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yond reason
삶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 펼쳐지는 법이 없다. . 우주는 자그만치 138억년 동안 존재해왔다. 세상의 흐름을 결정짓는 과정은 우리가 태어났을때 시작된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끝날일도 아니다. ..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은 손톱만큼도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며 끊임없이 결정하고 통제하려 든다. . 우리는 모두가 실제로 세상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 이것은 순전히 마음이 만들어낸 '개인적 호불호'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진짜로 믿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살자면 삶이 극도로 힘들어진다. 우리가 늘 삶과 맞씨름을 벌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할까?
내버려둬도 삶은 꽤 잘 굴러간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행성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조그마한 씨앗은 거대한 나무로 자라고 비는 주기적으로 내려서 수백만년 동안 지구의 숲을 키워낸다. 이 중에 인간이 의지의 힘을 의식적으로 발휘해서 해낸 일은 아무것도 없다. .. 바로 이런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휘두르려 덤벼든다.
가령 삶에 저항하는 대신 그 흐름을 존중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그 속에 뛰어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절로 펼쳐지는 삶의 질은 어떠할까?
무질서하고 이미없는 사건이 무작위로 일어날까?
아니면 우주의 완벽한 질서와 의미가 우리의 일상 속에도 강림할까?
내맡기기 실험(the surrender experiment)
1부 깨어남
.. 가끔씩 로니가 집에 놀러오면 나는 하릴없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바로 그날 1970년에 있었던 운명의 그날에도 로니는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었다. .. 평소처럼 느긋하게 잡담을 나누던 중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침묵이 불편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에 할말을 찾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왠지 달랐다. 예전처럼 어색하면서 할말을 찾는 대신 나는 내가 불편함을 느끼며 할말을 찾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과 감정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을 지켜본 것이었다.
.. 몇분간 나는 그 어색한 침묵을 메꿔보려고 애쓰는 나를 지켜보며 그저 앉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메꿔보려고 애쓰고 앉아있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침묵을 메꾸려고 애쓰는 마음의 활동을 조용하게 지켜보는 자였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열어 말했을때 내가 내뱉은 말은 이랬다.
'머릿속에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적이 혹시 있나요?'
.. 이제는 그것이 나였다. 나는 끊임없이 마음속을 지나가는 생각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동일한 자각의 자리에서 나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감정의 물살이 가슴을 지나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샤워를 할때면 그 목소리가 기어코 무슨 말을 내뱉고야 마는지를 지켜보았다.
.. 나는 오래지나지 않아 이 새롭게 발견한 머릿속의 목소리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영화관에 앉아있는데 바로 옆자리 사람이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떠들어대는 것과 같았다. 그 목소리를 관찰하고 있다보니 내 존재 내면 깊은 곳의 무엇이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싶어했다.
'이 목소리가 멈추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내면의 침묵을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이 있은 후 내 삶의 패턴은 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놀러와도 더이상 즐기지 못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그 목소리를 잠재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나는 목소리를 지켜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완전히 멈춘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두가지 의문
첫째, 왜 이 목소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일까? .. 나는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결국 보고 느끼는 것은 나이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것을 굳이 목소리로 내뱉어야 할까?
둘째,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활동을 알아차리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너무나 초연히 떨어져 있으면서 오가는 모든 생각을 그저 지켜볼 수 있는 나는 누구일까?
.. 나는 내가 발견한 그 목소리에 대해 알고 싶었고 내가 누군지, 즉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있는 내면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싫었다. 정말로 간절히 멈추고 싶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싸움이 아직 시작도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선의 기둥
필립 카플로의 '선의 세기둥 three pillars of zens'
.. 분명 이책은 목소리의 주절거림을 멈추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구구절절 마음을 입다물게 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마음의 배후에 있는 자를 참자아 (the self)라는 용어로 칭했다. .. 선의 세기둥에서 말하는 바는 분명하고 명료했다. 마음에 관해서 읽고 말하고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그것을 조용히 침묵시키는 데 필요한 일을 하라. 그 필요하다는 일 역시 명확했다. '명상'이었다.
.. 나는 붓다처럼 나무 하나를 골라 그 아래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리고 아주 극적인 어조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날 그 나무 아래에서 일어났던 그 강렬한 체험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이 떨리고 눈물이 차오른다.
.. 나라는 의식의 자리 뒷편에서 어떤 소리가 들여왔다. 그것은 매우 준엄하게 말했다.
'너는 너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은가? 알고 싶지 않은가?'
