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국가 명승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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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 면 여기가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골 마을이나 깊은 산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 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 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풍류의 장소로 지어진 세검정(洗 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 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 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과 관련이 없으며, 백 사실계곡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바위가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 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 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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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정자터 | ▲ 안채터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 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 진이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 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 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밀의 공간 으로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강조하며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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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 별서 담장터 (사랑채 동쪽) |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 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 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펴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니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4, 115, 산25일대 |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깃든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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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돌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 락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이 남아있다. |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안채터에서 바라본 오롯이 남은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건진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가렸으며, 사랑채터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들은 안채터 서쪽 구석에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 이 가득 돋아 오른다. |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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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로 오르는 서쪽 돌계단 |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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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터 구석에 수습된 사랑채와 안채의 주춧돌과 석축의 흔적들 | ▲ 아랫도리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