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등사 중심, 보광전과 극락전

▲ 현등사 보광전(普光殿) |
운악산(936m)은 가평군과 포천시에 걸쳐 있는 수려한 뫼로 경기도 5악(관악산, 감악산, 개성
송악산,
화악산, 운악산)의 일원이다. 산세가 아름다워 경기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 동쪽 산자락 470m 고지에 현등사가 포근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절, 인도 승려 마라하미(마라가미, 摩羅訶彌)가 석가
여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大藏經)을 들고 신라를 찾자 법흥왕이 그를 위해 540년에
창건했다
고 전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절이 안긴 산 이름을 운악산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시절
포천과 가평 지역은 엄연한 고구려(高句麗)의 영역이었다. 하여 남의 땅에 절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엄청 선을 넘은 것이 된다. 또한 법흥왕 창건설을 입증할 유물과 기록도 전혀 없는
실정
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898년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창하
여 운악사(雲岳寺)라 했다고 한다. 그는 왕건(王建)이 세울 나라(고려)가 개경(開京)에
도읍
을 할 것을 알고 송악산(松嶽山) 밑에 약사여래를 내세운 절을 3개나 지었다. 하지만
완공 뒤
에 지세를 살피니
동쪽이 영 허전하여 이를 채워줄 곳을 찾다가 운악산에 이르러 옛
절터를
발견하고 중창했다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다.
이후 다시 폐허로 있다가 1210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했다고 한다. 그는 도봉산 원통암
(圓通庵)에 머물러 있었는데, 3주 동안 밤마다 동쪽에서 수상한 빛이 보여 그 빛을 추적해 운
악산까지 들어오니 잡초가 우거진 곳에 관음당이 있었고, 그 옆에는 불을 밝히고 있는 석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는 등불이 보이는 꿈을 계속 꾸어 마음 속에 계속 담아두던 중, 운악산
에 이르자 절터 옥등에 불이 밝혀져 있어 이곳이 나라의 길지임을 알고 중창했다고 함) 그 연
유로 절 이름을 현등사라 했다는 것이다.
하여 보조국사가 이때쯤 창건하거나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중창한 것으로 여겨
진다.
1411년 함허대사(涵虛大師)가 북한산(삼각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운악산
서쪽 능선에서 하얀 사슴을 만났다. 사슴은 그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사라진 자리
를 살펴보니 현등사 절터가 있었다. 고려 중기에 중창된 절이 또 세월에게 잡혀가 터만 남은
것이다.
함허는 이곳에 온 인연으로 절을 중창해 머물렀으며 경내 보합태화루(保合太和樓)에서 '현정
론'과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저술했다. 그리고 1447년 세종(世宗)이 현등사에 있던
함허의 상수제자 신미(信眉)에게 명해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케
했다.
15세기 후반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원찰(願刹)이 되어 그들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1470년에는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부처의 진신사리와 사리함을 기증하
는 등, 조선 후기까지 왕실의 원찰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
1811년 화재로 승당과 관음전이 소실되고 불상과 위실(位室),
청심당(淸心堂), 양로방(養老房
)만 겨우 남았는데, 이듬해에 구암(龜巖),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요사채와 동서 누각. 극
락보전. 삼보방(三寶房)
등을 지었으며, 1825년에 삼보방을 중건하고 1826년 위실각을 새로
지었다.
삼장(三藏, 경/률/논)에 능했던 화담당 경화(華潭堂 敬和, 1786~1848)가 말년에 이곳에 머물
렀는데, 그의 승탑(僧塔)이 경내 주변에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라 놓치고 말았다.
1891년 상궁(尙宮) 하씨의 지원을 받아 중수했으며, 1893년에 호운(浩雲)과
우화(雨華)가
석
축을 보수했고, 1916년에 금명(錦明)이
중수했다. 허나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이 마구 날
라와 건물 대부분이 잿더미가 된 것을 1961년 성암(省庵)이
중수했다.
1984년 극락전을 중수했고, 1987년
보광전과 지장전, 삼성각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꾸준하게
건물을 짓거나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광전, 지장전, 삼성각, 영산보전, 만월보전, 적멸보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동종을 위시해 3층석탑, 목조
아미타좌상, 청동지장보살좌상,
수월관음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화담당경화탑 등의 조선 후기 부도탑과 탱화가 여럿 전하고 있어 고색의 향기도 풍년을 이룬
다.
또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임진왜란 전에 조선
조정에 진상한 금병풍(金
屛風)도 가지고 있었는데, 6.25때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금병풍이 어찌하여 현등사까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을 일으킨 작자가 진상한
선물이라 궁궐에 두기가 찝찝해
왕실과 인연이 있던 이곳으로 보낸 듯 싶다.
* 현등사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산163 (현등사길 34, ☎
031-585-0707) |

