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삼천사입구 정류장(701, 709, 7211, 7723번 시내버스 경유)에서 연서로를 따라 북쪽
으로 조금 가면 삼천리골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천교를 건
너면 삼천사로 인도하는 숲길(연서로54길)이 모습을 비춘다. 봄이나 가을에 왔더라면 호젓한
숲길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겨울 제국에게 잎은 물론 영혼까지 싹 털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초췌해진 몰골로 나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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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나무가 여럿 심어져 있는 이곳은 식당
에
딸린 공터로 족구장이나 야유회 장소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다.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참 엊그제 같은데,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그냥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나
농장의 쉼터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곳에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련하게 묻
혀있다.
이 절터는 공터를 중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받
지 못해 절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이곳을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1
'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 위쪽에 있음)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라 절터에
대한 보존은커녕 훼손이 심각한 실정이라 하루 속히 발굴조사와 보존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진정한 신혈사거나 북한산 자락 어딘가에 있었다는 신라 10대 화엄사찰
의 하나인 청담사(淸潭寺)였을지도..? |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산꾼과 나들이꾼을 상대로 먹거리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
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흔쾌히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
표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2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표석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지만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식당들이 여럿 모여 있어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계곡길을 5~6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를
넘으면 북한산(삼각산)에서 제법 깨끗하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칭송을 받는 삼천사계곡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쿨
하게 풀리면서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곡 주변에는 군사시설과 철조망 등이 일부 옥의 티처럼 남아있고 삼천사와 미
타교 사이 계곡은 상수원과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높이가 낮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
년
이후 높이와 폭을 크게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닦았다. 다리를 업그
레이드시킨 것까지는 좋으나 문제는 삼천사에서 미관과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에서 삼천사로 오르는 길목의 계곡 풍경
은 내가 무지하게 좋아했던 풍경의 하나였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盤石)을
깨뜨려 다소 좋지 않게 변한 것이다. 겨울 제국도 망가진 계곡 풍경이 싫었던지 눈으로 그 현
장을 가려버렸다. |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리골(삼천사계곡) 상류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1992년 이후, 여기서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가 활짝 개방되면서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나 유물도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 당시 신라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
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도읍
인 서라벌 왕경(王京)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고
있었으며, 원효대사도 그 당시 매우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
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계의
1인자이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변방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
라 불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 군주 고종(高宗)은 '그 강하던
백제(百濟)도 무너뜨렸으니 이제 오랜 숙적인 고구려(고구리)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심히 위험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
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10만의 대군을 보냈는데, 방효태는 천
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죄다 데리고 나와 고구려
정벌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나라군은 요하<遼河, 현재 요하가 아님, 산서성이나 그 이남에 있던 강줄기>를 건너 고구려
의 주요 지역인 요동<遼東, 태행산맥 동쪽 지역 또는 하북성>을 용케도 통과하여 압록수(鴨綠
水, 하북성에 있던 강, 현재 압록강이 아님)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인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현재 북경으로 여겨짐) 부근인 사수(蛇水)까지 들어왔으나 연
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10만 대군은 거의 전멸을 당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두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
고기 신세가 되었다.
한편 바다를 통해 평양성 부근까지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완전 절단났
다는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
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잘라갈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서둘러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나중에 고구려를 칠 때 당나라를 요긴하게 이용하고자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유신(
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다.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종군(從軍
)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
잡기 위해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북
한산(삼각산)까지 들어와 삼천사를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
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늙은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
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誌)에는 최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
로
있었으며, 고려 황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음은 같지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현재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000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에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냈고
, 20년 동안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에는 대지국사탑비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하며 방치되어 오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졌다.
2009년 이후에도 발굴을 벌였으나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지도에 표시도 없는 유령 구역으로 묶
여 있었으며(지금은 다음카카오와 네이버 지도에 절터가 나오고 있음) 북한산에서 가장 큰 편
에 속하는 절터 유적임에도 그에 합당하는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2018년에 대지국사탑비가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음, 절터는 원래 서울 땅이었으나 행
정구역 조정으로 경기도 고양시 땅으로 변경됨)
삼천사의 위치가 서울 시내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고
버스에서 내려
30분
이상을 걸어 들어가
야 되는 산골에 묻혀있어 번뇌도 감히 추적하지 못한다. (하긴 굳이 추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을) 게다가
계곡을 경내에 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하여 산사의 그윽한 멋과
향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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