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첫째 주일(20230903)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
제가 돌에 글자나 문양을 새기는 전각을 취미생활로 한 적이 있습니다. 전각 작품이 하나 완성되기까지 거쳐야할 작업 과정이 많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는 저마다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 돌이 문제가 아니라
몇 년 전 전각재료가 되는 돌을 샀는데 좀 단단한 돌을 샀습니다. 돌이 무르면 문양이나 글자를 새기기는 쉽지만, 세밀한 작업을 하거나 완성된 작품을 오래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돌에 작업을 할 때는 연장을 밀어 필요한 힘을 공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단단한 돌에 작업을 하던 어느 날은 평소보다 더 힘이 들었습니다. ‘돌이 엄청나게 단단하군, 이래서는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겠는데....’ 그러다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 문제가 아니라 전각도의 날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 이 정도면 괜찮을까?
손에 쥐고 있던 전각도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날이 뭉특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을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전각도를 연마하려면 인사동에 나가야 하는데, 하던 일을 멈추고 싶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연마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잣말로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깜짝 놀라 다시 내게 물었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이 정도면 괜찮다고.”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나는 너를 연마하고 싶은데, 너는 아직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하지.” ‘아직 충분해, 아직 괜찮아, 이 정도면 괜찮아.’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뭉툭해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연마하기는커녕 ‘아직 충분해, 아직 괜찮아, 이 정도면 괜찮아’하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요?
■ 무딘 마음으로 살면
그 일이 있은 후, 성경을 읽다가 전도서 10장 10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도끼가 무디었는데도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이 더 든다. 그러나 지혜는 성공을 거두는 데 유익하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4장에서도 마음이 무뎌진 상태에 대해서 ‘허망한 생각’에 빠진 것이라면서, 지각이 어두워졌고, 마음은 완고하고, 감각이 없다고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딘 마음으로 살면 삶이 굉장히 힘들고 영혼도 피곤해 집니다. 낙심과 체념, 근심과 걱정에 부대끼며 살아가보면 마음은 더욱 더 무뎌집니다. 그러면 “사는 게 너무 힘들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사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무뎌진 것입니다. ‘도끼가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이 더 든다.’는 전도서의 가르침처럼 마음을 방치하고 다듬지 않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연장이 너무 무뎌진 탓입니다.
■ 무딘 연장 vs 연마된 연장
무딘 연장으로 돌을 깎으면 돌에 대한 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돌에게는 비극입니다. 한번 쪼여 떨어진 돌조각은 다시 복원될 수도 없고, 한 번 전각도가 엇나가게 되면 이전에 작업했던 것들도 무효가 되고, 심지어는 그 돌을 버려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연마된 전각도로 전각을 하면, 돌에 전각도를 댈 때마다 돌의 특성을 느낄 수 있고, 어느 정도 힘을 줘야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돌도 결이 있는데 그 결을 따라 전각을 하면 돌이 깎여 나가는 소리도 경쾌하고 마치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는 것처럼 힘도 들지 않습니다.
■ 삶이 뭉툭해지면
우리 삶의 법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뭉툭한 가슴, 무딘 마음으로 살면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정작 마음을 싸야하는 일은 등한시하고, 내버려 두어도 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수가 있습니다. 삶의 매순간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영적으로도 깨어 있지 못하니 주어진 지금 여기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인데,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니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 무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무정하고 냉혹한 세상을 살다보면 뭉툭해지고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살다 보면 실패하거나 실망도 하고,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시련과 문제에 봉착하기도 하고, 무거운 삶의 짐들과 실망들이 반복되다보면 우리의 마음도 뭉툭해지고 무뎌지는 것입니다. 무뎌진다는 것은 마음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고, 마음의 힘이 약햐지면 소명감도 잃고, 소명감을 잃으면 내적인 기쁨도 사라집니다. 돌을 상대로 일하다가 점점 무뎌지는 연장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살다 보면 무뎌지고, 무뎌진 만큼 힘들고, 지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연장은 무뎌질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무뎌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무뎌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의 아니라, 세상에서 살다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뎌진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 잠시 멈춤
문제는 무뎌진 것이 아니라, 무뎌진 것을 벼리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이 정도면 괜찮아’하면서 그냥 그 무뎌진 마음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연장을 벼리려면 잠시 작업을 멈춰야 합니다. 어떤 때는 연마를 오래 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숯돌에 몇 번 슥슥 문질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빗대면, 어떤 대는 작정하고 피정을 하거나 수련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몇 분 동안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마음을 연마할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잘 연마된 연장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듯이, 잘 벼려진 마음이 그의 삶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연장이 무뎌졌는데도 연마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가 빠지게 됩니다. 작은 쇳조각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빠진 전각도는 돌에 흠집을 냅니다. 날을 한 번 댈 때마다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 빠진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우리가 만나는 것마다 상처를 입힙니다. 독선적인 태도, 인색함, 교만함, 비뚤어짐, 온갖 걱정과 근심과 불평과 불만...이런 것은 마음이 무뎌지고 이가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이 빠진 마음은 이 빠진 전각도가 돌에 상처를 내듯, 세상에 상처를 내고,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까지도 망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빠진 마음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입니다.
■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벼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벼리는 일은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칼을 연마할 때는 적절한 압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벼려야 합니다. 박인호 장로님이 식당의 칼을 아주 잘 벼리시는데 저는 어릴 적 낫을 갈아본 적은 있는데 칼을 잘 벼리지 못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무뎌진 전각도를 연마하려고 작은 연마용 기계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험이 없다보니까 전각도를 과도하게 벼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아주 예리한데 금방 무뎌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너무 급하게 벼리면 사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갑자기 ‘불 받았다’고 하는데, 냄비같이 끓어오르다 금방 식습니다. 열정적인 신앙은 냄비처럼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뚝배기처럼 천천히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갑니다.
■ 메타노이아
그렇다면 마음을 벼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뭉툭해진 마음을 연마하는 것, 음정이 어긋난 악기를 조율하는 것, 이것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참회, 회개,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나는 ‘생각하다noein’과 ‘변화하여meta’라는 말의 합성어로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메타노이아는 회개로 번역되었는데 ‘돌아보아 고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만고, 돌아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까지 나아가야 회개, 메타노이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돌이킴이요, 직접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날이 무뎌졌다고 연장 자체가 가치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무뎌진 날은 오히려 지금까지 연장이 힘든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연마할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성서가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비난하고 낙인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될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 새 사람을 입으라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거친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 살다보니 지각도 어두워지고, 마음도 완고해 졌고, 감각도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난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하는 권면의 말씀은 ‘지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자 한다면 능히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 그것이 회개요, 메타노니아요, 참회요, 마음을 벼리는 일입니다. 창조절에 인내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벼리셔서 새 사람 입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주님, 광야와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이 무뎌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벼리게 하시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하옵소서. 창조절에 우리도 새롭게 창조되어 주님의 쓸모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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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문은 마틴 슐레스케의 <바이올린과 순례자>를 콜라보한 형태의 설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