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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守錢奴)
돈을 지키는 노예라는 뜻으로, 돈을 모을 줄만 알아 한번 손에 들어간 것은 도무지 쓰지 않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守 : 지킬 수(宀/3)
錢 : 돈 전(金/8)
奴 : 종 노(女/2)
(유의어)
유재아귀(有財餓鬼)
출전 : 후한서(後漢書) 卷24 마원열전(馬援列傳)
수전(守錢)이란 ‘돈을 지킨다’는 뜻이고, 노(奴)는 ‘노예, 하인’이라는 뜻이다. 즉, 돈을 지키는 노예라는 말로, 돈을 모을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구두쇠, 노랭이, 자린고비라고도 한다.
유사한 뜻으로 불교에서 쓰이는 유재아귀(有財餓鬼)라는 성어가 있다. 이는 아귀(餓鬼)의 일종으로 제사 때 버린 음식을 주워 먹는 득기귀(得棄鬼), 거리에 버린 음식을 주워 먹는 득실귀(得失鬼), 야차(夜叉), 나찰(羅刹)같은 세력귀(勢力鬼)의 총칭이다.
재물이 있으면서 욕심이 많고, 인색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돈에 인색한 사람을 수전노(守錢奴)라고 한다. 수전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한(漢)나라의 마원(馬援)이다. 후한서(後漢書) 卷24 마원전(馬援傳)의 내용인즉 ‘무릇 부자로서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수전노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凡殖貨財産(범식화재산)
貴其能施賑也(귀기능시진야)
否則守錢虜耳(부칙수전로이)
마원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이상이 크고 활달하여 형들의 아낌을 받았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마원은 포부를 펼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것을 우려하여 형 황(況)의 곁을 떠나 국경 멀리에서 농축업에 종사해 보고 싶다고 했다.
형 황(況)은 “너는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다. 오랜 세월 근고(勤苦)를 쌓아야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수한 기능인은 경솔히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정히 농축업을 해보고 싶다면, 네 생각대로 해라.” 하고 허락했다.
마원이 집 떠날 준비를 하던 중에 형 황(況)이 죽었다. 마원은 계획을 중지하고 형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고 기년(朞年)의 복(服)을 입었다. 과부 형수를 어머니처럼 받들었고 언제나 정장을 하고서야 형수를 대했다.
그 후 마원은 군(郡)의 독우(督郵)가 되었다. 마원은 죄수를 호송하여 사명부(司命府)로 가다가, 그 죄인이 억울하게 중죄를 뒤집어쓰고 있음을 알고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제복을 벗어던지고 북방 국경지대로 가서 본래 마음에 두었던 농축업을 시작했다.
마원의 농축업은 근고(勤苦)의 보람으로 나날이 번창하여 몇 해 안 되어 소, 말, 양이 수천마리가 되었고, 겸하여 양곡 수십만 섬을 비축할 수 있었다.
마원의 인물됨을 안 인근 인사들은 마원과 친교 맺기를 원했고, 초야에 묻힌 국사(國士)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어느 날 마원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장부의 품은 뜻은 궁할수록 더욱 굳어지는 것이며 연륜은 쌓을수록 장대해진다. 내가 농사와 목축으로 이만한 부를 이룬 것은 일신의 향락이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다. 부를 쌓고도 이웃을 외면한다면 이는 한갓 수전노일 뿐이다. 이제는 어려운 이웃에 구호를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생활이 어려운 형들, 이웃, 그리고 가난한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왕망(王莽)의 말엽,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마원은 서주(西州) 외효(隗囂)의 초빙으로 수덕장군(綏德將軍)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광무제(光武帝)가 한(漢)나라를 중흥시키자 그를 받들어 일생을 이민족 정벌에 헌신했다.
다음은 마원이 무장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신념과 근엄성을 보여주는 명언들이다.
남아는 의당 황량한 국경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 그 시체가 말가죽에 싸야 돌아와 장사지내도록 되어야지, 어찌 한가로이 침상에 누워 아녀자의 간호를 받으며 죽기를 바란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듣는 것을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 같이 하여 귀로는 들을 수 있더라도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무리는 남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입에 올리기 좋아하고, 정치나 법제를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무리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자손들 중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다음은 불교의 가르침으로 재가자(在家者)를 위한 붓다의 교설 중 눈먼 사람에 관한 내용이다.
세상에는 세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즉 눈먼 사람, 외눈 가진 사람, 두 눈 가진 사람이다.
첫째, 눈 먼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 재물을 획득하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증식하도록 해 줄 눈을 갖추지 않았다. 그는 선과 악, 비난받을 만한 일과 칭찬받을 만한 일, 비천함과 고귀함, 밝음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보기에 적합한 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람을 ‘눈먼 이’라고 부른다.
둘째, 외눈 가진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람을 ‘외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
세째, 두 눈 가진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얻지 못한 재물을 획득할 수 있는 눈과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증식할 수 있는 눈은 물론 선과 악, 비난받을 만한 일과 칭찬받을 만한 일, 비천함과 고귀함, 빛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두 눈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시력을 빼앗긴, 눈먼 이는 재산도 없고 좋은 행실도 하지 않아 두루 불행하네.
