처럼 군림하던 지위가 상실되어 그 가족들 모두가 경주(慶州)시내와 서울 등지에 출향하여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잠시 이규인(李圭寅) 선생의 이력을 알아본다.
수봉 이규인(李圭寅)은 1859년 음력 4월 16일,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掛陵里) 487번지에서 7남매의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우서(瑀瑞)이고 호는 수봉(秀峯)이다.
그는 카페지기와 파시조(派始祖) 익제공(益齊公 ; 고려말 문하시중)의 후손으로 파조(派祖)를 같이하는 할아버지뻘 종친(宗親)이기도 하다.
1865년 나이 6세가 되자 재종형(再從兄) 이규택(李圭澤)이 훈장(訓長)으로 있는 서당에 다녔고, 1872년 13세에 옥산의 여강이씨(驪江李氏)와 혼인하였으며, 1877년 음력 6월 20일에 부친을 여의고 가업(家業)을 물려받았다.
1919년에는 오늘의 수봉학원(秀峯學園 ; 경주중고등학교)의 모태(母胎)라 할 수 있는 수봉정(秀峯亭)을 건립하고, 교육(敎育), 의료(醫療), 구휼(救恤)의 사회사업을 펼쳤다.
이후 1938년 4월 20일에는 5년제 공립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기록에 의하면 외동읍(外東邑) 입실리에 소재하는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도 수봉 선생이 부지와 건축비를 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석꾼의 부자인 공은 당시까지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의 뿌리인 시조사당(始祖祠堂)조차 마련하지 못한 처지를 개탄하여 향사(享祀)를 받들 위토(位土)를 헌납하여 표암재(瓢菴齋)를 건립하는데도 일조했다고 한다.
그는 1936년 음력 5월 3일, 수봉정(秀峯亭)에서 서거(逝去)하였으며, 묘는 경주시 구정동 소재 소정산(蘇亭山)에 위치하고 있다.
이후 광복직후 최초로 모금에 의한 동상(銅像)이 경주중고등학교 교정에 건립되었고, 1961年에는 정부에서 공에게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수봉선생의 동상
(1948년 10월 20일 경주중고교 교정에 세운 동상이다)
이규인(李圭寅) 선생의 호(號) 수봉(秀峯)은 괘릉리 ‘하이골’ 입구에 소재하는 ‘수지봉(秀之峯)’에서 ‘지(之)’자를 떼고 ‘수(秀)’자와 ‘봉(峯)’자를 조합(組合)하여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만석꾼 이규인(李圭寅)은 틈이 나면 가끔 자기 손자들을 데리고 이 ‘수지봉(秀之峯)’에 올라가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로 변에 걸쳐 펼쳐져 있는 들판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일러주곤 하던 산이라 이 산의 이름을 자기의 호(號)로 차용한 것이라 한다.
‘큰 마을’은 또 감화문집(甘華文集)의 편저자인 이능오(李能吾 : 1834-?)가 살던 고장이기도 하다.
감화문집은 1912년경에 편찬․간행된 것으로 권1~3에 편저자 이능오(李能吾) 의 증조부이자 조선 후기의 학자 이정익(李鼎益 ; 1753-1826)이 은거생활 중에 산수화초를 읊은 시 369수가 수록되어 있다. 감화문집은 현재 규장각한국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에 소장되어 있다.
윗말에는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 동기생 중 이상락(李相洛)군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충북 청주시(淸州市)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락(李相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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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골(하이꼴, 한이골)과 괘릉저수지
‘하이골’은 동산령(東山嶺)의 제일 큰 골짜기에 위치하여 형성된 마을로 옛적에는 몇 가구가 거주하였으나, 두 번째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 축조로 모두 이주하였다.
여기에서 ‘두 번째’라는 것은 1950년대 후반에 주민 자체로 시공(施工)한 첫 번째 저수지 공사가 1957년 ‘사라호’ 태풍(颱風) 때 홍수로 떠내려 간 후 지난 2000년에 농업기반공사(農業基盤公社)가 두 번째로 축조한 공사(工事)라는 뜻이다.
