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족산(白足山) 자락에 깃든 특이한 이름의 절집 청주 백족사(白足寺)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① |
월리사를 둘러보고 다른 고을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청주 땅을 바로 뜨기가 무지 허전하여 1곳 을 더 챙겨보기로 했다. 하여 간단하게 둘러볼 수 있는 미답처(未踏處)를 물색하다가 가덕면( 加德面)에 있는 백족사가 번개처럼 떠오르면서 그곳을 다음 메뉴로 정했다. 백족사는 작은 산 사로 지방문화재 2점을 지니고 있다.
월리사에서 백족사는 북쪽으로 20km 이상 떨어져 있다. 문의면의 산하를 지나 가덕면으로 진 입, 미원면(米院面)으로 뻗은 단재로를 달리다가 병암리에 이르러 백족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좌회전(북쪽)하여 한계리로 빠지는 '은행상야로'로 조금 들어서면 충북 교통연수원 직전에 백족사로 이어지는 숲길이 모습을 비추는데, 비록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 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걸어서 20여 분 거리라 차를 밑에 두고 흔쾌히 걷기로 했다.
백족사로 향하는 숲길은 납골탑공원까지 경사가 꾸준히 이어진다. 소나무에 묻힌 숲길이라 솔 내음과 그늘맛이 아주 좋으며, 경사는 조금 있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묵묵히 길을 임하면 백족사 직전에 자리한 납골탑공원 이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여기까지 오면 절은 다 온 것이다. |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②
▲ 백족사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③
▲ 백족사 납골탑공원을 지키고 있는 석조아미타불입상 |
백족사 직전에는 부도탑(승탑) 스타일의 납골탑을 지니고 있는 납골탑공원이 있다. 이곳은 백 족사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망자(亡者)들이 깃든 부도탑 앞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석조아미 타불이 자리해 있는데, 보통 이런 곳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어 망자들을 맡겨두기 마련이 나 백족사는 특이하게 아미타불을 두어 이곳을 책임지게 했다. |
▲ 온갖 모습의 석탑들이 마중을 하는 백족사 |
납골탑공원에서 북쪽 길을 내려가면 그 길의 끝에 백족사가 있다. 이 절은 백족산 남쪽 자락 350m 고지에 둥지를 튼 작은 절로 절 바로 뒷쪽이 백족산 정상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백 족산 산신도 새카맣게 모르는 실정이나 경내에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석불과 석탑이 있어 고 려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원래 이름은 심진암(尋眞庵)이었다. 조선 7대 군주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속 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찾고자 청주 땅을 지나던 중, 백족산 밑 계곡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 는 발냄새가 진동하는 두 발을 꺼내 계곡에 씻었다. 그랬더니 발이 백옥(白玉)처럼 깨끗해진 것이 아닌가. 이에 기분이 너무 좋아진 세조는 이곳 산에 백족산이라 이름을 내렸다고 하며, 심진암도 덩달 아 백족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그래서 하얀 발의 절이란 특이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 다.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쓴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에 백족사 관련 내용이 들어있 어 최소 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음을 알려주며, 조선 후기에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는 데, 절이 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다.
절터란 우울한 모습이 되어버린 백족사는 고된 세월에 헝클어진 석조여래좌상을 밖에 내밀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옛 백족사를 잇는 절이 세워졌다. 그와 관련된 믿 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1920년대에 백족산 밑이 고향인 송씨가 어느 날 꿈속에서 백족 산을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 '백족산에 쓰러진 법당이 있는데, 그곳에 부처님이 파묻혀 있으니 당신이 그를 구해주면 소원 이 이루어질 것이오!'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고향으로 달려가 백족산을 뒤적거리다가 절터와 다 쓰러진 건물을 발견했 고, 그 건물 안에 석불이 있었다. 하여 그곳에 돈과 시간을 들여 대웅전을 짓고 석불을 봉안 하여 정성을 들여 기도를 올렸더니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 옛 석탑의 석재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끼워 맞춰 다시 세웠으며, 승려 승근이 주지 로 들어와 2010년대까지 꾸준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요사와 산신각 등 5~6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3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 2점을 지니고 있다. 절 남쪽에는 망자와 절의 재정을 위해 납 골탑공원을 만들어 조금씩 덩치를 늘리고 있으며, 3층석탑과 대웅전 주변 공간에는 돌로 간단 하게 빚은 작은 탑들과 여러 모습의 석불을 주렁주렁 배치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특히 탑은 늙은 3층석탑부터 1995년에 세운 7층석탑, 승근의 3층 사리탑, 그런데로 형태만 갖춘 석 탑까지 다양하여 절은 비록 작지만 탑 갯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 백족사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한계리 1 (은행상야로 441-122) |
▲ 경내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돌탑 무리들
▲ 칼과 삼지창을 든 어느 석불 |
절을 지키고자 손수 칼과 창을 쥐어든 모양이다. 석불보다는 인왕상이나 장군상의 변형 버전 같으며, 둥근 넓적한 얼굴과 두상을 지닌 조금은 해학적인 모습이다. 피부에 고색의 기운이 느껴져 꽤 늙어보이지만 현실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마련된 것이다. |
▲ 늘씬한 맵시를 지닌 석조미륵불입상 20세기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 옆에는 거북이 화사석(火舍石)을 받쳐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의 석등이 있다.
