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신명 11,26)>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제 이마에 재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수난과 고통의 길로 들어선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 죽임을 당했다가 ...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예전에는 주로 "고난, 배척, 죽임"이란 말씀이 다가와서 자못 비장한 마음으로 그 말씀들에 머물렀는데, 오늘은 "되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시기인데, 그동안 너무 수난과 죽음에만 갇혀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당신 안에서도 희망이 피어올랐을 겁니다. 그 희망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이루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꼭 붙잡고 가는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고요.
사실 우리 삶에 언제나 고통만 있는 건 아니지요. 아무리 힘겨워도 희로애락의 기본 감정들을 일으키는 다양한 일들이 오가게 마련이니까요. 살다 보면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긴 터널 어둠 속 한가운데를 걷는 것처럼 막막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희망 없이 걷다가, 아니 무엇을 희망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걷다가, 문득 터널 입구에서 새어들어 오는 빛줄기가 저 앞에서 콩알만하게 비치는 순간을 만납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그렇게 이 터널에도 끝이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 걷는 발걸음은, 과연 이 터널에 끝이 있기나 할까 하는 두려움과 의혹에 떨며 걸을 때의 발걸음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부활 역시 이렇듯 "고난, 배척, 죽임"과 더불어 "반드시" 이루어질 하느님의 업적이기에, 예수님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로마 8,24 참조) 오늘도 묵묵히 믿고 기다리며 한걸음씩 나아갈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안내하십니다. 대상이 확대되면서 보다 보편적인 방식이 제시되는 듯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날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꾸준히, 건너뜀 없이..." 자기의 실존에서 스스로에게 십자가가 되는 부분을 우리 각자는 알고 있습니다. 떼어 버리려 애도 써봤고 거부하려, 부정하려 도망도 가 보았지요. 그런 길을 돌고 돌다가 결국 '내 십자가는 나와 한 몸이구나'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또 한걸음 더 나아가 '내 십자가가 사실 내게 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임을 은총으로 깨닫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그런 "제 십자가"를 지되, 어제나 내일의 십자가도 아닌, 남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날마다' 지라고 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많은 경우 과거의 상처가 만든 십자가와, 미래에 대한 걱정의 십자가를 지고 있느라 '지금 여기' 현재의 십자가를 놓치고 살기 쉽습니다. 과거는 주님의 자비에,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어느 성인의 충고처럼, 딱 지금 이 순간 여기 내 자리에서 주어진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단순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믿고 희망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져야 할 제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 앞에 "생명, 행복, 축복"의 길과 "죽음, 불행, 저주"의 길을 펼쳐놓고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구체적으로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지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먼저,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 행 · 불행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과 굴욕적이고 비굴한 상하종속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구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드리고 헤아리다 보면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에 장애가 되는 무엇이 내 안에 움직인다면, 그것이 곧 나의 십자가가 아닐까 합니다.
또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창조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말씀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께서 이루어 주실 구원을 믿고 희망할 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희망을 방해하는 것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의 십자가가 아닐까 합니다.
모세는 또 그분께 '매달리라'고 합니다. 매달린다는 것은 간절한 청원의 심정을 내외적으로 절박하게 표출하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고는 좀처럼 드러내기 어려운 태도이지요. 나에 대한 상대방의 사랑과 호의, 연민을 믿을 때 매달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을 발휘하는 데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일 겁니다.
어제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돌아오라. 하느님과 화해하라. 숨어 계신 하느님께 보여라."고 독서와 복음이 호소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명과 축복을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할 오직 한 가지 일은 생명과 축복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매달리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향한 사랑과 희망과 믿음을 막는 무언가가 현재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도무지 사랑도 못하게, 희망도 갖지 못하게, 믿지도 못하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내 안의 그림자, 그 십자가에 짓눌려 포기하지 않고, 그 십자가가 무서워 던져버리지 않고 "날마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꾸준히, 건너뜀 없이"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언젠가 우리는 "되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기"(신명 30,20 참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 불행, 저주"로 여기던 십자가는 어느새 "생명, 행복, 축복"의 생명 나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한 목소리로 "유일한 우리 희망 십자나무여"(성주간 저녁기도 찬미가 중)를 기쁨에 차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첫댓글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