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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21(주일) 눅19:1~10 “삭게오에게 임한 구원”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풍족해 보이고 행복해 보일 수 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넉넉한 생활을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습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까지 만족을 주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목마름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높은 직위를 가지면 만족할 줄 알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허무함이 찾아옵니다. 스마트폰 속에는 수많은 소식과 즐길 거리가 있지만, 깊은 외로움과 불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다녀오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취미를 즐기며 공허함을 채우려 하지만, 잠시뿐이지 영혼 깊은 곳까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주님을 향해 살도록 지으셨으니,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결코 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진정한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고, 철학자인 파스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 채우실 수 있는 빈칸이 있다.” 사람들은 그 빈칸을 돈, 명예, 즐거움으로 채우려 하지만, 결국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빈칸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신앙적 고민이 많았고, 1654년 “불의 체험(Le Mémorial)”이라고 불리는 강렬한 회심 사건을 겪은 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을 작은 종이에 기록해 평생 옷 안쪽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이후 신앙적 사유를 글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팡세(Pensées, 사유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계시지 않는다고 사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부자였지만, 그의 영혼은 목마르고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부자이지만 영적으로 목마른 삭개오(1~4절)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1,2절). 당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로마는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갔습니다. 로마는 세리들을 고용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했는데,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을 바치고 그 외의 돈은 자신들의 이익으로 챙겼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로 여겨졌고,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 탐욕스러운 착취자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삭개오는 단순한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 즉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는 여리고 지역의 세금 업무를 총괄하며, 다른 세리들 위에 있는 자리였습니다. 여리고는 무역로와 농산물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였기에, 세리장인 삭개오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이었고, 돈과 권세를 다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 동족을 등쳐먹는 부끄러운 자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돈을 가졌지만,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했고, 그 마음은 늘 공허했습니다. 삭게오는 겉으로는 부자였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겉으로는 부자였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사람이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큰 집에 살지만 가정에는 대화와 사랑이 사라지고, 좋은 직위에 올랐지만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또한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순간의 공허를 달래 보지만, 잠시뿐이고 곧 다시 허무가 밀려옵니다. 겉으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 같지만, 영혼 깊은 곳은 여전히 목마르고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 후 제자들에게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눅 18:23).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신 것은 단순히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장애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재물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고 일시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구원과 영혼의 평안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재물이 많을수록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거나,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6:9–10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즉,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 곧 탐욕입니다.
부자는 재물 때문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스스로를 의지하기 쉽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6)
이는 재물이 구원의 장애물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는 부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회개하고 재물을 내려놓았고, 주님은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삭게오의 영적 결핍이 바로 예수님, 즉 복음을 찾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셨다”(1절)는 소식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복음이 도착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사건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이자 세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4절). 복음은 겸손히 내려놓는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체면, 자존심,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갈망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반응입니다.
적용) 나는 세상적인 풍족함이나 체면 때문에 영혼의 갈망을 덮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삭개오처럼 주님을 보기 위해 나의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달려가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5~7절)
예수님은 ‘삭개오’를 ‘너’라고 하지 않으시고 직접 그 이름으로 부르십니다(5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장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낙인찍힌 존재였는데, 그 이름을 불러주신 것은 그를 한 인격체로 존중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깨끗한 순수한”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탐욕과 부정으로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과거의 죄로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본래의 정체성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5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체하지 말고 즉각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에 삭게오는 즉각적으로 돌감람나무에서 내려옵니다.
17세기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그의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마치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 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 계시는데 믿고 산다면 조금 손해 본 것 같을 뿐이지만, 하나님이 계신데 믿지 않고 산다면 영원한 것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고 사는 편이 훨씬 지혜롭지 않겠습니까?”
삭개오도 체면이라는 작은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달려감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나를 찾아오시고 부르신 주님께 응답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저에게도 주님은 예배드리는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십니다. “혹시 네가 지옥갈 자가 아니냐” 그 주님의 부르심에 저도 삭개오처럼 응답했습니다. “주님, 이번 주 부터 주일예배를 참석하겠습니다” 그 주일 예배에 순종하여 참석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점차 저에게 은혜를 주셨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하시며,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은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름을 아시고, 삶의 상황을 아시며, 직접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하심으로 구원의 사명을 드러내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주님은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내 인생의 집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아시고 인격적으로 부르실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순종하며 주님을 내 삶의 집으로 모셔들이고 있습니까?
3. 삶의 변화와 구원(8~10절)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빼앗은 것은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결단합니다(8절). 율법은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줄 때 원금에 5분의 1을 더해 갚으라고 했습니다(레위기 6:5). 그러나 삭개오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네 배’를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억지나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라고 하시며,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9절)이라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는 본래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었지만, 세리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동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믿음과 회개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자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1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전체의 핵심 구절입니다. 여기서, ‘찾아’라는 단어는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구원하려’는 에서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즉 영적, 사회적, 관계적 회복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삭개오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죄인을 향한 복음의 본질을 선언합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삭게오처럼 잃어버린 자였으나,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오늘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또 다른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삶의 실제적인 변화이며, 구원은 ‘오늘’ 우리에게 임합니다. 적용) 나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증거로,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회개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간증을 듣게 하고 있습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우리 집에 오신 주님, 김광진
냉소적이고 소극적인 저와 달리, 아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유머 감각이 있어서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밝은 아내의 이면에는 심한 감정 기복과 혈기가 있었고, 저는 그런 아내의 기질로 인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말다툼이 고성을 지르는 몸싸움으로 커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 부부는 집 앞에 있는 교회를 우연히 알게 되어 주일예배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해서 다니자는 아내의 제안에 저는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아내와 함께 부부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면서 제가 냉소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저는 명문대에 입학하고 가족에게 인정받으니 앞으로 잘 나가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했고, 저의 외모와 가난한 환경에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초라한 나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삭개오처럼 세상으로 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입니다. 이후 말씀으로 제 삶을 비춰보며, 20대에 경험한 혼란은 평범함 보다 특별함과 환상을 좇은 저의 교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가 안되어 아내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부족한 저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시고 우리 가정에 거해주시니 예배와 공동체 모임을 늘 사모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서로 상처만 주고 받다가 결국엔 갈라섰을 저희 부부를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저희 가정에 오신 것처럼, 공동체에서 받은 은혜로 사람들에게 줄 것만 있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매일 아침 1분간 감사기도를 드리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겠습니다. 아내와 다툼이 시작될 때 제가 더 완악한 죄인임을 기억하겠습니다.
결 론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늘 마음의 공허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격적으로 다가오셨고, 삭개오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삶은 회개와 변화의 열매로 구원의 실제를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구원의 선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