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의 지붕 거닐기 (고위봉)
▲ 남산 고위봉(高位峯) 정상(494m) |
신선암 마애불을 두 망막으로 실컷 더듬고 약소하지만 소망 하나를 살짝 맡기며 다시 능선으 로 올라왔다. (막다른 곳이라 길은 하나 밖에 없음) 오늘의 주메뉴였던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신선암 마애불 모두 별 탈 없이 인연을 지었으니 이제 발걸음도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그렇다 고 바로 쿨하게 속세로 내려가느냐? 그건 절대로 아니다. 기왕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근처에 적당한 것을 더 사냥을 해야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봉화골 능선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남산 주능선이 나온다. 이 능선이 남산의 남쪽 하늘길로 처음에는 그 길을 따라 간만에 용장사지(茸長寺址)를 가려고 했다. 허나 그곳은 생각보다 멀 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남산의 거의 남쪽 끝에 하나의 점처럼 있었던 것이다. 남산이 이렇게 넓었나 싶어 잠시 혼란의 고통을 겪으며 급히 정처(定處)를 고르다가 마침 남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이 가까운 곳에서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곳 역시 미답처( 未踏處)로 남아있었다. 기왕 산에 올랐으니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과 인연을 짓는 것도 꽤 보 람찬 일이라 고위봉으로 흔쾌히 길을 잡았다.
고위봉은 주능선을 따라 서남쪽으로 30여 분 정도 가볍게 거닐면 된다. 중간에 '백운재'란 고 개가 있어 잠시 내리막을 타다가 다시 오르막이 펼쳐지며 길은 그리 각박하지 않아서 마치 구 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신선암 마애불만 구름을 타라는 법이 있는가? 나도 구름 비슷한 산길 을 걷고 있다. |
▲ 고위봉 표석의 위엄 |
고위봉(고위산, 494m)은 남산의 일원으로 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이다. 정상부는 허전한 공터로 그 주변을 나무들이 꽁꽁 둘러싸며 시야를 가로채고 있어 조망은 완전 꽝이다. 허나 서쪽(열반골)으로 조금 내려가면 바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니 그렇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 고위봉을 알리는 표석이 동그란 기단(基壇)까지 갖추며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여 기서 북쪽으로 가면 용장골, 서쪽은 열반골과 천룡사, 동쪽은 주능선(칠불암, 신선암, 남산관 광도로 방면)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잠시 정상 기분을 만끽하다가 열반골 방면 서쪽 길로 내려갔다.
참고로 고위봉을 빠르게 가고 싶다면 나처럼 통일전에서 시작하여 봉화골, 칠불암을 경유하여 접근해도 되고, 용장골과 틈수골(천룡사)에서 접근해도 된다. 그렇게 고위봉을 찍고 반대 방 향<통일전에서 용장골이나 틈새골(천룡사) 방면, 용장골에서 통일전 방면>으로 내려가면 아주 환상적인 남산 동서 횡단 코스가 된다. |
▲ 고위봉 서쪽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장골과 내남면 지역 |
고위봉에서 서쪽(열반골)으로 들어서면 앞이 확 트이면서 명품 조망이 다시금 펼쳐진다. 이곳 은 앞서 동쪽으로 가슴을 연 봉화골 능선, 신선암 마애불과는 완전 반대인 서쪽으로 내남면과 배동 지역, 서남산 일대가 시야에 들어와 속세살이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가 제대로 호 강을 누린다. 비록 보이는 범위는 한정적이지만 학의 등이나 구름에 올라탄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
▲ 고위봉 서쪽에서 바라본 천하 ② 내남면 지역
▲ 고위봉 서쪽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내남면과 울주군 두서면, 두동면 지역
▲ 고위봉 서쪽에서 바라본 천하 ④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남산 금오산(금오봉, 468m)이다.
▲ 열반재 부근 |
고위봉에서 다소 흥분기를 보이는 내리막 길을 15분 정도 내려가면 열반재이다. 여기서 남쪽 으로 내려가면 천룡사이고, 북쪽은 관음사와 용장골, 직진(서쪽)은 360m 봉우리로 원래는 천 룡사로 가려고 했으나 그곳에 대한 마음이 흐릿해지면서 북쪽 길을 택했다. 천룡사는 이미 한 참 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어 미답처인 열반골과 관음사를 고른 것이다.
열반골은 열반재를 중심으로 용장골과 천룡사까지의 골짜기를 일컫는다. 이름이 참 불교스러 운데, 이곳에는 열반(涅槃)에 도달하는 과정을 비유한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전설에 천룡사가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을 보면 천룡사에서 사찰 홍보와 영업을 위해 온갖 상상력을 쥐어짜서 만든 전설인 모양이다.
때는 신라의 어느 시절, 각간(角干) 벼슬을 지내던 귀족에게 마음도 곱고 얼굴도 어여쁜 외동 딸이 있었다. 그녀는 금수저로 평생 여유롭게 살 수 있었으나 속세살이에 회의를 느끼고 부처 의 세계인 열반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그 결심이 참 쉽지는 않았 을 것인데, 결국은 집을 몰래 가출하여 남산 열반골로 들어섰다. 계곡에 이르자 경의암(更衣岩, 갱의암)이라 불리는 바위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잿 빛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골짜기로 들어섰다. 비록 옷은 거지 같은 것을 걸쳤지만 태생이 곱 게 자란 아씨인지라 그녀의 살향기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하여 그 냄새에 여러 동물이 낚이 면서 앞다투어 길을 막고 으르렁거렸다. 처음에 만난 동물이 고양이, 그 다음은 개이며, 여우, 산돼지, 작은 곰, 뱀이 차례대로 나타 났다. (그들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열반골에 있음) 점잖은 모습으로 그녀를 유혹한 귀신도 있 었으며, 큰 곰까지 나타나 그녀를 시험하려 했다. 그 다음 맹호, 들소, 이무기, 독수리, 거북 이, 용까지 아주 다양하게 출연을 했다. 특히 10m 정도 되는 큰 바위 위에 아주 요상하게 생긴 바위가 얹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똥처럼 생겨 분암(糞岩. 똥바위)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그녀가 속세에 마지막으로 실례한 자 국인 모양이다. 웃기는 것은 장마 때면 그 바위 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물을 오줌물< 뇨암(尿岩)>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성한 열반골이라고 해도 인간의 생리는 무시를 못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모양이다.
모든 동물의 위협을 물리친 그녀는 마음이 그야말로 평화로워졌다. 그때 서쪽 산등성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지팡이바위, 할머니바위) 그 할매는 지장보살(地藏 菩薩)의 화신으로 '이제 당신은 진리를 깨우쳐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었으니 내가 흔쾌히 열반으로 안내하리다. 이 바위를 타시오!' 그러면서 그녀를 구름바위에 태우고 산등성이를 넘어 천룡사에 있는 부처 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후 그녀는 영원히 열반에 사는 몸이 되었다고 한다.
열반골에는 전설에 등장하는 동물과 여러 존재(할머니, 지팡이, 대변)를 닮은 바위가 즐비하 여 조촐하게 바위 전시장을 이룬다, 하여 세상에서는 열반골을 '남산의 만물상'이라 부른다. 허나 만물상이면 뭐하나? 나는 우둔하여 그 많은 것 중에서 겨우 큰곰바위만 만났다. 열반골 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들 바위는 용장골에서 열반골, 관 음사를 거쳐 열반재 주변까지 흩어져 있으니 숨바꼭질을 하는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다음에 다시 찾는다면 이들과 제대로 숨바꼭질을 벌여 술래 신세를 면하고 말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