그리고 다시, 옳고 그름을 함께 지닌 외눈 가진이는 속임수와 기만과 거짓말로 재산을 추구한다고 말해지네. 그는 속되고 돈 자랑하며 재산을 얻는 데 영리해서 세상을 떠나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상처일 것이네.
하지만 최고는 두 눈 가진 이라네. 올바르게 얻은 올바른 노력 발휘의 재산을 그는 베푼다네. 망설임 없이 최대의 선의로서 그는 슬픔도 없는 축복받은 가정에서 태어나 눈먼 이와 외눈 가진 이로부터 초연하니 가치있는 두 눈 가진 이가 된다네.
위 내용은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āya, 增支部)의 안다 숫따(Andha sutta, 盲人經)의 전문이다.
이 경전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설한 것인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붓다께서 사왓티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전은 비구들에서 설한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재가자(在家者)를 위한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분석해 보면, 세상에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즉 눈먼 사람(andha), 외눈 가진 사람(ekacakkhu), 두 눈 가진 사람(dvicakkhu)이다.
첫째, 눈먼 사람이란 재산을 모을 줄도 모르고, 선과 악 등을 분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외눈 가진 사람이란 재산을 모을 줄은 알지만, 윤리도덕과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테면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수전노가 이에 해당된다.
셋째, 두 눈 가진 사람이란 부유한 재산가이면서 높은 도덕적 품격을 소유한 사람을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두 눈 가진 이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 경전에 의하면, 비록 선과 악은 보지만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음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재산마저 없으면, 그 밖의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부유한 사람이 덕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다.
이 경전에 따르면 재산과 덕은 손을 맞잡고 간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재가자의 이상은 재산과 덕 두 가지를 함께 갖춘 두 눈 가진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수전노를 불교에서는 유재아귀(有財餓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간귀(慳鬼; 인색한 귀신)로 표현하였으며 그 외에 전귀(錢鬼) 간전노(看錢奴), 수재노(守財奴)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수전노의 성품은 준준(蠢蠢; 미욱하고 어리석다)하고 무무(貿貿; 시골뜨기 같고 풍속이 어리석다)하다 하여 늘상 백성의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수전노의 시조는 세종(世宗)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다.
개인적인 성격이 말할 수 없이 고리타분하여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 주지 않았다. 오랜 벗이 찾아왔다면 당연히 술이 나와야 하는 법이라 술 한 잔 따르고 바라보고, 또 한 잔 따르고 바라보매 받아먹는 사람도 그 술 아까워하는 옹색한 모습에 그만 기가 질려 술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항상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면서 글을 썼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엮을 때, 세종(世宗)은 그의 문장을 존중히 여겨 사찬(賜饌)을 내리곤 하였다.
여러 재상과 동료들도 다투어 주식(酒食)을 보냈는데, 그의 곁에는 늘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마다 하나 하나 여러 방 속에 저장하였다.
날이 오래 되어 음식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담 밖에까지 나도, 썩으면 언덕에 갖다 버릴지언정 종(從)과 시종들은 하나도 얻어먹지 못했다.
(용재총화/慵齋叢話) 記
1552년 명종(明宗) 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인손(金麟孫)이 죽자 사관의 평가는 매섭기만 하다.
본디 김인손의 성품이 추솔(麤率; 덤벙대고)하고 인색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40여년 동안 딱히 공적이 남을 만한 일은 한 가지도 없었다.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있을 때 많은 화물을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보내어 환심을 샀다. 김안로는 이를 매우 고맙게 여겨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천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늠록(廩祿; 봉급)을 쓰지 않고 모두 모았으며, 모든 궤견물(饋遣物; 선물로 받은 먹을 것)은 반드시 썩을 때까지 두었다가 먹을 수 없게 된 연후에야 땅에다 버렸으니, 옛날 수전로란 김인손 같은 자를 두고 한 말이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記
수전노의 말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는 아무래도 대원군의 셋째 형이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큰아버지이며, 민씨(閔氏) 척족과 연을 맺어 영의정까지 지낸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이었다.
대원군 집정 10년 동안, 이최응(李最應)은 기용되지 않았다. 민씨(閔氏) 척족이 세를 잡자 민승호(閔升鎬)는 흥인군 이최응을 이용하여 대원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의정대신(議政大臣) 벼슬을 주고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보통의 사교라 해도 뇌물을 갖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았다. 미관 말직일지라도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금전재백(金錢財帛)을 받고, 그런 후에 요청을 들어 주었다. 하여 흥인군은 의정대신의 자리에 있게 된 후부터 날마다 돈벼락을 맞게 되었다.
팔도의 수령 방백들이 보내는 특산물로 아홉 창고(열두 창고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때나 빈틈을 갖지 않았다. 뇌물과 선물을 진상하지 않으면 파면을 당하고 마는 까닭에 내직과 외직에 있는 사람 모두 그러하였다.
