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1)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 세거지 및 단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있는 광산김씨 세거지는 신라 말기의 왕자인 김흥광이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고 살았는데 고려조에 광산김씨 가문에서 8명의 평장사(平章事 정2품)를 배출하였다 하여 이 마을을 평장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에 와서도 광산김씨 가문은 문묘(文廟)에 부자(父子)가 배향된 김장생(1548∼1631)과 김립(1574∼1656)이란 거유(巨儒)가 있고, 형제대제학(兄弟大提學) 김만기, 김만중이나왔으며,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을 비롯하여 모두 대재학 7명이 배출되었다. 또 의병장 김덕령 등 수많은 인물과 함께, 상신 5명이 나왔다. 이 자리는 연꽃이 반쯤 피어있다는 연화반개형(蓮花半開形), 또는 봉황이 알을 품는다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란 물형(物形)이 등장한다. 사당(祠堂)앞으로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서석산(瑞石山, 無等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장엄하고 웅장하며, 길고 큰 강물이 서로 만나 몸을 섞어 흘러가니 산맥과 물줄기가 생동하는 형상을 이루어 양택(陽宅), 또는 음택(陰宅)을 불문하고 자손만대로 문무와 부귀가 끊이지 않을 터전으로 매김 된다.
예전에 필자가 간산기를 공개할 당시만 하더라도 시조의 신단(神壇)이 시사하는 바는 광김(光金)을 상징적으로 치부하였지만 지금은 신위(神位)를 모신 평범한 사당으로 변모했고, 진응수의위치가바뀌는등, 너무 많은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사당의 좌향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을 놓고, 내명당의 물은 용호(龍虎)가 입을 맞추는 을진방(乙辰方)으로 파구(破口)되어 자생향(自生向)이다.
2) 면앙정과 송순의 묘
조선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었던 송순(1493-1582)이 고향마을인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뒷산 제월봉 언덕 위에 지은 정자다. 면앙정은 정자의 이름이면서 송순의 호이기도 하다. 면앙( 仰)이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대나무 숲으로 된 쾌 가파른 길을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제법 너른 평지가 나타나는데 그 언덕 끝에 정자가 서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 있으며, 주변의 모든 자연을 안아들이는 모습이다.
송순은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당시 김안로 일파가 세력을 잡자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그러다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나가 관직생활을 했는데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기도 했다. 관직을 은퇴한 그는 91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면앙정에 머물며 유유자적하는 가운데 많은 가사를 남겼다.
또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이 좋은 경치와 노학자를 찾아 이곳을 드나들며 시짓기를 배우고 즐겼다. 그야말로 호남 제일의 가사문화를 이루었던 곳이다.
정자 안에는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시,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백호 임제의 『면앙정부』, 석천 임언령이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30가지 좋은 경치를 노래한 『면앙정 삽십영』, 그리고 송순 자신의 『면앙정 삼언가』 등이 판각되어 걸려있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정극인의 『상춘가』와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로 평가되며, 정철의 『상춘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제월봉 정상쪽으로 100m정도가면 송순의 무덤이 있다.
3) 송강정
조선시대 시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의 행적이 어린 곳이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서인(西人)에 속했던 정철은 49세 되던 해인 선조17년(1584)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냈다. 그는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아가기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서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단가와 가사를 남겼다.
정철의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중종31년(1536)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령부 판관 정유침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이다. 맏누이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인 숙의로 입궐하고, 막내 누이가 왕의 종실인 계림군에게 출가하면서, 왕실과의 혼인으로 집안이 새로이 활기를 찾으며 펴나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왕자들과 어울려 놀며 친교를 쌓았으며, 특히 훗날의 명종인 당시 경원대군과는 소꿉동무 사이로서, 정분이 매우 두터웠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어 자형인 계림군이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맏형은 광양으로 유배되었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했으며,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에서 풀러났다.