.. 내 상태는 수정처럼 맑았고 나는 그것을 티끌만큼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후 몇주동안 나는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저너머'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갈망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명상을 좀더 길게 하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시간이 되고 앉을 곳만 있으면 하루에도 몇번씩 명상을 했다. .. 하지만 2-3주가 지나자 난공불락일것만 같던 내면의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내 의도는 단호하고 확고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그 너머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리라.
'삶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 나는 그 탁월한 영감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 후 수년의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누구든지 그 창조적 영감에 공명된 상태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 나는 음식이 수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적게 먹을수록 명상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수월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해보았다. 이틀에 한번씩 저녁에 샐러드만 조금 먹고 나머지 시간은 굶는 것이 내가 도달한 균형점이었다. 내 주의를 바깥으로 유인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기할 작정이었다. 이 덕분에 나는 깊은 내면상태에 온전히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
선의 세기둥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일생의 실험
..마음의 대부분이 나의 호불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마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에 대해 왁자지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음의 호불호야 말로 어떻게 하면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주절거림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겠다는 대담한 시도의 일환으로 나는 개인적인 호불호를 둘러싼 마음의 수다에는 완전히 귀를 닫겠다고 결심했다. 대신 삶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내게 가져다주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데에만 의지를 발휘하리라 마음먹었다.
수행은 아주 간단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날씨였다. 비가오면 툴툴대지 않고 그저 비가 내리나보다 하는 것이다. ...
수용하는데 의지를 발휘하리라 마음먹었다. 수용연습은 효과가 매우 강력해서 확실히 마음을 조용해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나는 좀더 밀고나가 더 많은 것을 대상으로 수용연습을 해보기로했다. 이제부터 삶이 특정한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에 대해 내가 저항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유일한 이유가 나 자신의 호불호라면 나는 그 호불호를 내려놓고 삶에 주도권을 넘기겠노라고 결심했다.
이것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과연 어떻게 될것인가?
좋고 싫은 마음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이것을 하나의 위대한 실험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 실험규칙은 간단했다.
삶이 내앞에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나를 내 자아 너머(피안,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온 손님처럼 대할 것
혹여 내 개인적 자아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그 상황을 기회삼아 자아를 내려놓고 삶이 주는 것에 내맡기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맡기기 실험이라고 부르는 연습의 시작이었다. 나는 이 실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볼 준비가 되어있었다.
.. 내인생의 주도권은 더 이상 내손에 있지 않았다.
삶의 흐름에 나를 맡기기 위한 것..
.. 내맡긴 덕분에 한가지 영역에서만큼은 아주 명료해졌다. 이제 내 삶을 이끄는 것은 내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좋고 싫은 마음이 내게 미치는 강력한 힘을 내려놓음으로써 나는 그보다 더 강력한 힘, 바로 삶 자체에대 내 삶을 내맡겼다.
내맡기기 수행의 두단계
첫번째 단계. 가슴과 머리에서 형성되는 호불호 반응을 내려 놓는다.
두번째 단계. 그렇게 얻어진 명료한 시선으로 내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바라봄으로써 지금 삶이 내게 무엇을 요청하는지를 본다.
'호불호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그 심오한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삶은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를때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은 내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 모두의 굳건한 기반이 되었다.
인생을 바꿔놓은 꿈
꿈속에서 나는 완전히 집중한 채 걷기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을 온전히 의식하며 나는 동굴 입구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별일없이 동굴안으로 들어갔고 내 앞에 펼쳐진 어둠속으로 계속 전진했다. 곧 주위가 어두컴컴해졌다. 나는 동굴 옆에 걸려있던 나무 횃불을 집어들어 불을 붙인 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 희박해졌다. 거기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강렬한 목적의식이 존재했다. 내가 찾던 것을 발견할때까지는 이 미지의 동굴끝이라도 들어가겠노라는 마음이었다. 그 어떠한 것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생각도 마음을 스치지 않았으나 나는 직관적으로 그곳이 내가 가고자 했던 곳임을 알았다. 가까이 가니 위에서 내려오는 빛줄기가 동굴바닥으로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빛의 근원쪽으로 다가갈수록 공기는 더욱 희박해졌다. 숨이 거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걸어갔다. 이 경험은 내가 명상할때 종종 일어났던 현상과 유사했다. 평소에도 명상이 깊어질수록 호흡 역시 느려지며 종국에는 들숨과 날숨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정지되곤했다. 이런 무호흡 상태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숨을 한번 몰아쉬곤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자 동굴속을 걷는 것이 명상의 그 단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 바로 앞에 동굴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가 보였다. 나는 산소부족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았지만 그래도 의지를 내어 빛속으로 마지막 한발을 내디뎠다. 그 즉시 나는 눈부신 빛의 홍수속에 완전히 잠겼다. 나는 빛속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위쪽으로 뻗었다. 하지만 손이 동굴 지붕에 얹힌 쇠창살에 부딪혔다. 여기서 나가는 길은 없었다. 단 하나의 생각도 마음을 스치지 않았다. 조그만 한숨도 입술에서 새나가지 않았다. 이 동굴안에서 나를 들어오게 만든 그 강철같은 목적의식 그대로 나는 뒤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단순한 앎만이 있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꿈에서 깨어났을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 사고방식은 매우 깊은 차원으로부터 바뀌어 있었다. 더 많은 수행을 해야 내가 그토록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에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그날 아침 밴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 얻은 대답은 '그것은 아니다' 였다. 진정한 자유를 향한 나의 길은 밧줄을 그저 더욱더 꽉 붙잡는 것보다 더 미묘한 것이었다.