흥인군은 아침에 기침만 하면 그날 첫 공사가 지팡이를 짚고 뜰로 내려와 아홉 창고를 점고하는 것이었다. 이 창고 저 창고를 청지기로 하여금 열게 하고 그 속을 훑어 본 결과 물건이 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으면 기쁨에 못 이겨 빙그레 웃으면서 그 창고를 자기 눈앞에서 잠그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홉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을 다 일일이 점고한 후에 자기 처소로 돌아와 세수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세간 청지기가 흥인군에게 달려와 “대감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저 제7창고에 쌓여 있는 생치(生雉; 꿩고기)와 동태(凍太)가 날이 더워 태반이 썩고 있습니다. 소인 생각 같아서는 저것들을 적당히 처분하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라고? 적당히 처분하라고. 어찌하란 말이냐?”
“아직 썩지 않은 것은 대감의 친척이나 친지분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반 썩은 것은 하인들에게 나눠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주 썩은 것은 내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네 말은 그것들을 날로 먹을 생각에서 나온 말 같구나. 그러나 나는 먹는 것보다도 보는 것을 좋아하니 네 말을 들어줄 수 없다.”
하여 흥인군 저택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생치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출입하였다.
그런데 임오년(壬午年)에 이르러 군변(君邊)이 있게 되었다. 이최응은 군변이 대궐에까지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을 하게 되는데,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뛰어나와 뒷뜰로 피신했다.
“얘! 네가 엎드려라. 내가 담을 타고 너를 넘어가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소인을 타고 담을 넘으시지 담을 타고 어찌 소인을 넘으십니까?”
“그런데 잊은 것이 하나 있다. 너는 빨리 내 처소로 가서 열쇠 꾸러미를 가져오너라.”
“일이 급합니다. 열쇠는 그만두시고 빨리 담을 넘어 도망하시지요?”
“일이 급하면 급했지. 급하다고 하더라도 가지고 갈 것은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가시면 창고가 대감을 따라 갈 줄로 생각하십니까?”
“네 이놈!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열쇠 꾸러미를 어찌 두고 가란 말이냐?”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가서 가져오리다. 그러면 아무리 일이 급하시더라도 제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일이 급하더라도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냉큼 엎드리지 못하겠느냐?”
“진작 그러실 일이지오!”
하고 하인은 담 밑에 엎드리기 시작하였다. 흥인군이 하인의 어깨를 밟고 올라섰다. 한 발을 담에 올려놓고, 넘으려는 순간, 눈이 충혈된 군졸 무리가 떼를 지어 나는 듯 달려들었다.
아무리 높고 웅장한 대문인들 수백 명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놈의 영감쟁이가 여기 있다.”, “저 놈 때문에 우리가 굶주렸다!”하고 잡아내리는 바람에 불알이 터져 죽고 말았다는데 여러 기록에는 난타난자(亂打亂刺)당해 죽었다거나 장독대 뒤에 숨어 있다 난병(亂兵)의 쇳대(鐵杖)에 맞아 죽었다는 설, 열쇠 무게 때문에 강을 건너다 빠져죽었다는 설도 있는데 고증할 수 없다.
하여튼 군졸은 집과 가구를 부시고, 창고를 열어 전곡(錢穀)이며 포백(布帛), 금은보화를 끌어내어 마당에 쌓으면서 “어허, 쌀 봐라. 양지머리가 걸렸구나. 이건 육포, 어포요, 저건 술독…”, “금은보화(金銀寶貨)다!”
그들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짓밟았다. 무엇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느 물건치고 값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놈의 영감이 의정대신 노릇을 하지 않고 끝까지 강도 노릇만 하였구나. 아홉 창고가 좁다 할 만큼 팔도 물건이 쌓여 있으니 강도로는 천하에 으뜸이렷다. 천참만륙(千斬萬戮)하여도 그 죄가 남을 놈이다.” 하며 흥인군의 시체 앞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記
변계량과 김인손의 경우라면 재물을 지나치게 아껴 용렬하다고 민중의 조롱과 해학의 대상이 될지언정 백성들의 피해를 주지 않았다.
반면 이최응의 경우처럼 자력자업의 바탕이 없는 재물 즉 정의와 도의에 어긋난 재물을 쌓았다면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는 법이다.
부(富)하기로는 구중궁궐을 넘나들고 귀(貴)하기로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관중(管仲)의 지적처럼 창고가 가득 차도 예절을 모르고, 의식이 족해도 영욕을 몰라 결국 후환을 얻어 패가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최응의 손자인 이지용은 나라를 팔고 조부의 숱한 재산까지 도박으로 다 날려버리니 수전노의 패덕은 후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다.
