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오늘 독서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오로와 실라스가 왜 감옥에 갇혔는가 알아보면 재미있는게, 어떤 귀신 들린 하녀가 있었습니다. 이 귀신은 점 귀신입니다. 점을 치는 귀신이기 때문에 이 하녀를 둔 주인은 크게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 귀신들린 하녀가 바오로와 실라스를 쫓아다니면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포함하지 않은, 2인칭 복수 대명사를 씁니다. 즉 이 하녀 자기 자신은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구원 받는다거나 또 더 나아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소리치면서 복음선포에 방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원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구원에 이른다는 순수한 복음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쫓으니 귀신이 그 하녀에게서 나갑니다. 하녀 덕분에 돈벌이를 짭짤하게 하던 주인은 화가 났지요. 그래서 바오로와 실라스를 붙잡아 광장으로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그리고 군중을 선동하여 공격하니 행정관들이 이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칩니다. 그렇게 매질당하고 감옥 가장 깊은 방에 차꼬가 채워진 채 갇힌 겁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중에 다른 수인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매를 맞은 고통 중에 부르는 노래가 하느님 원망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입니다. 좌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때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에 이런 글을 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을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4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육체는 묶여있으나 영혼은 하느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갇혀있으나 영혼은 갇혀있지 않고 오히려 영적 자유와 해방,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죄수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그냥 듣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라는 동사는 아주 특수한 동사로 신약성경 중에 여기서만 쓰였습니다. 시낭송이나 노래, 연주 등을 “기쁘게 듣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특별한 단어가 쓰여집니다. 한밤중, 자정 무렵에 들려지는 기도와 찬미가 감옥 안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유달리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기쁘게 듣는 겁니다.
우리가 절망스럽게 만드는 배경, 상황, 그런 열악한 환경 중에 불쌍한 자기 신세를 보게 되면 한탄스럽고 더 불쌍하고 초라한 자기 자신을 볼 뿐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처럼 주님을 바라본다면 기쁨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일어설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감동을 주고 기쁨이 번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사람답게 복음을 살아갑시다. 더 밝게, 더 기쁘게! 아멘.
첫댓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멘...
주님을 모시는 사람답게
더 밝게!
더 기쁘게!
주님으로 인하여~.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