명종 2년(1547)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가 집안에 휘몰아쳐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 와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32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형은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으로 은거하였으며, 송강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명종 6년(1551) 아버지가 사면을 받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후 27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10년여 동안 이곳에서 송순·임억령·김윤제·김인후·양응정·기대승 등 당대 기라성 같은 학자·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다. 김성원·고경명 등과 교우하며 성장하였다.
명종 7년(1552) 김윤제의 주선으로 문화 유씨와 결혼하였으며, 신방은 현 창평면 해곡리 와송당(유종헌가옥)에 차렸다.
4) 담양 금성산성(金城山城)
전남 담양군 용면 도림리 일원에 있다.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알려진 곳으로 이곳에서 보면 담양일대의 산세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해발 603m의 산성산을 비롯한 산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여 돌을 다듬어 쌓은 석성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다.
우리나라 옛 도시들은 대개 평지성과 산성을 두고 있었다. 평시에는 평지인 읍성에서 지내다가 전시에는 산성으로 옮겨 구원군이 올 때까지 장기간 농성을 하며 버틴다. 고구려의 졸본성(평지)과 오녀산성(산성), 국내성(평지)과 환도산성(산성), 평양성(평지)과 대성산성(산성), 조선의 경우 한양성(평지)과 북한산성(산성) 등 도읍이 그랬던 것처럼 각 지방의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산성에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오랫동안 버티려면 이 또한 사람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터여야 한다. 산성의 입지와 지리적 특성을 살피는 것도 풍수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금성산성은 외성, 내성, 옹성, 망대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성안에는 사찰, 민가. 우물, 관아 및 군사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어 산성으로는 그 위용이 대단했다고 한다. 총길이 7,345m(외성 6,486m + 내성 859m), 면적은 약36만평 정도라고 한다.
5) 담양읍 관방제 숲
담양은 깨끗한 숲과 물, 그리고 맑은 공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도시경쟁력을 키우려는 ‘생태도시’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앞으로 풍수가 보다 크게 발전하려면 오늘날 도시의 큰 문제점인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논리를 빨리 개발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경제발전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도시개발은 오늘날 도시를 연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두다. 이는 따지고 보면 풍수의 논리다. 다시 풍수가 시대의 요구에 적극 참여할 수 있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때를 즈음하여 생태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담양읍내를 돌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담양읍내 약2km의 담양천 둑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음나무, 개서어나무 등이 아름드리나무가 거목이 되어 좋은 숲을 이루고 있다. 담양천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약300년 전부터 조성된 것으로 홍수로부터 둑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휴식공간으로 구실을 하고 있다. 관방제란 관에서 관비를 들여서 쌓은 둑이라는 뜻이다. 천변 공터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죽물시장이 들어서있다. 담양과 대나무는 불가분의 관계로 이를 산업화하여 도시경쟁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4) 명옥헌(鳴玉軒)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있으며 게명당(해복혈)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의 정원으로, 고서 네거리를 지나 창평 쪽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명옥헌정원입구’라고 쓰인 비석이 서있고, 그 옆의 샛길로 접어들어 언덕을 하나 넘으면 네모진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옥헌 정원의 중심을 이루는 연못이다.
못의 크기는 남북 40m 안팎, 동서가 20m 가량되는 방지(方池)로서 한가운데에 둥근 섬 하나를 쌓아놓았고 주위에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명옥헌은 못 남쪽에 위치한 언덕 아래 못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서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을 꾸며놓았다. 건물 동편에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을 끌어들여 건물 위에 또 하나의 방지를 꾸며놓았다. 모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된 섬이 있고 못 밑에는 ㄱ 자형으로 열을 지어 배롱나무를 심어놓았다.