청렴한 사람은 남에게서 취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무엇을 줄 때 자랑하거나 인색한 빛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탐도(貪饕; 재물이나 음식을 탐냄)한 사람은 남에게서 취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즐겨 주려 하지 않을 뿐더러, 꾸짖는 말씨와 얼굴빛까지 더한다.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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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守錢奴)
돈을 지키는 노예라는 뜻으로, 돈을 모을 줄만 알아 한번 손에 들어간 것은 도무지 쓰지 않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후한 초대 황제)때 복파장군(僕波將軍)인 마원(馬援)이 젊은 시절에 한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마원(馬援)은 전한(前漢)말 부풍(扶風) 무릉(茂陵)사람으로 자가 문원(文淵)이다. 그에게는 위로 형이 셋이 있었는데 마황(馬況), 마여(馬餘), 마원(馬員)이 그들로서 모두들 재능이 출중했다. 마원(馬援)은 어려서 글을 배웠고 무예에도 뛰어난 인재였는데 그저 소나 말을 기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큰형 마황(馬況)은 마원을 대기 만성형(汝大才,當晚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형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마원이 상례를 정중히 모셔 치른 후 예를 다하여 형수를 받들었다.
장성하여 군수를 보좌하면서 그 현을 감찰하는 독우(督郵)가 됐다. 그때 죄수를 호송하는 일을 맡게 됐는데,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는 죄수들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들을 풀어 주고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는 친구들과 담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장부가 뜻을 세우면 곤궁해도 더욱 굳세어야 하며, 늙어도 더욱 씩씩해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북쪽 농산(隴山) 한수(漢水) 옆에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시작하니 소와 말이 수천 마리, 곡물은 수만 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대저 재산을 불린다는 것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전노와 무엇이 다를 것이냐!"하였다. 그리고는 전 재산을 형제들과 친척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자신은 가죽옷과 바지만 입고 지냈다(凡殖貨財產,貴其能施賑也,否則守錢虜耳。』乃盡散以班昆弟故舊,身衣羊裘皮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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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守錢奴)
돈이란 게 쓰기 위해 버는 것인데, 오직 벌어서 지키기에만 골몰한다면 돈의 노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 ‘돈은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렇습니다. 돈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전노는 오늘날에도 많지만 예전에도 많았나 봅니다.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우리말 표현이 많은 걸 보면.
‘돈 다음에 나온 놈.’ 얼마나 돈을 좋아하면 자기보다 돈을 앞세우고 나왔을까요? 이런 사람은 ‘대들보 썩는 줄 모르고 기왓장 아낄’ 인물입니다. 그뿐인가요? ‘모기 다리에서 피 빼먹겠다.’는 말도 듣지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고기 만진 손 국솥에 씻(으랴)’습니다. 고깃국 끓여 먹어야 하니까요. 게다가 이런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오래 갑니다. 왜? ‘감기고뿔도 남 안 주(준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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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쇠
몹시 인색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흔히 짠돌이나 짠순이라고도 한다.
구두가 닳을 것을 걱정해 쇠를 덧대 신은 사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원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었다.
조선시대에 인명중에 이두로 仇豆金 仇叱金라고 쓰는 이름들이 있었는데, 이를 그냥 음독하면 구두금, 구질금이지만, 맨 뒤의 金은 새김으로 풀어 '쇠'로 읽고 叱은 이두에서 사이시옷/된소리 표기에 쓰이므로, 각각 구두쇠, 굿쇠가 된다.
참고로 '쇠'는 金란 뜻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인명접사로 아마 구두쇠/굿쇠라는 이름을 가진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담으로 구두쇠와 관련한 공포 이야기(괴담)도 있다. 구두금과 입 작은 아내 이야기인데 내용인 즉슨, 조선시대 구두금이라는 한 인색한 사내가 살았는데 이 남자가 얼마나 짠돌이였냐면, 결혼하면 아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까워서 입 작은 아내와 결혼하겠다는 양반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사당 앞에서 어떤 이상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의 소원대로 입이 엄청나게 작은 여자였다. 얼마나 작았는지 자세히 안보면 입이 아예 없는 줄 알았다고...
그는 매우 좋아하면서 그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했고 여자는 입이 작은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대신했고 둘이 집으로 왔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밥이 둘만이 사는 것치곤 눈에 띄게 많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구두금은 어느날 일 나가는 척 하면서 집 안에 몰래 숨어 아내를 지켜보았다. 아내는 묵묵히 부엌으로 가더니 밥을 해 가지고는 반찬을 잔뜩 붓더니 쓱쓱 비벼서 자기 얼굴에 갖다 댄 다음 아예 그릇째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는 "아니 뭔 사람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저렇게 먹지?"라고 이상해 하면서 좀 더 가까이서 훔쳐보니 아내는 입이 턱밑까지 찢어져 살아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크기로 입을 크게 벌린 후 밥과 반찬을 쏟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입은 점점 더 커져 아예 아래턱이 땅까지 내려올 정도로 벌어졌다.