‘하이골’은 이를 ‘한이골’이라고 보고, 최근에 와서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채용하여 ‘대리곡(大利谷)’이라고도 부른다.
위치는 불국사(佛國寺) 정남방 약 1.5km 지점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에는 감산사(甘山寺)라는 사찰이 있다. ‘하이골’은 또 ‘괘릉(掛陵)재’와 ‘활성(活城)재’ 사이에 있는 토함산록의 모든 골짜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도 통용되었다.
카페지기가 거주할 당시의 ‘하이골’은 온 마을의 땔나무를 제공하는 국유림(國有林)이었고, 여름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 먹이러 다니던 추억의 산록(山麓)이었다.
1950년대에는 ‘건네산(괘릉재 너머에 있는 산)’에 삼판(목재 벌목장)이 개설되어 ‘하이골’까지 목재운반용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운행되기도 했었다.
‘소맥이러’ 다니면서 ‘건네산’에서 벌채한 통나무들이 거대한 쇠줄을 타고 쏜살같이 내려꽃이는 장관을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쭈그리고 앉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은 도수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나, 카페지기가 고향에 거주할 당시 ‘하이골’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싸리밭등’ 위쪽에서 형산강(兄山江)과 동천강(東川江)으로 흘러가는 분기점(分岐點)을 이루기도 했다.
‘하이골’의 ‘활성재’쪽 끝 골짜기에서 발원(發源)한 물이 지금의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쯤에 이르면, 감산사 위쪽 용천(龍泉)으로 도수로(導水路)를 만들어 큰 개울의 물길 일부를 감산사(甘山寺) 쪽으로 돌렸고, 감산사 앞을 지나 ‘싸리밭등’ 위쪽에서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싸리밭등’마을 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볕골(뺏골)과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하천, 그리고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로 밑을 거쳐 우박천(禹朴川)을 경유하여 울산시 동천강(東川江)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갈라진 물길은 ‘사리밭등’ 뒷 개울과 윗말 가운데 논들을 거쳐 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신계리와 ‘방깟’마을로 건너가는 길 초입(큰 마을 동단)에서 다시 갈라져 오른쪽 개울물은 ‘샛말’ 앞과 ‘반꼴’을 거쳐 동천강으로 흐르고, 왼쪽 개울물은 ‘샛말’ 뒷쪽 개울과 ‘자미산’ 동쪽 개울,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로 밑을 지난 후 ‘영못안’과 영지(影池)를 거쳐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간다.
1950년대에는 위에서 말한 대로 ‘하이골’ 물을 막아 농업용수(農業用水)로 쓰기 위해 골짜기 입구에 저수지를 축조(築造)하기도 했으나, 1957년 사라호 태풍 당시의 대홍수로 모두 유실(流失)되어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지난 2000년,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축조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새롭게 축조된 괘릉저수지
괘릉저수지(掛陵貯水池)는 위에서 말한 대로 외동읍 모화리의 우박천(禹朴川)과 울산광역시 동천강(東川江)의 발원지가 되기도 한다. 괘릉리 지역에서는 ‘어이내’라고 하는데, ‘어이내’라는 옛 뜻은 하늘(天)로 표기됨에 따라 신령스러움과 광명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우박천(禹朴천)’이란 이 개울이 모화리의 ‘우박(禹朴)마을’을 통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동천(東川)’이라 함은 울산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뜻한다.
태화강(太和江)과 더불어 울산의 젖줄인 동천강(東川江)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掛陵里)에서 시작하여 울산광역시 북구(北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태화강으로 유입되는 지방 1급 하천이다.
동천강 유역은 동경 129°15′ ~ 129°25′와 북위 35°32′ ~ 35°46′ 사이에 위치하며, 유역 북측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남측은 울산광역시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 경북 경주시(慶州市)와 울산광역시가 유역(流域)을 남북으로 반분하여 점하고 있는 형태이다.