이 정원은 오희도(吳希道)가 외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피하여 조용히 지내기 위하여 집 옆에 ‘망재’하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틈틈이 장계골에서 자연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평소 자연을 즐기던 호봉산(瓠峯山) 기슭의 계류가에 터를 잡아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에 못을 파 꽃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날 전하는 명옥헌 정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정철(鄭澈)의 넷째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명옥헌기 鳴玉軒記〉가 전하고 있으며, 계류가 바위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하는 '명옥헌 계유(鳴玉軒 癸酉)'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명옥헌 뒤 언덕에는 1825년에 창건되고 1868년에 철폐된 도장사(道藏祠) 터가 있는데, 현재 명옥헌에는 명옥헌이라 새겨진 현판은 없어졌고 도장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6) 식영정(息影亭)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7) 소쇄원(瀟灑園)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사람 창암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양산보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창암촌에서 태어나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가서 조광조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현량과(대사헌으로 있던 조광조가 신진 사류를 등용하고자 실시했던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그해 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스승을 따라 능주로 갔던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때부터 55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의 자연에 묻혀 처사(處士)로 지냈다.
소쇄원(瀟灑園)은 강이름 소, 씻을 쇄자로 물이 맑고 깊은 곳에서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은 폭포와 소를 만들며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른 후 대숲으로 빠져나가 창계천으로 합류한다. 멀리 남쪽 무등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은 소쇄원은 장원봉과 까치봉을 뒤로 하고 있으며 여기서 내려온 맥을 받고 있다. 이 정원을 이룰 당시 창암촌은 제주양씨들의 씨족마을이었으니 소쇄원은 후원(後園)적 성격을 띠었다.
8) 충장사
충장사는 무등산이 낳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우로 1975년에 세워졌다. 김덕령 장군은 광주시 충효동에서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김붕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글을 배워 장성하면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하였다. 1592년(宣祖25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兄)덕홍(德弘)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였다. 이 때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이 이끈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장군은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 성현감 이귀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 좌랑의 벼슬을 받았다.
1593년 담양지방에서 의병5,000여명을 이끌고 출정하니 나라에서는 장군을 선전관으로 임명 하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내렸다. 1594년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진해, 고성에서 왜군을 방어했으며, 장문포 싸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공을 세우니, 선조로부터 충용장이란 군호를 받았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던 중 모함으로 투옥돼 갖은 고문 끝에 그 해 9월 15일 29세 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661년(헌종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판서에 가증, 영조때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1788년 정조 대왕은 장군께 충장공(忠將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忠孝里)로 바꾸도록 하였다.
지금의 사우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2월 건립되었다. 충장사의 사우배치를 보면 본당인 충장사와 익호문,충용문 그리고 충장공의 수의와 관을 보관하고 있는 유물관 등이 있고, 150여평의 연못과 관리사무소 등이 한국 고유의 전통양식과 정감을 살려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장군의 의상은 중요민속자료 제111호 로 지정되었다.
9) 이회창 총재 외증조부 음택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
봉산면 와우리 앞, 영산강 변에는 현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의 모친인 김사순(金四純)여사의 조부인 김용현(金庸炫)이 영면하는 민묘가 있다.
이곳 '와우리' 는 도선국사 결록에 나오는 와우형의 명당 터로 적시한 유명한 바로 그 동네다.
사람 인자(人字)가 세 겹으로 겹쳐 보인다하여 명명된 담양의 유명한 삼인산(三人山)을 안산(案山)으로 삼고, 명당 좌측에서 영산강과 합수(合水)하는 중암천이 금성수(金星水)로 환포(環抱)하여 돌아나가는 길형(吉形)의 지세를 이루는 명당이다.
이총재의 어머니(김사순)는 이곳에서 출생하여 경기여고를 졸업한 엘리트이고, 외할아버지인 김재희씨는창평면장을지낸만석꾼이다. 또한 이총재의 외삼촌 3명은 헌정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3형제 국회의원' 을 지낸 명문 집안이다. 큰외삼촌인 김홍용과둘째김문용은 2대 민의원을 지냈고, 셋째 김성용은유정회를거친 3선 의원으로 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총재의 큰 이모인 김삼순씨는일본홋가이도제대를졸업한우리나라최초의여성농학박사이고, 이모부 강세형씨는 3대 국회에서 재경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증손(이총재 외사촌) 중에도 공군통신감, 의학 박사, 증권사 사장 등이 배출되는 등, 이곳 묘 바람의 영향이란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후손들의 편의를 위하여 묘역 진입로 공사를 하면서, 주차장을 확보할 요량으로, 묘소 앞 전순(氈脣)을 대대적으로 잘라내고 석축(石築)을 쌓았는데, 얼마 안되어, 후손 세 명이 바로 저 세상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과연 묘소 전순의 영향 때문일까? 조상의 음택과 인간사의 고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곳 현장에서 토론해 보고자 한다.