구두금은 너무 놀라 나가 자빠졌고 그 소리를 들은 괴물 아내는 그를 쫓아왔다. 괴물 아내는 큰 입으로도 모자라 그 입 안에서 뱀보다도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쫓아왔고 구두금은 쫓기다가 호숫가 앞에서 뭐에 걸려 넘어졌는데 괴물 아내가 다가가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주변은 창포(단오날 머리 감을때 쓴다는 그 창포인 듯하다)가 가득했고 그 냄새로 인해 괴물 아내가 못 온 것이다.
그는 그걸 알고 창포를 잔뜩 따서 집으로 간 다음 괴물 아내가 다시 집에 들어올까봐 창포 다발을 집 앞에 내걸었고 자신의 몸에는 창포를 잔뜩 발랐으며 창포를 주머니에 넣어 소지해 가지고 다녔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앞다투어 창포를 애용하기 시작했다는 전설 괴담이 전해진다.
입이 크게 찢어진다는 설정은 마치 현대의 도시괴담으로 한때 유행했었던 "빨간 마스크 & 파란 마스크" 괴담과 비슷한 면도 있다.
유명한 구두쇠로는 자린고비가 있다. 순 우리말로는 노랭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수전노(守錢奴)라고도 하며 뜻은 돈을 지키는 노예로 구두쇠의 어감과는 차이가 있다.
수전노의 경우 돈을 벌고 쌓아두기만 하고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돈 버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도 하지 않아야 수전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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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자린고비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유명한 가설로는 충주 금왕읍에 살았다고 해서 일명 '충주 자린고비'라 불리는 실존인물인 조륵이 모델이라는 설이다.
그가 평생 동안 구두쇠 짓을 해서 모은 돈으로 가뭄에 시달리던 1만 호의 백성들을 구하자 그 지역 주민들이 감동하여 조륵 사후에 자인고비(慈仁考碑; 어버이같이 인자한 사람을 위한 비석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비를 세운 데에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이를 우연히 지나가던 암행어사가 보고 그의 선행에 크게 감동하여 포상을 하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내면서 그렇게 쓸데없이 돈을 쓸 바에는 차라리 그 포상할 돈으로 제방 등을 튼튼히 만들라고 하며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어느날 솔개가 병아리 한 마리를 물어가자 "지금까지 내가 거지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번도 무엇인가를 허투로 잃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잃는 것이 생겼으니 나의 재복도 다하였구나." 라고 하면서 전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서 임종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위 글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부모 제사 때 쓰는 지방을 한 번 쓰고 태워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고비(考妣; 부모)를 절여 놓고 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절인 고비'가 음운변화를 거쳐 자린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잘은 꼽재기'가 변해서 자린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잘은'은 말 그대로 '잘다(작다)'는 뜻이고 '꼽재기'는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사물'을 일컫는 말로 아니꼬울만큼 잘고 인색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재령 꼽재기', '달래 꼽재기', '이천 천지 곱재기', '달랑 꼽재기' 등이 있었다.
윤승운의 만화에서는 성이 고씨요 이름이 비였다고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문헌에서는 확인할 수 없어 신빙성이 낮다.
구두쇠가 조륵 한명만은 아니었을테니 여러 사람의 일화와 별명이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통합되어 자린고비로 변했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야말로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식사 때는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은 후 밥 한 술에 굴비 한번 쳐다보기라는 괴이한 식사법을 애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아울러 나오는 추임새 또한 유명하다. "어이 짜다~." 이 때문에 자린고비가 '절인 굴비'에서 따왔다는 설이 대중적으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심지어 아들이 굴비를 두번 쳐다보자 굴비가 짜지도 않느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한 때는 큰 아들이 굴비를 두 번 쳐다보자 작은 아들이 '형이 두 번 쳐다 봤어요' 라고 말하니까 자린고비가 '놔둬라, 오늘 형 생일이잖니' 라고 말했다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또 한 일화로는 뒷마당에 있는 된장독의 뚜껑을 열어 놓았더니 파리가 그 위에 살짝 앉았다가 날아가는데 그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을 보고 아까워서 수십 리를 날아가는 파리를 쫓아가서 된장을 빨아먹고 놓아 주었다고 한다.
김삼이 그린 만화에는 파리를 놓아주기 전에 다시는 우리집 장독에 얼씬도 말라고 엄포를 놓는데, 이후 자린고비 집의 장독에는 파리가 한 마리도 꼬이지 않았다는 내용은 자린고비의 근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다못한 동네 사람들이 자린고비를 놀려주기 위해 집에다가 새우젓을 몰래 가져다 놨는데 자린고비는 "집에 밥도둑을 들이다니 집안 망하게 할 일 있느냐" 면서 바로 집어던졌다고...
위의 굴비 이야기도 생선장수가 굴비 한마리를 그냥 담 너머로 몰래 던져 주었는데, 어디서 밥도둑을 함부로 넘겨주냐면서 다시 던져 버리자, 공짜로 주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고 다시 던져주고 나서야 겨우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는 김에 자린고비 '일가'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자면, 정상인 며느리가 자린고비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고기장수가 오자 며느리는 고기를 한참 주물럭대다가 그 손 씻은 물로 고깃국을 끓였다.