토함산 목장
‘하이골’의 정상(頂上)의 ‘괘릉재’와 괘릉리 앞마을인 활성리(活城里)의 ‘활성재’ 사이의 광활한 습지에는 언젠가부터 목장(牧場)이 조성되어 있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어떻게 목장을 조성했는지는 모르나, 장소는 최상급의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험준한 산정(山頂)에 맑은 물이 솟는 샘과 습지(濕地)가 있고, 일체의 오염요소가 없는 청정목초지(淸淨牧草地)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가나안 목장’이라고도 한다.
카페지기가 향리(鄕里)에 살 때는 더 좋은 땔나무를 하기 위해, 그리고 마른 ‘쇠똥’을 줍기 위해 가끔 이 목초지(牧草地)와 목초지 너머 ‘건네산’까지 나무지게를 지고 왕래하였다.
토함산 목장(가나안 목장) 전경
당시 그 목초지 중심부에는 조그마한 움막집이 있었고, 젊은 여승(女僧) 한 사람이 수행(修行)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59년인가의 어느 해 몰지각한 나무꾼 한 사람이 그녀를 겁탈하여 임신(姙娠)을 시켰고, 만삭이 된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출산(出産)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다 가련한 그녀를 못 본 척 그냥 둬도 될 일이었는데, 무지막지한 괘릉리(掛陵里)와 활성리(活城里)의 나무꾼들이 합세하여 지게 작대기로 개 패듯이 집단구타(集團毆打)를 했던 일이 있었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비구니(比丘尼)가 파계(破戒)를 했고, 음행(淫行)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고, 그래서 자신들이 심판을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근에 어떤 명분에서였는지는 모르나, 경상북도 '충효마을' 주민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어쨌든 불국사(佛國寺) 턱밑에서 불자(佛者)를 숭상하던 동민(洞民)들이 그 불제자(佛弟子)를 겁간(劫姦)하고 임신이 되었다 해서 죽이려 한 것이다.
아픈 마음으로 구경만 하다가 돌아 왔는데, 그 이후 그녀의 생사(生死)에 대해서는 일체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당시 집단구타(集團毆打)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70대의 노파(老婆)가 되어 있을 것이다.
초죽음이 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앳된 여승(女僧)의 피투성이 얼굴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게 작대기를 꼰아 들고 히죽거리며 내려다보던 '충효(忠孝)마을' 청장년들의 야수(野獸)와 같은 얼굴도 함께 클로즈업된다.
영지저수지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1261번지에는 1955년 카페지기가 제7회로 졸업한 영지초등학교의 교명을 탄생시키고, 그 정절을 이어 받았다는 영지(影池) 저수지와 영지석불(影池石佛)이 있다. 영지란 마주 보이는 불국사(佛國寺)가 영지호수의 물속에 비친다는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제방에서 본 영지저수지와 토함산
(옛적 물이 맑고 물결이 일지 않을 때는 토함산은 물론 벚꽃이 만발한
불국사 일원이 물속에 고스란히 비쳐 넋을 잃고 쳐다보기도 했었다)
저수지는 괘릉리에 있었지만 몽리지역(蒙利地域)인 방어리(方於里)에 있는 학교가 이 저수지의 이름을 따서 영지초등학교가 된 것이다. 길쭉하게 생긴 저수지로 전혀 볼품은 없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제법 애틋한 사연들을 담고 있다.
그 때의 사연을 알아본다. 신라(新羅)시대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을 창건할 때 당시의 건축책임자인 김대성(金大城)은 전국(통일신라 : 統一新羅)에서 가장 뛰어난 석공으로 알려진 백제(百濟)의 유민(遺民) ‘아사달(阿斯達)’을 불러 올려 다보탑과 석가탑을 창건하도록 했다.
백제(百濟)에서 신라의 수도 경주에 온 ‘아사달(阿斯達)’은 탑의 창건에 몰두하느라 해가 가는 줄도 모르고, 온 정성을 기울여 매달렸다.