이곳 묘소는 급하게 떨어지는 사맥지(斜脈地)에 조성되어 마치 나방이 벽에 붙은 것 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음택이다. 즉, 형기법(形氣法)과는 차이를 보이는 장법이다.
상석은 사좌해향(巳坐亥向)으로 기록되어, 우선수(右旋水), 신술파(辛戌破)의 국세가 되어 자생향(自生向)을 놓았다. 그러나 현재의 봉분에서 측정하면 병좌임향(丙坐壬向)에 격침된다.
나주시
1) 당대 발복지로 유명한 금화 서상록 선생 부모 및 조부모 묘
금화 서상록 선생(1910∼1999)은 효성이 지극하고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조의 유택을 잘 모셔야 겠다는 일념아래 15세의 어린 나이로 지관에게 통사정을 하여 조부를 손수 지게에 지고 금성산 상봉 부근에 이장한후 일본을 건너가 전기와, 방직사업으로 큰 부를 쌓아 고향인 나주에 금화장학회를 설립 인재 양성은 물론 각종 공익사업에 기여한 바가 크고 묘지 주변을 조경수로 잘 단장하여 지역민 에게 아늑한 휴식처인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부모묘는 나주의 주산인 금성산 아래에 있으며 당대 발복지인 조부 묘는 금성산 상봉 바로 아래 회룡고조혈로 군부대 내에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는 않다
2) 김해김씨 김수연(金壽延)묘 및 나주 나씨 시조묘
조선 단종때 제주목사로 부임해 가던 김수연이 이 마을을 지나면서 명당으로 점지해놓은 후 제주에서 활동하던 김수연이 죽자 시신을 서울로 운반 하던중 이 마을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자 목사의 수행원 이었던 通人 金九龍이 이곳에 시신을 안장토록 했다, 그후 이 마을은 김구용 마을로 부르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구렁으로 변형되어 불리운다,
1986년 당시 동신대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토목공사중에 비석을 발견하므로서 5백여년 전부터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된 자리로 김수연의 큰아들이 好人이 목사를 지냈고 손자 世楨이 판관을 증손자 金孝良이 군수를 지냈다 묘는 나주시 대호동 기동마을 동신대학교 부지내에 있다
3) 전 행자부 장관 최인기 생가
전라북도. 충청남도.부지사를 거처 광주광역시장, 전라남도지사를 비롯하여 농림수산부장관. 행정자치부장관을 지낸후에 여수대. 대불대. 호남대총장을 역임하고 이번 17대 총선에서 전라도에서는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당선된 최인기씨 생가는 나주시 송월동에 있으며 현재 장형인 최석기 씨(고려원인삼주식회사 회장)의 소유이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8호로 나주지역 상류 주택의 구조가 잘 나타나 있는 전통가옥이다
이집은 구한말 참봉을 지낸 최승환이 1905년 건립한 대표적인 민가건축의 하나로 포근하고 아늑한 맛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나주나씨 시조묘도 함께 답사할 예정임
4)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 회장 조부묘
택시 1대로 광주여객에서 광주고속으로, 금호타이어로, 아시아나항공까지 운수사업으로 특출한 금호문화재단의 발복지인 박인천 선생 조부묘는 나주시 공산면 송죽리 큰산골에 있으며 주위에 석맥으로 쌓여져 있다
5) 벌명당 으로 유명한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의 묘
벌 명당으로 유명한 전설이 있는 반남박씨 벌 명당은 고을의 호장을 지낸 박응주의 묘로 평소 인품이 너그럽고 덕망이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자 아들 박의(朴宜)는 지관을 찿아가 부친 묘 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지관 역시 평소 박응주로부터 은덕을 입어온 터라 좋은 자리를 잡아주기 위해 영산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미산(紫微山)으로 올라가 일대의 산세를 살피고 나서는 너무 좋은 명당을 발견하고 깜짝놀라 자미산 맟은편 지금의 묘가있는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로 발 걸음을 옮겼으나 천기를 누설한데서 오는 화를 입을까봐 안절부절 하며 혈에서 10m 정도 위쪽에다 자리를 잡아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 의는 지관의 태도가 하도 이상하여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 지관의 뒤를 밟았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상을 물린 지관은 아내에게 “오늘 박호장 묘자리를 보다가 기막힌 명당을 발견 했는데 천기를 누설한데서 오는 화를 입을까 봐 명당 위쪽으로 묘를 쓰라고 했소” 그러자 아내는 “평소 그 어른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명당을 가르처 