이 때 시어머니는 "아가, 오늘 국물에는 고기 냄새가 나는구나" 라는 말했는데, 이 때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칭찬을 받을 줄 알고 자신있게 자기가 한 일을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시어머니의 대답은 그 손을 장독에다 씻었으면 더 많은 국물을 우려낼 수 있었다는 것.
이에 자린고비는 그 손을 우물에다 씻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평생 고깃국을 먹었을 거라고 말한다. 결국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시던 국물을 우물에 쏟으라는 엔딩이다.
때로 이 며느리가 자린고비보다 한 수 위의 구두쇠로 등장하기도 한다. 모든 음식을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내놓는데 간장만은 종지 한 가득 내놓는 모습에 자린고비가 한 마디 하자, 그렇게 해야 보기만 해도 짜서 오히려 덜 먹게 되고, 또한 숟가락으로 종지를 긁어 숟가락과 종지가 닳는 일이 없다는 대답을 해서 오히려 자린고비가 놀라며 칭찬했다고.
또 한 번은 며느리가 떡을 해오자 자린고비는 온갖 욕을 다하는데 여기서 며느리는 떡을 하면 부피도 늘고 오히려 단맛이 있어 반찬이 필요없다는 말을 하여 그날부터 자린고비네는 매일 떡을 해먹었다는 말도 있다.
언젠가는 이 자린고비와 옆집, 혹은 다른 지방에 사는 또다른 구두쇠가 경쟁에 붙었는데, 여름에 부채 부치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옆집 구두쇠는 한번에 한 살만 펼쳐(쥘부채 형태) 부쳐 다 떨어질 때까지 쓴다고 자랑했으나, 본가 자린고비는 부채를 촥 펼쳐놓고 얼굴을 흔드는 방법을 쓴다고 해서 옆집은 데꿀멍. 어째 더 더울 거 같다.
또한 그날 밤에 구두쇠와 자린고비가 함께 잠을 자는데 문풍지에 뚫린 구멍으로 외풍이 들어와 잠을 잘 수 없어서 구두쇠는 가지고 있던 종이조각에 저녁 먹고 남은 밥풀을 붙여 문풍지를 때워놓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구두쇠가 집으로 돌아갈 때 종이조각은 자기 것이라고 떼어가겠다고 하자 자린고비는 밥풀은 우리집 것이라고 하며 밥풀을 박박 긁어내고 종이만 들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현재는 쓸데없는 것에 눈을 뒤집고 절약정신을 외치는 괴짜들을 비꼴 때 쓰는 말이 됐다.
그러나 오직 부정적인 묘사만 있는 놀부와 달리 이쪽은 민담에서 긍정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실례인 것이 놀부는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지만 자린고비 이 사람은 정당하게 자수성가 한 사람이다.
물론 위에서 봤듯이 온갖 엽기적인 방법으로 구두쇠 짓을 해서 식솔들은 고통 받았을테니 식솔들 기준으로만 본다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위에 이야기 중, 된장(또는 간장)독에 앉은 파리를 쫓은 건 또다른 구두쇠인 이천시의 천지곱재기란 인물의 얘기라고 한다. 그 또한 자린고비 못지 않은 구두쇠였다고...
장독에 앉은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이 아까워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지고 파리를 붙잡아 그 다리를 씻으려고 쫓아가다가 용인땅 어느 개울가에서 그만 파리를 놓쳐 버렸는데 이 놈의 파리가 이리 갔나 저리 갔나 하고 어정거렸다고 해서 이곳 지명을 '어정개'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守(지킬 수)는 ❶회의문자로 垨(수)는 동자(동자)이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의 관청에서 법도(寸; 손, 손으로 꽉 잡는 일, 또는 치수, 규칙)에 따라 일을 한다는 뜻이 합(合)하여 직무를 지킨다는 데서 지키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守자는 ‘지키다’나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守자는 宀(집 면)자와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寸자는 又(또 우)자에 점을 찍은 것으로 ‘법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금문에 나온 守자를 보면 집안에 寸자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듯한 모습이다. 이것은 집을 ‘지킨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守자는 본래 ‘보호하다’나 ‘지키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寸자가 가지고 있는 ‘법도’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다스리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守(수)는 (1)조선시대 때 관계(官階)가 낮은 사람을 높은 직위(職位)에 앉혔을 경우에 관계와 관직 사이에 넣어서 부르던 말. 가령 종2품(從二品)인 가선 대부다 정2품(正二品)직인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된다고 하면 가선대부 수 이조판서(嘉善大夫守吏曹判書)라고 서칭(書稱) (2)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에 두었던 정4품(正四品) 벼슬. 