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은 반야의 핵심인 공을 설명하면서 공에는 5온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위 내용을 보면서도 별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색은 보이고 느끼다시피 엄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아마 공이라 세계에서 보면 색은 없는 게 되는가 보다 하고..
지금 나와는 관계가 없는 별개의 세계로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은 솔직한 현실 인정으로 잘못만은 아니나..
지금 여기서 색은 사실 없는 것이라고 알아채야 하기에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불자라면 어째서 지금 여기서 색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보면..
<잡아함경> 첫번 째 경인 <1.1 무상경>을 보면..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正觀]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受, 느낌)·상(想, 이미지)·행(行, 의지)·식(識, 인식)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잡아함경>은 석가세존께서 직접 설한 내용 가운데 짧은 길이의 설법을 수집정리하여 묶어 논 경이다.
그와 같이 석가세존의 진설을 수집정리하여 지금에 이르는 것은 북방의 <아함경>과 남방의 <니까야>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테라바다(Theravada, 상좌부)라 불리는 남방 불교는 스스로 석존의 적자라 자처하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설만을 수집정리한 경전만을 인정하고 있기에
우리가 가까이 하고 있는 <반야심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무시하고 있다.
[관셈 근본교설]에서는 상좌부에서 주장하듯
대승불교는 석가세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를 <반야심경>을 퉁해 함께 살펴보려는 것이기에..
아무래도 남방[테라바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언급하게 된다.
<잡. 1. 무상경>을 보면..
색은 무상하다 하시면서 그리고 수상행식 또한 무상하다고 하신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 <반야심경>에 나오니.. "색즉시공.. 수상행식 역부여시" 가 바로 그것이다.
색이 공이듯 수상행식 모두 공이다 라는 것.
그러니 색만 공이다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여기서 느끼고 있는 이 감정.. 이것 역시 공이요[수즉시공],
대상을 보고 생긴 이미지 역시 공이고[상즉시공],
대상을 통해 일어난 의지 역시 공[행즉시공],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고 때로는 선정에 든 그 때 마음 역시 공[식즉시공]임을 보아야 한다.
<잡아함경> 첫 번째 경인 <1. 무상경> 내용을 잘 알고 있다면..
<심경>에 나오는 색 등 5온이 공임을 이해할 수 있지 아니한가?^^
색이 무상하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태어나 머물다 언젠가는 멸한다는 것.
이라고 남방 불교에서는 이해한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남방불교뿐 아니라 누구나 다 인정하는 당연한 게 아닌가?.
이제부터 석가모니를 부처님이라 불리는 이유가 나오는 데..
부처님이란 세상[중생]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해와 다른 점을 갖고 있기에 부처님이라 하듯..
우리 역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사람을 포함한 일체 존재하는 것은 무상하게 변하기 때문에.. 인생무상이라 하며 한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과 의식은 생멸을 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일반인들은 그런 몸과 의식의 주인을 [나]라고 하며, 그런 [나]가 존재하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는데..
그런 [나]는 없다고 가르치는 게 남방불교.
하여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을 수행으로 깨치며?..
아라한이요, 해탈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잡. 33. 비아경>에 나온다.
33. 비아경(非我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나[我]가 아니다. 만일 색이 나라면 응당 색에서 병이나 괴로움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
또한 색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색에는 나가 없기 때문에 색에는 병이 있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색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으니라.
<33. 비아경>을 보면..
색은 존재하지만 무상하게 변하니 병이 나기도 하고, 괴로움도 생긴다.
만일 색의 진정한 주인인 나가 있다면 병이 생기면 "야, 병아 사라져라!" 하고 명령하며 병은 군말 없이 사라질 것인데..
병이나 늙음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고로 나는 색이 아닐 뿐 아니라.. 색의 주인인 나는 없다[무아] 라고 하는 것.
그것 봐라. 나도 그렇게 이해했다고^^.
몸을 포함한 일체 존재는 무상하게 변하는 데..
일반인들은 무상하게 변하는 몸속에 또는 그 몸의 주인인 나가 있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본래 없는 것이므로.. 몸이 생로병사를 하건 어쨌건..