줘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였듣고 그제서야 박의는 지관이 말못한 사정을 알아내고 다음날 박의는 전날 지관이 잡아준 자리보다 10여미터 아래에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내려 갔다 장례일을 도와 주려고 뒤늧게 나타난 지관은 어제 본 그 명당을 파고있어 깜짝놀라 까닭을 물으니 그 자리는 아껴두고 더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고 이곳을 파고 있다 고 말하자 지관은 하는수 없이 간절한 부탁을 하나하고 자리를 떴다 “이곳에 묘를 쓰되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땅을 파시오” 그러나 일은 지관의 부탁대로 되지 못하였다 파 내려가던 땅 속을 몇차례 더 파는 순간 새 만한 큰 벌들이 튀어나와 집에 도착하지 못한 지관에게 달려들어 쏘아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사연으로 그 명당은 벌명당 이라 불리우고 반남박씨로 일컬어지는 그의 후손들은 발복하기 시작 3대인 여말(麗末)의 학자 박상충을 비롯 조선조 5백년 동안 정승 7명과 2백17명의 문과 급제자 를 배출하고 조선조에 정승을 지낸 박씨가 8명 뿐인데 이 가운데 반남 박씨가 7명이나 차지 했다고 한다
반남박씨 자손들은 지관이 자기 집으로 가기위해 넘었던 고갯마루에 봉현(蜂峴)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오늘 날에도 지관의 넋을 기리고 있다
화순군
1)앵무(鸚鵡)명당의 다라실 梁씨 묘
화순군 화순읍 앵남(鸚南)리 종괘산 아래에 있다. 꾀꼬리의 집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혈명이며 다라실은 한자말
월곡(月谷)의 본디 우리말로 달이 뜨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 행정명 도곡면 월곡리를 가리키는데 현지 향민들
은 지금도 월곡리보다는 다라실이라고 부르기를 즐긴다. 제주 양씨(濟州梁氏) 집성촌인 이 마을은 다라실 동네
에 정착 하면서 생긴 성씨이며 주위에 3.1운동 33인 민족대표중의 한 사람으로 호남인으로는 유일하게 독립선
언 민족대표로 참가한 지강 양한묵 선생 묘가 있다
2) 천녀등공형(天女登空形)의 능성구씨 구민담 묘
화순군 한천면 정리(정승동) 능성구씨(綾城具氏) 2대조 구민첨(具民膽) 묘(고려시대 平章事)로 국사봉(國師峯)
에서 뻗어온 산맥이 12마디를 이루어 내려오다 멈춘 현침혈(縣針穴)로 천년등공형(天女登空形)으로 부른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곳 이라는뜻의 이 자리는 전남 8대명당으로 불리워 지고 있으며 주변의 소나무가 묘를
향해 굽은 모습이 마치 군사들이 장군을 향해 예의를 표하는 모습같다하여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 이라고도
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한 명혈을 지니고 있어 풍수연구가들의 빌길을 모으고 있는곳 이기도 하다
능성(綾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綾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백제시대(百濟詩代)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
郡) 또는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능성현
(能聲縣)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綾州面)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었다.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진(晋)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여,「동사보유(東史補遺)
」와「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
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 潛)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
(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능성구씨세보(綾城具氏世譜)」에는 그가 고려조에서 벼슬이 벽상공신 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 검교상
장군(檢校上將軍)에 이르렀고, 전남 능성현(能聲縣 : 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隱居)하던 주 잠(朱 潛)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綾城)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구씨(具氏)의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정동마을은 고려때 능성구씨 구민담(具民膽)이 평장사를 지냈는데 그의 묘가 이곳에 봉안된 이후 그의 관명을
따라 정승굴이라 하였다가 후에 정승굴이 정동(政洞)으로 간략화 되었다.