왕자군(王子君)의 증손(曾孫)들에게 주었음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지키다, 다스리다 ②머무르다 ③기다리다 ④거두다, 손에 넣다 ⑤청하다, 요구하다 ⑥지키는 사람 ⑦직무, 직책(職責), 임무(任務) ⑧벼슬의 지위(地位)는 낮고 관직(官職)은 높음을 나타내는 말 ⑨지방(地方) 장관(지방에 파견되어 그 곳을 지키는 일이나 사람) ⑩정조(貞操), 지조, 절개(節槪) ⑪임시, 가짜 ⑫벼슬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킬 보(保), 막을 방(防), 좇을 준(遵), 지킬 위(衛),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칠 격(擊), 칠 공(攻)이다. 용례로는 지키고 보호함을 수호(守護), 절개를 지킴을 수절(守節), 일정한 지역이나 진지 등을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어 방비함을 수비(守備), 적을 맞아 지키는 형세 또는 힘이 부쳐서 밀리는 형세를 수세(守勢), 진보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따름을 수구(守舊), 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킴을 수직(守直), 행동이나 절차에 관하여 지켜야 할 사항을 정한 규칙을 수칙(守則), 법을 준수함을 수법(守法), 보기 위하여 지킴으로 관청이나 회사 등의 경비를 맡아 봄 또는 맡아보는 사람을 수위(守衛), 적의 공격 등을 막기 위하여 산성을 지킴을 수성(守城), 그대로 좇아 지킴을 준수(遵守), 보전하여 지킴을 보수(保守), 굳게 지킴을 고수(固守),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공격과 수비를 공수(攻守), 후퇴하여 수비함을 퇴수(退守), 망을 봄으로 또는 그런 사람으로 교도소에서 죄수의 감독과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간수(看守), 경계하여 지키는 것 또는 그 사람을 파수(把守), 완강하게 지킴을 완수(頑守), 튼튼하게 지킴을 견수(堅守), 감독하고 지킴 또는 그런 사람을 감수(監守), 규칙이나 명령 등을 그대로 좇아서 지킴을 순수(循守), 중요한 곳을 굳게 지킴을 액수(扼守), 혼자서 지킴으로 과부로 지냄을 독수(獨守), 엄하게 지킴으로 어기지 않고 꼭 지킴을 엄수(嚴守), 행실이나 말을 제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을 자수(自守),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수주대토(守株待兔),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라는 뜻으로 비밀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수구여병(守口如甁),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 뜻이 가득 차고 군자의 도를 지키면 뜻이 편안하다는 수진지만(守眞志滿),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빼앗고 도리에 순종하여 지킴을 역취순수(逆取順守) 등에 쓰인다.
▶️ 錢(돈 전)은 ❶형성문자로 銭(전)의 본자(本字), 戔(전)은 통자(通字), 钱(전)은 간자(簡字), 戋(전)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戔(잔)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戔(전)은 '적다', '잘다'는 뜻을 나타낸다. 錢(전)은 금속(金屬)으로 만든 농구(農具)인 쟁기나 괭이, 아주 옛날 중국에서는 자패(紫貝)를 돈으로 삼았으나 周(주)나라 때에 이르러 금속으로 만든 것을 써서 泉(천) 또는 布(포)라고 불렀다. 그 중에 쟁기 모양의 것이 있어 錢(전)이라 불려졌다. 나중에 秦(진)나라 때에 엽전 모양의 돈으로 되어 錢(전)이라고 불렀다. ❷회의문자로 錢자는 '돈'이나 '화폐', '동전'을 뜻하는 글자이다. 錢자는 金(쇠 금)자와 戔(쌓일 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錢자에 쓰인 戔(쌓일 전)자는 여러 개의 창을 쌓아놓은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쌓이다' 라는 뜻이 있다. 錢자는 본래 동전으로 만들어진 엽전(葉錢)을 뜻하던 글자였다. 동전의 역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통일 이후 진시황은 반량전(半兩錢)을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둥근 모양의 동전(銅錢)이었다. 엽전은 구멍에 줄을 꿰어서 묶음으로 가지고 다녔던 것이니 '쌓이다' 라는 뜻을 가진 戔자는 의미 겸 발음을 함께 전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錢(전)은 (1)돈의 단위(單位). 원의 100분의 1 (2)옛날 엽전 10푼의 단위 (3)무게 10푼을 뜻하는 단위 (4)옛날 중국에서 쓰이던 농구(農具)의 한 가지 (5)종이로 인형(人形)처럼 만든 것 죽은 사람의 넋이 의지(依支)할 곳으로 삼는다하여, 시식단(施食壇)에 걸어 놓음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돈, 화폐(貨幣) ②동전(銅錢), 엽전(葉錢) ③값, 대금(代金) ④비용(費用) ⑤자금(資金) ⑥기금(基金) ⑦돈, 전(무게 단위) ⑧주효(酒肴: 술과 안주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⑨구실(온갖 세납을 통틀어 이르던 말), 세금(稅金) ⑩가래(흙을 파헤치거나 떠서 던지는 기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화폐 폐(幣)이다. 