▲ 백족사3층석탑 - 충북 문화유산자료 |
석조미륵불입상 앞에는 옛 백족사의 흔적인 3층석탑이 있다.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덩치로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데, 탑 높이는 2m, 1층 탑신(塔身) 높이 31cm, 폭 41.5cm 크기 로 조선 후기에 절이 사라지면서 산산조각난 것을 1940년대에 조각난 석탑 덩어리들을 발견하 여 그들을 조각 맞추듯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분실된 부분이 무지하게 많아서 1층 부분은 시멘트로 만들어 때웠으며, 머리장식 같은 경우는 새로 만들었다. 그런 연유로 탑의 왕년 시절의 크기와 모양새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 들다.
바닥돌로 보이는 판석 위에 탑신형의 중대석과 갑석을 지니고 있으며,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 각되어 있고 옥개석(屋蓋石)에는 4단의 층급 받침과 낙수홈이 조각되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며, 3층 옥개석은 파손이 심해 처마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
▲ 3층석탑 스타일로 지어진 승근 사리탑 |
탑의 주인공인 승근(1924~2015)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9살에 동자승으로 출가했다. 18살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1943년 백족사에 들어와 여기서 70년 넘게 머물면서 백족사를 지금의 모 습으로 일으켜 세웠다. 2015년 8월 4일(음력) 백족사에서 열반에 들었는데, 금색과 은색, 흑색, 옥색, 분홍색, 초록 색 무지개빛 사리 48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절에 큰 도움을 주었던 최정화 보살이 2015년 7월 17일에 입적했는데, 그의 몸에서는 무려 8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사리가 나오는 이 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분분함)
2016년 작은 키의 3층 사리탑을 마련해 그들의 사리를 봉안했는데, 그 흔한 부도탑이 아닌 3 층석탑 모습으로 만든 점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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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족사 산신각(山神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의 공간이다. | ▲ 길쭉한 모습의 요사(寮舍) 선방과 종무소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
▲ 백족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건물 내부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니 꼭 친견하기 바란다.
▲ 백족사 석조여래좌상 - 충북 문화유산자료 |
대웅전의 주인장인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석불 앞쪽 부 분이 백회(白灰)가 거의 떡칠 수준으로 칠해져 있어서 원래 모습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21 세기 이후 백회를 벗겨내고 불단을 손질하면서 석불의 원래 모습은 물론 불단에 가려졌던 연 화대좌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석불은 어느 세월이 댕강했는지 절단되어 있던 것을 시멘트로 붙였으며, 접합 부분에 시멘트 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많이 부어올랐다. 또한 눈과 입도 근래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되었으 며, 양쪽 귀도 매우 짧아지는 등, 강제 성형을 꽤 당했다. 머리는 곱슬머리의 나발로 정수리에는 육계가 솟아있고, 상호는 전체적으로 원만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시멘트로 보수하면서 가려졌으며, 어깨와 무릎 등 아래로 갈수 록 폭이 넓어지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이 비교적 유려하게 표현되었으며, 오른 쪽 팔과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그리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연화대좌는 석질이 불상과 달라서 입자가 거칠며, 넓은 판석을 지대석(址 臺石)으로 삼았으나 원래 것은 아니다. 하대석(下臺石)에서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화문( 伏蓮花紋)이, 그리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연꽃잎이 위로 향한 앙련화문(仰蓮花紋)이 서로 대 칭적으로 조각되었으며, 중대석(中臺石)은 팔각주형으로 문양은 없다. 석불의 크기는 높이 86㎝, 좌대 높이 94㎝, 머리 높이 29㎝, 무릎 넓이 69㎝로서 광배(光背) 는 없으나 연화대좌와 불상의 원형은 그런데로 잘 남아 있다.
앞서 백족사 내력에서 언급한 것처럼 백족산 밑이 고향인 송씨의 꿈에 백족산 산신이 나타나 산속에 버려진 석불(현재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니 그를 구제하면 소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 고, 그 꿈에 따라 산속에서 석불과 절터를 발견해 현재의 백족사를 세웠다. 이후 석불에게 소 망을 빌었더니 아들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이 석불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발길이 제법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