한편, 남편의 일이 하루 빨리 성취되어 돌아 올 날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는 기다림에 지쳐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난 후 ‘아사녀(阿斯女)’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옛 백제 땅에서 천리 길을 걸어 남편이 일하는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禁忌) 때문에 공사장 내에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냥 돌아설 수 없는 ‘아사녀(阿斯女)’는 남편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날마다 불국사(佛國寺)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를 보다 못한 승려 한사람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며,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해 줬다. 이때는 ‘아사달’이 석가탑(釋迦塔 ; 일명 무영탑)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무영탑(석가탑)
이튿날부터 ‘아사녀(阿斯女)’는 그 연못에 찾아가 온종일 물속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지나도 무심한 수면(水面)에는 탑의 그림자도 ‘아사달(阿斯達)’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극도로 상심한 ‘아사녀(阿斯女)’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끝내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阿斯達)’이 아내의 소식을 듣고 연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이미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된 아내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아내를 그리며 연못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선명하게 겹쳐져 나타났다. ‘아사달(阿斯達)’은 그 바위에 미친 듯이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 조각이 뒤에서 소개하는 영지석불(影池石佛)이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뒷일은 전해진 것이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영지(影池)’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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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阿斯達)’과 관련한 설화에는 이와 약간 다른 이야기도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된 부여의 석공 ‘아사달’이 불국사 건축을 위해 서라벌(徐羅伐)에 불려오게 된다.
탑(塔) 조성을 맡은 ‘아사달(阿斯達)’은 고향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다보탑(多寶塔)은 완성했지만, 석가탑(釋迦塔)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아사달(阿斯達)’은 건축현장을 시찰하는 국왕의 일행으로 따라 온 서라벌 귀족의 딸 ‘주만’(구슬아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론 구슬아기의 일방적인 사랑의 공세 때문이었다.
한편 부여에 남아있던 ‘아사녀(阿斯女)’는 보고 싶은 남편을 찾아 서라벌(徐羅伐)에 도착했으나 불국사 입구에서 “여자가 출입하면 부정 탄다”는 문지기의 거절로 쫓겨난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영지(影池)에 비치게 될 것”이라는 문지기의 말에 ‘아사녀’(阿斯女)는 영지 못가의 민가에 살면서 날마다 물속을 들여다보며 석가탑(釋迦塔)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탑은 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아사녀(阿斯女)’는 우연히 알게 된 뚜쟁이에게 속아 어느 대감집 후처(後妻)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일로 ‘아사달(阿斯達)’에 대한 죄책감이 가중되자 ‘영지못’에 뛰어들어 숨지게 된다.
뒤늦게 ‘아사녀(阿斯女)’의 죽음을 들은 ‘아사달(阿斯達)’은 영지 못 가로 달려와 바위에 ‘아사녀’와 ‘주만’의 형상을 합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불상(佛像)을 세운 뒤 자신도 영지(影池)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아사녀의 불상
앞의 얘기는 충절(忠節)과 정절(貞節)이 강조되어 있고, 뒤의 얘기는 불충(不忠)과 부정(不貞)을 부각시키고 있다. 필자의 모교 영지초등학교가 영지(影池)의 정절을 이어 받았다면 그것은 당연히 앞의 것인 충절과 정절일 것이다.
농업용수(農業用水)의 저수(貯水)와 낚시터에 불과한 영지저수지(影池貯水池)에는 가끔씩 관광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불국사(佛國寺)에 왔던 사람들이 무영탑에 얽힌 얘기들을 듣고 내친김에 다녀가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는 숙명여대 등 서울지역의 여대생(女大生)들이 주로 이 저수지에 들렸다. ‘아사녀(阿斯女)’와 같은 여성의 심경으로 그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젊은 여성이 이 저수지를 다녀가면서 나름대로 애상(哀想)에 젖어 남겨놓은 자작시(自作詩) 한 수를 소개한다.