▲ 보광전의 뒷모습 |
보광전은 'ㄷ' 구조를 지닌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비록 보광전을 칭하고
있지만 옆구리에는 '관음전'과 '보합태화루' 현판을, 뒷쪽에는 '대자대비전'이란 현판을 내걸
고 있으며, 예불 공간 외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보광전이란 한 지붕 아래 여러 가족과 성격이 담겨져 있는 복합적인 집이다.
이곳에는 3층석탑에서 나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비롯하여 지장시왕도와 동종 등 문화유산
이
많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
이다. 현등사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보광전과 극락전, 지장전, 삼성각에 담겨져 있다. |

▲ 보광전 진신사리보탑 |
보광전에는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옥피부를 지닌 3층탑이 있다. 건물 안에 이렇게
작은 탑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그는 3층석탑 뱃속에 있던 진신사리와 사리장엄구를 봉
안하고자 근래 장만한 것이다.
사리장엄구는 수정사리병과 은으로 된 원통형 사리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통형 사리기에는
'성화(成化)
6년(1470년)
원당(願堂)인 현등사 탑을 고치고 사리 5매를 봉안했으며, 대시주는
대방부인
송씨(세종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와 그의 딸 길안현주 이억천, 절충장군 중추부
첨지사 구수영(영응대군의 사위)이다' 쓰여 있어 왕실에서 발원하여 탑을 중수했음을 고맙게
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사리와 사리장엄구는 1979년 불의의 도굴을 당해 사라졌는데, 삼성문화재단에서 입수해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겨우 되찾아왔다. 석가여래의 사리가 신앙의 대상이라 원래 신앙의
목적대로 봉안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뜻이 통해 이루어진 일이다. |

▲ 진신사리보탑에 깃든 석가여래 사리의 위엄 |
진신사리보탑 1층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들어있다. 사리가 워낙 작아서 그 앞에 확대경을
설치해 친견을 적극 돕고 있는데, 작고 동그란 구슬 같은 존재가 진신사리이다.
근래에는
석
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절이 너무 늘어났으나 현등사처럼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
부터 머금은 절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진품을 만난 듯, 경외심과
호기심이 가득
일어나 한참이나 그들에게 열중했다. |

▲ 보광전 지장시왕도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
현등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지장시왕도가 2개 있다. 보광전에 깃든 이 시왕도는 그
림 한복판에 흰색의 큰 원을 두고 그 안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
자(道明尊者)를 두었는데,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사이 위쪽 공간에 작은 석가여래를 배치했다.
좌우에는 권속을 4단으로 두고, 동자와 판관, 사자, 옥졸, 장군 등이 대칭적으로 묘사되어 있
으며, 아랫단 중앙에는 홀을 든 판관과 본존을 향해 무릎을 꿇은 문관형 판관(判官)이 있다.
이들
위에는 8폭 병풍이 있는데, 본존 쪽 양쪽 끝을 접어서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병풍
뒤쪽으로 지장보살의 머리 위까지 구름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759년 아미타회상도와 함께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

▲ 보광전 신중도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신중도는 법당과 절의
중요한 건물의 지킴이
탱화로
가로 122cm, 세로 123cm 크기이다. 화면
을 2등분했는데, 존상(尊像)의 크기를 비슷하게 그렸으며, 오른쪽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
釋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월천자(日月天子)와 동자상을
배치했다. 왼쪽 상단에는 투구를
쓴
위태천(韋太天)이 있는데,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코에 비해 눈과 입이 작다.
화기가 고맙게도 잘 남아있어 관허당 설훈과 용봉당 경천이 1790년에 지장암에서 조성하여 극
락전에 봉안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설훈과 경천은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을 만든 승려이
다. 하여 같은 승려에 의해 보살상과 탱화가 제작된 아주
흔치 않은 예라 18세기 말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

▲ 현등사 석등 중수기(重修記)
1893년 7월 석등을 중수하면서 남긴 중수기이다. (현재 석등은 파괴되어 없음)

▲ 현등사 동종 - 국가 보물 |
보광전 한쪽에는 검은
피부의 작은
동종이 걸려 있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는
높이 73.5cm의 아담한 종으로 현등사에서 유일하게 국가 문화유산의 지위를 지닌
비싼 존재이
다.
원래는 현등사를 관리하던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때
넘어온 것으
로 전하는데, 그 연유는 딱히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덕분에 현등사는 보물이 하나 늘었으며
덤으로
그의 은은한 종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리게 되었다.
종신(鐘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새겨
장식성을 강조했는데, 2마리의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꼰 용뉴는 안정감을
주며, 두
발
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이 보인다. 그리고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이 종은 고려 말 개성 연복사(演福寺) 종에서 비롯된 중원대륙 스타일의 종 양식을 따르고 있
다. 종의 중심부를 3개의 융기선(隆起線)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
를
넣었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에 크게 자리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식 문양은 1469년에 조성된
봉선사 동종과 흥천사(興天寺) 동종, 1491년에 만든 합천
해인사(海印寺) 동종 등 조선
전기
의
왕실 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
 |
종의 배 부분에는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음새김
했는데, 주종기는 1619년에 천보(天寶)가
짓고
새겼으며, 종을 만든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
람 등이 소상히 쓰여 있다.
종을 만든 이는 주종기를 새긴 '천보'로 보고
있으며, 그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
물로 알려져 있다. |
▲ 옆에서 바라본 현등사 동종 |