용례로는 돈과 곡식을 전곡(錢穀), 쉽사리 헤아릴 만큼 그다지 많지 아니한 돈을 전냥(錢兩), 돈을 만드는 곳을 전방(錢坊), 빚을 놓고 받은 돈의 변리를 전변(錢邊), 돈으로 품삯을 받고 남의 모내기를 하여 주는 일을 전앙(錢秧), 쇠붙이를 녹여서 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전장(錢匠), 가래로 흙을 떠서 던지는 기구를 전조(錢銚), 엽전 같이 둥글게 만든 방패를 전패(錢牌), 돈이 잘 돌지 않음을 전갈(錢渴), 돈을 뇌물로 주는 인사를 전례(錢禮), 돈이 융통되는 길을 전로(錢路), 만으로 헤아릴 만한 많은 돈을 전만(錢萬), 돈과 필목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전목(錢木), 돈의 표면에 새긴 글자를 전문(錢文), 백으로 헤아릴 정도의 적지 아니한 돈을 전백(錢百), 구리로 만든 돈을 동전(銅錢), 돈으로 쇠붙이로 만든 돈을 금전(金錢), 물건 대신으로 주는 돈을 대전(代錢), 서로 종류가 다른 화폐와 화폐 또는 화폐와 지금을 교환하는 일을 환전(換錢),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을 아전(牙錢), 종이로 만든 돈을 지전(楮錢), 이익이 남는 돈을 이전(利錢), 꾸어 주거나 맡긴 돈에 길미를 붙이지 아니한 돈이나 밑천으로 들인 돈을 본전(本錢),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수직을 대신시키고 주는 삯을 번전(番錢), 위조한 돈을 사전(私錢), 죄를 벗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속전(贖錢), 웃돈으로 본래의 값에 덧붙이는 돈을 가전(加錢), 급한 데 쓰이는 돈을 급전(急錢), 돈이 없음을 무전(無錢), 밑천으로 삼은 돈을 원전(原錢), 돈으로는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뜻으로 돈의 위력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전가사귀(錢可使鬼), 돈은 귀신과도 통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돈의 위력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전가통신(錢可通神), 밑천이 많은 사람이 장사도 잘함을 일컫는 말을 다전선고(多錢善賈), 얼마 안 되는 돈과 곡식을 일컫는 말을 분전승량(分錢升量), 건몰한 물건을 팔아 돈을 만드는 일을 일컫는 말을 건몰작전(乾沒作錢), 돈이 없이 남의 파는 음식을 먹음을 일컫는 말을 무전취식(無錢取食), 돈을 아끼지 않고 물 쓰듯 함을 이르는 말을 사전여수(使錢如水),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할 때에 먼저 돈을 물 속에 던져서 물 값을 갚는다는 뜻으로 결백한 행실을 이르는 말을 음마투전(飮馬投錢), 한 끼 식사에 많은 돈을 들인다는 뜻으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식만전(一食萬錢) 등에 쓰인다.
▶️ 奴(종 노)는 ❶회의문자로 㚢(노)는 고자(古字)이다. 계집 녀(女; 여자)部와 又(우; 손; 일한다)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에 종사하는 여자의 뜻이, 나중에 널리 남에게 부림을 받는 천한 사람을 가리켜 특히 남자 종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奴자는 ‘종’이나 ‘노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奴자는 女(여자 여)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又자는 ‘또’라는 뜻이 있지만, 본래는 사람의 손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손을 그린 又자에 女자가 결합한 奴자는 여자 노비를 부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奴자는 ‘여자 노비’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노비’를 뜻하거나 천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奴(노)는 (1)어떤 명사에 붙어 몹시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2)사내종의 뜻으로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아울러 이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종(사내종) ②놈 ③저, 자신을 낮추는 말 ④접미사 ⑤종으로 부리다 ⑥둔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종 복(僕), 종 례(隷)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종 비(婢)이다. 용례로는 종이나 노비의 계집으로서 남의 첩이 된 사람을 노가(奴家), 종의 이름을 노명(奴名), 사내종을 노복(奴僕), 사내종과 계집종을 노비(奴婢), 여러 종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노속(奴屬), 종 대하듯 멸시함을 노시(奴視), 종의 이름을 적은 장부를 노안(奴案), 하인처럼 굽실거리는 비굴한 얼굴을 노안(奴顔), 사용자의 마음대로 혹사 당하는 일 또는 노예로서 부림을 당하는 일을 노역(奴役), 자유를 구속 당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사람을 노예(奴隸), 열등한 재주 또는 남자 종을 노재(奴才), 종이 낳은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어 이르던 말을 노추(奴雛), 노예처럼 천대하여 기름을 노축(奴畜), 자식들이나 놈들의 뜻으로 남을 얕잡는 말을 노배(奴輩), 주인이 종의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하던 일을 노명소지(奴名所志), 사내종의 얼굴과 계집종의 무릎이란 뜻으로 사내종이 고개를 숙이고 계집종이 무릎을 끓듯이 남과 교제할 때 지나치게 굽실굽실하며 비굴한 태도로 일관함을 이르는 노안비슬(奴顔婢膝), 종과 상전의 나뉨이란 뜻으로 매우 거리가 멀어 바꿔 설 수 없는 대인 관계라는 노주지분(奴主之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