영지 못
솔숲 사이 높은 솟은 저- 큰바위
아사녀를 삼켜버렸나
논개 육신 탐하던 남강이 세월 돌려와서
아사녀를 유혹했던가
광활하던 천년 영화 머금고
보문호와 덕동호도 아닌
토함산 한 자락 질펀하게 끌고 나와
시퍼렇게 멍든 가슴
아직도 아물지 못했던가
백제에서 신라로 건너는 세월강 너머
총총걸음 등불 밝혀온 아사녀
일편단심 임 찾아 가시밭길 걸어왔네
임과 마주한 그 약속
물 위에 비추리라던 탑의 형상
서산에 해가 져도 보이지 않아
지쳐가는 그리움은 절망으로 변했네
흐르는 세월은 아사녀의 육신이
연못 속 깊이 잠들게 하여도
여름은 다가와 비는 내리고
가을은 떠나고 눈은 날리고
해와 달이 바뀌어 갈 때
나래 고운 청둥오리 수면에서 외치네
“아사달은 어디 있뇨!”
“아사녀는 어디 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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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影池)에는 예부터 ‘말’이라고 부르는 ‘버들잎가래’가 많이 자라고 있다. ‘말’은 연못이나 흐르는 물속에서 자생하는 수초(水草)로 연한 줄기와 잎을 나물로 무쳐 먹는데, 채소가 나지 않는 봄철에는 식욕을 돋우는 좋은 반찬감이 되었다.
‘말’은 한국, 일본, 중국 북동부 등지에 분포되어 자생하고 있다. 지난 1950년대까지 영지에서는 얼음이 녹는 이른 봄마다 저수지 가운데 자라는 이 ‘말’을 주민들이 채집하여 오일장인 ‘불국장(佛國場)’에 내다 팔기도 하고, 온 동네 주민들이 봄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말(버들잎가래)’
주로 괘릉리의 자연부락인 ‘영못안’ 주민들과 영지저수지 제방 아래의 ‘못밑(影湖)’ 주민들이 호수(湖水) 양쪽에서 긴 줄을 늘여 채집(採集)했는데, 이 때 끊어진 잔 토막들은 물결에 밀려 물가로 밀려나오게 된다.
카페지기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연못가 모래톱에 밀려나온 새파란 이 ‘말’을 주워 어머님께 드리면 보리밭 이랑에서 캐어 온 달래와 조선간장으로 조리하신 맛있는 ‘무침’이 되어 상위에 오르곤 했었다.
뜨거운 보리밥에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一品)이었다. 지금도 ‘영지못’에 그 ‘말’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때 그 맛을 떠올리면 군침이 돈다.
그리고 지금도 영지저수지를 떠 올리면, 하학길마다 ‘누드’가 되어 지치도록 개헤엄을 쳤고, 미술시간이면 못둑에 퍼질고 앉아 불국사(佛國寺)를 쳐다보며 사생화를 그리던 시절이 한 덩어리가 되어 떠오른다.
여름철에 아침밥이 늦어 지각(遲刻)이라도 할라치면, 뜨거운 못둑 길을 무명보자기로 만든 책보를 대각선으로 질끈 메고, 고무신을 벗어든 채 달음질을 치던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이 되어 스치기도 한다.
영지(影池)는 경상북도 비지정(非指定) 향토문화재(鄕土文化材)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저수지와 관련해서는 ‘아사달’과 ‘아사녀(阿斯女)’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대중가요(大衆歌謠)가 있다. 손로원이 작사하고 이재호가 작곡한 ‘무영탑 사랑’을 음미해 본다.
무영탑 사랑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1. 부여 길 오백리 길 님 두고 가는 길에
서라벌에 맺은 사랑 영지(影池)에 띄우면은
달빛도 별빛도 울어주던 그 날 밤
나는 가네 나는 가네 님 없는 부여 땅에
2. 부여 길 떠나올 때 옷깃을 부여잡고
무영탑(無影塔)에 엮은 사랑 천만년 기억하소
청사실 홍사실 걸어놓고 빌던 밤
나는 가네 나는 가네 님 없는 부여 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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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影池)는 최근 일부 호안도로(湖岸道路)를 직선으로 조성하면서 연못의 한쪽이 잘려나가 면적이 3분의 1정도 줄었다. 옛날 불국사(佛國寺)는 2000 칸의 큰 규모였는데, 그 전체가 영지저수지에 비칠 정도로 당시의 영지(影池)는 지금보다 두 배쯤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호안부지(湖岸敷地)를 매립한 오른쪽 야산에 거대한 콘도미니엄을 건설하다 중단하여 귀곡성(鬼哭城)을 방불케 하는 흉물이 되어 있다가 지난 2011년부터 공사가 재개(再開)되고 있다.
