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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롬 8:31-3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집 담장으로 흘러넘치는 장미꽃을 보고, “아, 벌써 오월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 속에 살아오면서도, 그것이 부모님의 은혜인 줄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부모가 된 후에야, “아, 그것이 부모님의 은혜요, 사랑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언제 나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외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짓눌려, 고달파, 지쳐 있는 나를 친히 업고 가셨던 것입니다.
매번,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아감을 잊지 않겠습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모든 고백들을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 혼자 떨어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실만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본 이래,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곁을 떠나면, 나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주님만큼은 내 곁을 떠나시면 안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난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떠나시면 안됩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죄를 범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큰 죄를 짓고, 얼굴 들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와, 그의 숨겨진 죄를 지적했을 때,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외쳤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소서”라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쫓겨나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이 그런 죄를 범한 우리를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한 죄라도 보일 것 같으면, 사나운 늑대처럼 달려들어,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주님 앞에서 쫓겨나면, 우리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를 숨겨줄 데가 없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19)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해 달라고 빌 수 없는 그런 큰 죄를 범했습니다. “나는 아들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심정으로, 아버지 품 안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위한다”라는 말은 “편을 든다. 돕는다”라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말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편든다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면”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편들어 주신다면, 그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을 탈출한 후, 모세는 열두 지파의 두령들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열 명은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성벽은 높고 크며 그 땅 거민은 거인들이어서 우리는 거기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겁에 질린 백성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 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느냐?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때,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여호수아와 갈렙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를 보시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잘하거나 못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셨기에, 애굽을 탈출하게 하셨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 광야에 있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고, 마침내,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편들어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따지고 봐도,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성취한 일이 없고, 하나님께 사랑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민 14:9)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어야지, 반대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도움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 고달프고, 험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6-7)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라고 말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누구에게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1,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라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면, 우리의 적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람 왕이 엘리사 선지자를 생포하기 위해서, 밤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새벽에 사환이 일어나서, 나가 보고, 놀라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탄식했을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을 위하여, “사환의 눈을 열어서 하늘 군대를 보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사환은 하늘을 보고,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 지켜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우리를 지켜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고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3-4)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에게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변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심문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심판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심판이라고 하지만, 다윗을 벌하기보다는 다윗을 지켜 주기 위한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택하신 자를 아무리 고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가랴 3장을 보면,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며, 고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욥기 2장을 보면, 사단이 욥을 비난하고. 하나님께 고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욥에 대하여,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5)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의 별명은 대적자, 참소자, 고소자입니다. 사탄은 남을 좋게 평하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죄가 많아. 너는 과거가 있어. 너는 희망이 없어. 넌 그걸로 끝이다. 넌 재기하기 힘들어. 넌 파멸이야.”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네 죄를 사했다. 내가 널 위해 생명을 버렸다. 너는 희망이 있다. 다시 시작하라. 내가 너를 돕겠다. 내가 힘이 되어 주마. 일어나라. 넌 내 소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절망 속을 헤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로 소망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쓸모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지금은 쓸모 있는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정죄는 유죄판결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노리는 마지막 목표가, 우리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자유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떠나갔습니다. 이제 오직 예수님과 이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러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정죄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사 50:8-9)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이 고발하고, 비난하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정죄한다고 해서, 그 정죄에 대해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택하셔서, 은총과 축복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정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탄과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정죄를 받은 사람은 죄값을 치러야 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미 다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용서와 구원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사탄이 아무리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기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무죄판결을 내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참소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희망을 주시고, 우리들에게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를 그 어떤 것도 끊거나,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거나 떼어놓을 수 있는 조건들이 35절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굶주리고, 헐벗었고, 매를 맞았습니다. 환난과 고통을 당했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돌에 맞았고, 파선의 위기를 겪었고, 감옥의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바울을 떼어놓거나 끊어 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알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어떤 형편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마시고, 우리의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