그것의 주인으로 알고 있는 나는 없다는 것을 깨치면 그게 열반이요.. 그게 불교 아닌가!^^
일단 보통 사람이라도.. 앞에서 설명한 정도는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색을 이해하고[심해탈]
할 수 있다면 수행을 통해 몸으로 무아를 깨치도록[혜해탈] 한다.
그런데..
석가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곳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보듯 관셈[관자재]보살님이시다.^^().
관셈보살님은 색(수상행식)은 존재가 아니라 공이라 하신다.
존재와 공은 무엇이 다르지?..
물은 존재한다. 물은 액체로 고유의 성질이 특성이 있다.
그런 물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생성된다.
물을 생성하는 수소나 산소 속에 물의 특성이 있나? 없다.
생각해 보자.
산소 입장에서 산소는 물이 아니다. 그리고 산소에 물의 특성이 있는 건가 아니면 없는 건가?
다시 말해 물이 분해되어 산소와 수소가 되면 물의 특성은 사라진다.
만일 물속에 있는 산소가 자각하여 스스로를 산소라고 알아채고 있다면..
산소 스스로는 물의 특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산소 또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그것을 분해하면..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무엇[존재]이라 할 수 없는 지점[불확정]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불확정 지점을 관셈은 '공'이라 하셨다.().
지금까지 말하고 있는 걸 정리하면..
남방불교에서는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몸은 존재하면서 특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데..
관셈은 몸의 특성은 물론 인정하지만.. 몸 또한 공으로 존재라 할 수 없다는 것.
그러기에 색은 공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라고 하신다.
이렇게 말하는 관셈을 보며 남방불교에서는 사도(邪道)라고 지금까지도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그러면 석가세존은 뭐라고 가르치셨을까요?^^.
* 5온.. 사람은 5감각기능을 가진 몸이 있어[색온],
그 감각기능으로 외부와 접촉해 느낌이 생긴다[수온],
느낌이 생기면 뇌에서 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상온],
이미지가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해 보려는 의지를 일으킨다[행온]
이처럼 감촉과 이미지와 의지를 통해 대상에 대한 판단이 생기면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식온]
* 불교 역사는 석가모니께서 세상에 법을 펼치신 이후 약 100여 년 간은 근본 불교 시대,
이후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어 경을 정리하고, 아비달마라 불리는 논서가 발달한 시대를 상좌부 불교 시대라 하는 데..
상좌부는 북방과 남방으로 구분되어 북방에서는 <아함경>이, 남방에서는 <니까야>를 수집 정리하여 지금에 전해지 게 된다.
기원전에서 후로 바뀌며 상좌부의 대중부는 대승 불교로 이어지는데..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대승경전이 나오게 된다.
대승불교는 남방 상좌부[테라바다]는 정통 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남방 불교에는 대승 경전이 아예 없고 오직 <니까야>만 부처님 진설로 인정하며 전하고 있다.
7세기가 지나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다 이슬람교가 휩쓸며 12세기경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진다.
18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시아에 전해지고 있던 불교를 스리랑카가 수입해(?) 경과 론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방불교는 스리랑카에서 법에 해당하는 경전, 동남아시아에서는 승에 해당하는 수행법이 발전하는 데..
이 모두는 근본 경전이라 하는 <니까야>를 근거로 한다.
한편 동 아시아에 불경이 들어올 때 대소승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전해져 한문으로 역경이 모두 일어나는 데..
아시다시피 동 아시아는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대승경전은 활발히 연구되며 전해져 왔으나
소위 소승 경전이라 불린 <아함경전>은 한문으로 번역되었을 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21세기 들어와 근본 불교의 중요성이 새로이 부각되어 근본 경전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마침 한문으로만 전해지고 있던 고려대장경 속의 <아함경>도 동국대 역경원에서 한글로 번역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함경> 내용의 80% 이상이 <니까야>와 같다고 하니..
소위 원음이라 불리는 팔리어 <니까야>를 바로 한글로 번역한 경이 주로 읽히고 <아함경>은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니까야>에는 전하지 않고 <아함경>에만 전하는 내용 가운데는..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이 [마음]임을 전하는 귀한 내용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