‘갤럭시 리조트’라는 이름으로 공사에 착공했다가 부도(不渡)로 몇 년 동안 공사(工事)가 중지 되어 있다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면서 ‘리쳄블 리조트’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어쨌든 이 건물이 그대로 준공되면, 생활하수(生活下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몰라도 만일 저수지(貯水池)로 그냥 흘러 보낸다면, ‘아사녀(阿斯女)’의 새하얀 정절(貞節)이 오염될까 마음이 무거워 진다.
‘리쳄블 리조트’ 공사현장
한편 경주시(慶州市)는 영지저수지 일원에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영지설화공원(影池說話公園)’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 영지설화공원 조성을 위한 기본계획 및 설계용역 최종 보고회를 갖고, 지금은 이를 시행 중에 있다.
이 계획은 2016년까지 사업비 100억원을 투입해 영지(影池) 일대의 16만5000㎡에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阿斯女)’의 설화를 스토리텔링한 부부사랑(테마)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괘릉리 바위구멍(기자바위)
괘릉리(掛陵里)에는 또 옛적에 이 마을 부인들이 기자(祈子 ; 아들 낳기는 비는)를 기원 드리던 ‘기자바위’ 유적(遺跡)이 있다. 카페지기가 거주하던 괘릉리 ‘샛말’ 맞은 편에 있는 황사등(黃砂嶝 : 황시디)’ 동북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커다란 바위 위에 남북으로 길게 60여개의 ‘바위구멍’이 파여져 있다.
구멍의 크기는 대부분 지름 4~8cm 정도인데, 큰 것은 12cm에 깊이는 약 8cm 정도 되는 것도 보인다. 구멍과 구멍 사이 선각(線刻) 홈으로 연결되는 것도 있고, 희미하게 그 형체(形體)를 알아보기 힘든 구멍도 있으며, 누워 엎드린 나무 사이로 숨어 있는 것도 보인다.
북토리(北吐里)의 아낙들은 마석산(磨石山)에 있는 남근석(男根石)을 찾아 비손(두 손을 비비면서 치성을 드림)으로 득남(得男)을 기원했지만, 괘릉리(掛陵里)의 아낙들은 이 ‘기자(祈子)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단단한 차돌 돌멩이로 바위마다 구멍을 파면서 득남을 기원한 것이다.
괘릉리 바위구멍(기자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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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요(徐羅伐窯)
영지석불(影池石佛) 아래 영지저수지 입구, 외동읍 괘릉리 1184번지에는 지난 1968년부터 도예가 우향(愚香) 김두선(金斗善)씨가 운영하는 ‘서라벌요(徐羅伐窯)’가 있다.
우형 김두선씨는 40년간 해외전시(海外展示)만 80회나 개최하는 등 분청사기 보급에 앞장서 왔다.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서라벌요(徐羅伐窯)는 지난 1999년 미국(美國) 메릴랜드에 직영 대리점까지 오픈하는 등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김두선(金斗善) 작가는 일본(日本) ‘히로시마’ 출생으로 동서사업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으며, 제10회 현대미술대상전 대상 수상, 1990년 한일국제미술대전 금상, 1992년 ‘한국의 혼’ 경진대회 금상 수상, 1998년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수상경력(受賞經歷)을 갖고 있다.
언젠가 카페지기가 서울 명동(明洞)의 ‘홍익화랑’에서 그녀의 동생을 만나 대충 얘기를 듣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내용은 아는 것이 없다.
카페지기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을 떠난 지가 어느새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 고향마을에 이토록 저명한 도예가(陶藝家)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다. 그녀의 호(號) '우향(愚香)'은 ‘어리석은 향기’라고 한다.