나보다 훨씬 현명한 무언가가 그날 밤 내정신속으로 들어와서 내가 나 자신과 맺고있던 관계를 바꿔놓은 것이다. 나는 나의 하위자아(little i) 즉 홀로 통속드라마를 쓰는 문제투성이의 낮은 차원의 나를 더이상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나는 이 모든 불안한 개인적 에너지를 상승을 위해 사용해야 했다. 그가 문제인 동시에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완벽히 명료해졌다.
내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그 인격체에게 일말의 연민이 느껴졌다. 훗날 나는 '우리는 자아를 짓밟아서는 안된다. 참자아와 함께 자아를 상승시켜야 한다'는 바가바드기타의 한구절을 배우게 될 것이었다.
.. 과거 어느때보다 훨씬 온전해진 것 같은 느낌속에서 나는 꿈에서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그 다른 길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몸부림치는 대신 더 많이 내맡기는 길이었다. 나는 이미 삶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를 몰라도 그 흐름에 내맡기겠노라고 결심했다. 이제는 그 원칙을 내면에도 적용해야 할때였다. 마음과 그렇게 싸울 것이 아니라 긴장을 풀고 그저 편하게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목소리가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것이 무슨 말을 하건간에 나는 편안하게 힘을빼고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침묵수행을 깨고 나머지 기간 동안 사람들과 어울렸다. ...
.. 그렇게 씨가 뿌려지고 아주 심오한 가르침을 얻기는 했지만 내가 '나와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 나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이 일종의 의식처럼 나의 일을 바치기 시작한때가 바로 샌디의 오두박을 지으면서부터다. 나는 아무일에도 나서지 않았는데 삶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는 듯 저절로 펼쳐졌다. 나는 그 힘을 섬겼다.
진리의 탐구
내가 마음의 목소리를 따랐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호불호 대신 삶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나는 어느새 목수이자 스승이자 저자가 되어 있었다. 나의 내면 역시 성장했다. 영적인 것과 영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짓던 명확한 선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 1975년 9월 우리는 새 사원에서 첫번째 일요 명상모임을 가졌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의미있는 종교적 물건들을 선물로 가져왔다. 한 종교학 교수는 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불상을 가져왔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놓았고 나는 집으로 내려가 내가 이사오면서부터 명상하는 방에 놓아두었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가난다의 사진을 가지고 왔다. .. 이 사원은 모든 종교를 품는다는 의미에서도 우주적이었고 우주 자체를 품는다는 의미에서도 우주적이었다. 그렇게 사원의 이름이 지어졌다.
우주의 사원 'Temple of the universe'
built with love건설회사
.. 나는 작업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고 사업을 운영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했다. 삶은 나로 하여금 영적인 자아관념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나는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 언제나 깨어있고자 했다. . 이 모든 일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이 모두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흐름에 내맡겨 졋을때 주어진 일이라는 사실이다.
첫댓글 나는 이것을 하나의 위대한 실험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 실험규칙은 간단했다.
삶이 내앞에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나를 내 자아 너머(피안,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온 손님처럼 대할 것
혹여 내 개인적 자아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그 상황을 기회삼아 자아를 내려놓고 삶이 주는 것에 내맡기기로 했다
귀한 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도한석 님 덕분에 저도 다시한번 '삶이 내앞에 가져다주는 사건들을 나를 깨달음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온 손님처럼 대할것' .. 될일은 된다....
다시한번 되새기고
신에 내맡김....
감사의 기도
에고해체를 위한 놓아버림 명상에 들어갑니다.
@문형철 깨달음의 문턱을 넘으시어 참된 자유를 얻으시길 기원드립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