3) 괘등혈(掛燈穴)의 양학포 선생묘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 괘등혈 명당 으로 청룡 본신 안산인 천마사가 일품이며 결인처와 입수가 확연하고 용
이 틀면서내려온 모습은 어디 에서도 보기 어려운 자리로 우 백호 끝이 좀 허한 결점은 있다
학포 양팽손은 (梁彭孫.1480-1545)송흠선생의 문인으로 호남선비중 거봉이라 할 수 있다. 학포선생의글 속에
스며있는 천인성명의 원리는 인간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도덕 규범이며 인,의, 예의 도리와 성의정심의 가르
침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정신적 지주와 귀감이 아닐수 없다. 학포선생은 능성현에서 태어나 5세부터 남다르게
출중하였다. 어린나이에 소과, 대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영관에도 올랐다. 송흠을 스승으로 섬겨 천리성
명의 원리를 터득하였으며 조광조와 같은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서로 도의지교를 맺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정암 조광조가 당파싸움에 밀려 능성에 유배될 때 임금에게 간곡한 상소를 올려 간절히 애원하였으나 이 때문
에 파면 당하고 고향인 능성으로 내려왔다. 기묘사화 이후 학포는 쌍봉마을에 학포당을 짓고 구도하는 마음으
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채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그림은 우리나라 남종화의 태두로일컬어
지고 있으며 도의를 숭상하고 의리를 지킨 분이었다하여 의리에 사나이 문정공 양팽손으로 불리운다.
학포선생의 한시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그림자 그림 같고
강을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온 돛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거두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구경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 할 수 있고
여울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4) 화순 쌍봉사
우리나라 최고의 목탑과 부도를 간직한 쌍봉사는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마을에 있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자신의 도호(道號)를 따 쌍봉사라 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
그후 고려 시대인 1031년(문종 35) 혜조국사(慧照國師)가, 공민왕 때는 관찰사 김방(金倣)이 중건하였고, 임진
왜란 때 폐사된 것을 1628년(인조 6년) 탑지(塔址) 위에 현재의 3층 대웅전을 중건한 것을 비롯, 1667년(현종
8)·1724년(경종 4)에 계속 중수하였다.
사찰 경내에는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보물 제163호인 쌍봉사 대웅전, 보물 제170호
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浮
屠)로, 그 시대의 부도 중 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은 평면이 네모 반듯한 3층 전각으로 목조탑
파(木造塔婆)의 형식인 희귀한 건축물이다. 철감선사탑비는 귀부(龜趺)와 이수(首)만 남은 무신비(無身碑)이다.
5) 세계 3보림의 가지산 보림사
세계 3보림의 하나 보림사는 신라말 원표대사(元表大師)가 인도에 계실때 신이한 기운이 삼한의 밖 아득히 먼곳으로부터 비쳐와 그 기운만을 바라보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오묘한 곳을 찾아내 자리를 잡으니 산세가 인도의 가지산, 중국의 가지산과 같아서 가지산이라 명하고 지어진 절이 보림사로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오듯 국보와 보물이 많이 있으며 가지산은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좋아 정상에서 둘러보면 금방 명산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림사는 유치면 남쪽 가지산 비자숲에 자리하고 있다. 보림사는 1천2백여년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절이다.