괘릉리의 서라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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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리(掛陵里)의 출향 인사를 좀 소개하려는데,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앞쪽 ‘싸리밭등’ 소개에서 말한 목사(牧師)님 세분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출향인사(出鄕人士)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인이 된 사람들 중에도 카페에 올릴만한 인물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손꼽으라면 이미 고인이 된 학교법인 수봉교육재단의 이상열(李相烈) 전 이사장을 꼽을 수 있으나,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경주시내여서 괘릉리(掛陵里)의 인사로 보기는 어렵다.
1924년 경주(慶州)에서 출생한 이상렬 전 이사장은 1944년, 자신의 할아버지(이규인)가 세운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만주개척의학전문학원, 건국대를 나와 고려화재보험(현 쌍용화재), 한국스레트공업(현 벽산그룹) 대표이사, 경주유림총연합회장, 경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했었다.
그리고 그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재경(在京) 경주향우회(慶州鄕友會)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었고, 지난 2004년 10월 9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외동읍 활성리(活城里)에 안장되어 있다.
이를 제외하면, 괘릉리(掛陵里)에는 다른 동네와 달리 이렇다 할 출향인사가 거의 없는 편이다. 굳이 들라면, 역시 이미 고인이 된 사람으로는 ‘영못안’ 출신으로 제3대 경상북도의회(慶尙北道議會) 의원을 역임한 김해성씨가 있었고, ‘샛말’에는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한 괘릉리 이장(里長) 출신 이석준(李錫準)씨가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인단(大統領選擧人團)으로는 괘릉리 874번지 출신으로 외동면장을 역임했던 설병렬(薛柄烈)씨가 있었다. 설병렬씨는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 동기생 설두생(薛斗生)양의 부친으로 당시의 외동면장(外東面長)을 비롯하여 경주군과 월성군의 6개 읍면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列擧)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고, 출향(出鄕)이라기보다는 같은 경주시내에서 거주하다가 작고하신 분들이라 그 의미가 더욱 퇴색된다.
출향인사는 아니지만, 향리(鄕里)에서 지금까지 활동하는 이는 카페지기의 외동중학교 5년 선배이신 김진환(金鎭煥)씨가 대한노인회 경주시지회 부회장과, 경주시 풍수지리학회 고문, 외동읍유도회(外東邑儒道會) 회장 등을 맡아보고 있다.
김회장은 지난해, KBS ‘다큐 24시’에서 ‘올해 노인, 세상에 말을 걸다’ 등의 프로에 주인공으로 방송되기도 했으며, 5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농일기(營農日記)를 작성하여 ‘흙으로 쓴 50년의 삶’이란 책이 한 금융기관(金融機關)의 후원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대구은행이 발간한 김진환씨의 일대기 ‘흙으로 쓴 50년의 삶’
(우측 상단은 괘릉, 중간은 김진환씨의 일기장, 중앙 우단은 괘릉의 석사자상, 좌측 하단은 괘릉 문인상, 우측하단은 '짝가래'질 하는 김진환씨)
카페지기의 경우는 1960년대에 상경하여 고학과 만학으로 간난신고를 겪다가 1981년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경기도 4급공무원 특별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정년이 될 때까지 공무원으로 재직한 것이 전부다.
퇴직후에는 행정자치부 자문위원, 전국시.도의장협의회 수석전문위원, 대통령소속 지방분권위원회 실무위원, 역시 대통령 소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한바 있으나, 이들 직책도 지난 2012년 말을 기하여 모두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지금은 명예직에 불과한 전국시도의회의장협의회 정책자문위원, 한국의회학회 지방의회분과 부위원장, 자치행정연수원 지방의정연구소장을 맡아 소일하고 있다.
※ 카페지기가 남의 동네 출향인사(出鄕人士)들은 그런대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자기 출신 향리의 출향인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여간 쑥스럽지가 않다.
동문여러분, 특히 괘릉리(掛陵里) 출신 동문여러분께서 괘릉리 출신 출향인사를 아시는 분들은 ‘답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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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용우님은 영지초 7회 이시지만 괘릉 샛말에 사셨는 분입니다. 괘릉 7회인 저희들 보다 16년 연배인줄 알고 있습니다.
왜동읍에 관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글로 남기시는 대단하신 분입니다. 괘릉의 출향인사 어느분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