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마닐라의 아얄라 박물관을 들어서며
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고
필리피나가 내게 말했을 때
역사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무릎 꺾인 시대의 황토벌 위에
긴 채찍 맞으며 서 있는 우리들,
머리를 깎이고
신발을 빼앗긴 사람들이
양순하게 허리를 낮춘 지점에서
아시아의 황혼이
수난의 비단길과 포옹하는 지점에서
허허허허...... 하느님의 외로움이 불타고
하하하하......
우상들의 경전이 경전이 번개치는 지점에서
나는 피묻은 탄피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콸라룸푸르의 국립박물관을 들어서며
역사는 흐른다,고 말레이시안이 내게 말했을 때
제국주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잉글랜드 해적선 강탈 앞에
모자를 벗어 든 사람들,
옆구리를 찔리고
가랭이를 벌린 여자들이
불타는 노을을 향하여 울부짖는 지점에서
아아아아...... 별들이 불을 끄고
우우우우...... 숲들이 쓰러지는 지점에서
나는 칼 맞고 쓰러진 땅의
피묻은 깃발 하나를 심장에 품었다
자카르타 메르데카 광장을 들어서며
당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고
인도네시안이 내게 말했을 때
망각의 신경마다 불이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선 철퇴 앞에
땅문서를 헌납하는 사람들,
미합중국의 대포 앞에
백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골 깊은 슬픔을 접어 종이새를 날리는 지점에서
일본제국주의 사무라이 장칼 아래
어린이를 사열하는 지점에서
아아 제 터를 빼앗긴 사람들이
두 손을 번쩍 든 지점에서
그러나 그러나
메르데카......
데르데가...... 합창이 지축을 흔드는 지점에서
나는 아시안의 피눈물로 얼룩진
독립만세 국기를 혈관에 실었다
당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당한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역사는 흐른다, 흐른다,고
나는 서울을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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