보조선사가 헌강왕의 뜻을 받들어 문을 연 가지산학파의 근본도량이다.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세계3보림의 하나다.
이 보림사는 용을 쫓아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이르러 터를 짚어보니 좋은 터가 있는데 못에 큰 용이 살아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꾀를 낸끝에 마을 사람들에 눈병이 돌게한 뒤 이 연못에 흙과 돌을 던지면 낫는다고 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돌과 흙을 던지니 용이 더이상 살수 없어 쫓겨갔고 그 자리에 보림사를 지었다 한다.
장성군
1) 울산김씨 발복지 여흥민씨 할머니 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명정 마을에 있다.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복부혈(覆釜穴)로 유명하다.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쳐 공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이다. 설총, 최치원, 고려의 회헌 안향, 포은 정몽주, 조선의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현석 박세채이다. 이중 호남출신은 유일하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 한 명으로 전남 장성 출신이다.
지금도 장성 사람들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서 김인후 선생뿐만 아니라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인 노사 기정진 선생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하서 선생은 도학의 정통을 이은 영수라 할 수 있으며 경기의 김안국, 조광조, 영남의 이언적, 이황, 조식 등이 같은 시대 사림의 영수였다. 하서 선생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고 호남 제일의 명문가로 알려진 울산 김씨의 번영은 하서의 5대조모인 여흥민씨 할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씨 할머니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왕비인 원경왕후 민비와 사촌 형제가 되며, 울산김씨인 김온(金穩)과 혼인한다. 김온은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이조좌랑에 올랐으며 단양군사와 함양군사를 지냈다. 회군 때와 개국 때의 공으로 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 되어 흥려군(興麗君)이라고 불리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 때는 양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외척을 배척할 때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옥사에 연루시켜 죽게 하였다. 이때 김온도 외척으로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자 민씨 할머니는 아들3형제를 데리고 한양을 떠나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 마을로 피신하였다. 이곳에 터를 잡은 민씨 할머니는 아들3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큰아들 김달근(金達根)은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을 지냈고, 손자 김률(金律)은 문과에 급제 군수를 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둘째 아들 김달원(金達源)의 고손이다. 그리고 죽어서도 이곳 복부혈 명당에 묻혀 그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도록 해주었다.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세운 인촌 김성수 선생도 이분의 후손이다.
2)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표 김효석(金孝錫) 선영 음택
장성군 삼계면 수산리
본관이 광산(光山)인 김효석은 미국 조지아대학교대학원 경영학 박사를 수료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였으며, 16,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현재는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이곳 선영은 호남정맥(영산기맥)이 일군 변화 생동하는 후룡(後龍)에 기대고, 정탐랑(正貪狼)을 조산으로 둔 국세가 특격이다. 묘역에 들어서면 사방의 사신사(四神砂)가 완벽하게 관쇄(關鎖)하면서 풍객(風客)의 발길을 꽁꽁묶는다. 묘역에는 증조부모, 조부모의 묘소가 상하(上下)로 조성되었고, 좌향은 갑좌경향(甲坐庚向)에 좌선수(左旋水) 신술파(辛戌破)로 자왕향(自旺向)에 의지한다
3) 송흠(宋欽) 음택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천방)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흠지(欽之)다. 호는 지지당(知止堂), 관수정(觀水亭)이고, 시호는 효헌(孝憲)이며,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9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있다가 연산군의 학정으로 은퇴,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516년(중종 11)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복직, 박사(博士), 지평(持平) 등 관직을 두루 지냈다.
1528년에 담양부사(潭陽府使)와 1531년에 장흥부사(長興府使)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옮겼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모시고자 왕의 특명에 의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101세의 장수(長壽)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7차례나 상을 받았다. 1538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병조판서, 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1543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겸 경연지사(經筵知事)에 이르렀으며,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배향되었다.