▲ 보광전 백의관음보살상과 수월관음도(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하얀 옷을 걸친 고운 모습의 백의관세음보살 뒤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걸려있다. 비단
에 그려진
세로 174.5㎝, 가로 210.5㎝ 크기의 탱화로 2011년 보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관
음원문(觀音願文)'을 통해 탱화의 숨겨진 정보를 알게 되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가 일찍 승하한 아들 헌종(憲宗, 재위 1831~1849)의 극락왕생과 며느
리 2명의 수명장수를 빌고자 1850년 상궁들을 현등사로 보내 탱화를 조성하고 불상을 중수했
는데, 원문에는 '해수관음탱'이라 나와있어 '해수관음(海水觀音)'이 조선 말 관세음보살 누님
의 별칭으로 많이 쓰였음을 알려준다.
이곳 관음도는 화면 구성과 도상에서 매우 이색적이다. 암좌(巖座)에 왼쪽 무릎을 세우고 편
안히
앉아있는 관세음보살 옆에 괴석과 정병이 있고, 정병에 꽂혀있는 버들가지에 관음조(觀
音鳥) 2마리가 있다. 정병은 편병(扁甁) 형태로 몸통에는 팔괘가 태극 문양 둘레로 있는데,
19세기 수월관음도에 다양한 형태의 정병이 나타나나 이런 모습은 희귀하다. 특히 정병의 긴
목에는 '관심수(觀心水)'란 명문이 있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이 담긴 깨끗한 물을
뜻할
것이다.
화면은 수파 위를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구름으로 상단과 하단을 나누고 있으며, 구름 위에는
사천왕이 일렬로 자리해 있는데. 사천왕이 관음도에 출현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림 상단에는
관세음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대원광 바깥으로 백의관세음 형상을 한 화신(化身)들이 있으니
이들은 중생 구제를 위해 여러 방편으로 현신하는 관세음을 상징한다.
화면 밑에는 바다의 물결
위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좌우로 특이하게
도 사해(四海) 용왕이 등장해 화염보주와 홀, 용뿔 등을 들고 있다. 용왕들은
선재동자보다
더 크게 그려졌으며, 선재의 천의 표현 또한 색다르다.
퇴은당 유경과 송암당 태원, 월하당 세원, 창엽 등이 제작했으며, 그들은 1861년 북한산(삼각
산) 화계사(華溪寺) 탱화 조성에도 참여한 바 있다. |

▲ 붉은 피부의 현등사 다라니경판 (조선 초기)
3층석탑 뱃속에 있던 것으로 사리장엄구와 함께 도난을 당했다가
2006년에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 현등사 석조(石槽) |
보광전 옆에는 운악산이 베푼 옥계수를 가득 머금은 네모난 석조가 있다. 그의 피부에는 검은
때가 자욱하여 조선 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깊은 산골에 묻힌 산사에 왔으니 샘물을
한번 마셔야 되겠지. 갈증도 속시원히 단죄할 겸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갈증과 더위, 몸 속에 체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

▲ 현등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자 아미타불의 공간이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좌상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아미타회상도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극락전의 주인인 목조아미타좌상은 나무로 다져 금동 피부를 입힌 것으로 높이는 138cm이다.
조금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닌 그는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데, 그
뒤에 걸린 아미타회상도 밑부분 화기에 1759년에 아미타불을 개금(改金)하고 오관 등
9명의
화원이 아미타회상도를 조성했다는 내용이 있어 그 이전(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조성
되었음을 알려준다.
빛깔이 고운 아미타회상도는 비단에 진채색으로 그린 것으로 가로 298cm, 세로
265cm 크기이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림 한복판 대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보
살과 사천왕, 십대제자, 성중들을 배치했다. |

▲ '소원대'로 살아가고 있는 견고한 돌덩어리 |
소원대는 바닥에 누워있는 동그란 돌덩어리이다. 그의 윗도리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예
전에는 석등(또는 옥등)을 받치고 있었다. 허나 그 석등은 전쟁으로 사라지고 이렇게 바닥돌
만 남았으며 지금은 중생들에게 소원 성취에 대한 희망고문과 절의 재정을 늘려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소원대에 올라서 석가여래를 향해 합장반배를 하고 소원을 들이밀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
나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