이곳은 천전과협(穿田過峽)으로 진행하던 용맥이 비룡상천(飛龍上天)으로 올라와 돌장(突場)의 묘역을 일구고, 간좌곤향(艮坐坤向)을 놓았다. 특이한 것은 선생의 정실(正室)부인은 인근의 다른 용맥을 의지하는데 반해, 첩실(妾室)인 평양댁이 이곳 묘역에 함께 안장되었다.
4)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음택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선생은 국풍(國風) 박상의(朴尙義)의 작은 조부(祖父)로, 백비(白碑)정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본관은 밀양(密陽), 또는 밀성(密城)이다. 자(字)는 군수(君遂)이고 시호는 정혜(貞惠)다. 김개(金漑)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었고,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광주향교(廣州鄕校)의 훈도를 지냈다. 이듬해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전적, 예조좌랑, 충청도도사를 지내고, 1522년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다. 15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진하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호조참판 , 공조참판 등에 이어,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 예조참판를 역임하고, 1546년(명종 1) 춘추관동지사(同知事)로서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와 형조판서, 우참찬을 지냈으며, 이듬해 좌참찬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전직,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년 우참찬에 재임명, 이듬해 한성부판윤(判尹), 중추부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주세붕(周世鵬)과 깊이 교유하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선생의 묘소 앞의 비는 묘비임이 분명하나 아무리 보아도 글자 한 자 없는 백비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자연석이 아니다. 어느 석공의 손길에 잘 다듬어진 비석은 부안 지방에서만 출토된다는 최상급의 활석이다. 그런데 왜 글자 한 자 없는 백비로 세워 두었을까? 그것은 조선의 명종과 깊은 사연을 담은 비석이기 때문이다.
호미산하에 조성된 묘역에는 선생의 형이며, 명풍 박상의 조부인 박수온(朴守溫) 묘와 선생의 증조, 조부, 부모, 손자 등의 묘소가 동일묘역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이곳 묘역의 중출룡(中出龍)에는 풍수의 교과서적인 기룡혈(騎龍穴)을 점한 손자의 묘가 수혈(首穴)을 점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의 묘소는 축좌미향(丑坐未向)에 우선수(右旋水) 병오파(丙午破)다.
5) 하서 김인후(金麟厚) 음택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본관은 울산이고, 자(字)는 후지(厚之)다. 호는 하서(河西), 담재(澹齋)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 정통하였으며, 동국 18현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장성군 명정리의 복부혈(伏釜穴)로 유명한 민씨 할머니가 선생의 5대조 직계조모다.
6) 백우당(栢友堂) 박상의(朴尙義) 음택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장성 호수를 바라보고 소점한 조선의 국풍(國風) 박상의와 그의 선친(先親)인 박사순(朴士珣)의 음택이 과연 명풍(名風)이 점한 명당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곳은 호수란 장애물이 풍객의 발길을 가로막아 부득이 배를 타고 들어가야 답사를 할 수 있다.
이곳에 잠든 박상의는 선조와 광해군 때에 국풍(國風)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천문에도 밝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예언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봉훈랑행 관상감교수가 되었다가 사재감 주부에 올랐으며, 광해군 때 절충장군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연 속으로 종적을 감춘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우인 눌헌(訥軒) 박상지(朴尙智)도 군자감봉사와 예빈시제검을 지냈으며, 성리철학 사서와 심경, 근사록 등의 글을 연구하여 사우들의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박상의는 이곳 장성지방에서 ‘국풍(國風)’ 보다는 ‘박주부(朴主簿)’ 로 더 알려지는 바람에 그의 묘소가 베일 속에 감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의가 이곳에 선친묘소를 먼저 점하고, 자신의 사후지지(死後之地)로 낙점하면서, 호수가 조성(영산강 개발사업으로 1976년 10월 담수)될 것을 예지(豫知)하여, 횡룡(橫龍)의 상정처(上停處)에 묘역을 정한 것은 아닐까? 그의 묘소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면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묘소에는 어정쩡한 표정의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망주석(望柱石) 한 쌍이 이방인을 반기며, 좌향은 곤좌간향(坤坐艮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