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천천 옆에 자리한 고즈넉한 절집, 고려시대 문화유산 3개를 간직한 남원 용담사(龍潭寺)
▲ 용담사의 외경 |
용담사는 원천천(용담천)이 크게 굴곡을 보이며 흘러가는 곳에 자리한 평지 절이다.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과 천왕문(天王門)을 갖추지 못해 서쪽으로 뻥 뚫린 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하고 있는데, 경내 주위를 기와 담장으로 빙 둘러 혹시 모를 부정한 기운을 경계한다.
이 절은 백제 성왕(聖王) 때인 6세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 면 절이 들어서기 이전, 부근 용담천 깊은 곳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이무기는 심성이 영 좋지 못해 툭하면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들에게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이무기를 단죄하고자 이곳에 절을 짓고 용의 못을 뜻하 는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때부터 이무기의 행패가 사라졌다고 하며, 그 이무기를 영원히 감시하고자 법당인 대웅전을 용담천이 굴곡져 흐르는 북쪽을 향하게 지었다고 한다. 분명 백 제 성왕 시절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정작 창건설화는 신라 후기인 9세기에서 놀고 있으니 서로 시기가 어긋나는 함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백제 성왕 시절 창건설과 도선대사 창 건설이 부질없는 메아리임을 스스로 알려준다. 허나 경내에 고려 때 조성된 석불과 석탑, 석등이 전하고 있어 이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 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에 억불숭유 정책으로 망했다가 19세기 말에 중창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89년 수해로 대웅전이 무너져 다시 지었으며, 1996년 칠성각을 부시 고 북쪽에 새로 지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중층 구조의 미륵전, 무량수성미전,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인 석조여래입상과 지방문화재인 석등, 7층석탑이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를 아낌없이 알려준다. 바로 그들을 보고자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 용담사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298 (원천로 165-26, ☎ 063-632-9911) |
▲ 용담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9년에 세워졌다. 그는 특이하게도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남향(南向)으로 충분히 지을 수 있음에도 북쪽을 택한 것은 창건설화에 나 오는 용담천(원천천)의 이무기를 감시하고자 함이라고 한다. 절 북쪽과 동쪽, 서쪽에 용담천 이 흐르고 있고, 그중 수심이 깊은 북쪽에 이무기가 살았다고 하니 비보풍수(悲報風水)의 일 환으로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
▲ 무량수성미전(無量壽聖美殿) |
무량수성미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정하게 생긴 팔작지붕 집으로 이름도 참 길고 특이하 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정답은 '무량수(無量壽)' 3자에 있으니 바 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 아미타불을 너무 높이려 하다 보니 건물 이름에 성(聖 ), 미(美)까지 들어가 저런 복잡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
▲ 용담사 석등(石燈) - 전북 유형문화유산 |
고색이 완연한 이 석등은 높이 2.84m의 8각 간주식(竿柱式) 석등으로 고려 초나 중기에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 간주식 석등 양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하대석(下臺石)과 상대 석에 꽃잎을 위로 쳐든 8개의 앙련(仰蓮)이 새겨져 있으며, 화사석은 8각 기둥 모양으로 8면 중 4면에 네모난 창을 내었고 나머지 4면에는 조각이 없다. 화사석이 다른 부분에 비해 다소 비대해 보여 그를 받치는 기둥(간주)이 좀 안쓰러워 보인다.
석등의 모습은 좀 소박하지만 키에 비해 단단한 모습이며, 세월의 때가 다소 입혀진 것을 빼 면 건강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
▲ 용담사7층석탑 - 전북 유형문화유산 |
하늘을 향해 홀쭉하게 솟은 이 석탑은 1층 기단(基壇)과 7층 탑신, 머리 장식을 지니고 있다. 9.95m의 높고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는데, 지붕돌이 몸돌(탑신)보다 좀 두꺼워 조금 불안정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고, 탑신의 몸돌은 2층부터 급 격히 줄어든다.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윗면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탑 윗쪽이 조금 기울어져 있다. 아 직까지는 별탈이 없어 보이나 수백 년을 묵은 늙은 탑이므로 영 좋지 않은 상태가 되지 않도 록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 |
▲ 석조여래입상의 거처인 중층 구조의 미륵전(彌勒殿) |
미륵전에는 용담사에서 제일 큰 보물인 석불입상(석조여래입상)이 깃들여져 있다. 석불 보호 를 위해 씌운 것으로 그의 덩치가 허벌나게 크다 보니 저런 모습의 건물이 되었다. 겉모습은 2층이나 1층이나 다름이 없으며 1층 부분은 벽을 두르지 않고 모두 개방시켰다. |
▲ 용담사 석조여래입상 - 국가 보물 |
미륵전에 꽉 차게 깃든 석조여래입상(석불입상)은 높이 6m의 큰 석불이다. 불상과 광배(光背) 를 하나의 돌에 새겼는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높이 솟아 있으 며, 얼굴은 오랜 세월에 지쳐 많이도 울었는지 거의 지워져 정확한 표정은 분간하기 어렵다. |
|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으며, 어깨 와 가슴은 벌어져 있고, 다리는 돌기둥처럼 단 단해 보인다. 몸 뒤에 표현된 광배는 깨진 부 분이 많으나 불꽃무늬 흔적이 여럿 있으며, 석 불 밑에 깔린 대좌(臺座)는 타원형으로 자연석 을 그대로 활용했다.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인데, 그 시절 크게 유행했던 큰 석불의 하나이며, 그 시대에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 가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집도 없이 야외에 있어 비와 눈, 바 람을 속절없이 맞았으나 근래 그의 덩치에 맞 는 건물을 씌워 미륵전으로 삼았다. 미륵전은 미륵보살의 거처이니 절에서 그를 미륵보살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
| |
▲ 석조여래입상의 대좌 대좌는 자연석을 활용한 수수한 모습으로 석불 양쪽에 구멍이 있는데, 이는 석불을 보호하던 보호각 같은 시설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 보호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산산히 사라지고 새로 단 미륵전이 석불의 든든한 거처 역할을 한다.
▲ 용담사 석조(石槽)와 그 뒤쪽에 있는 요사(寮舍) 겨울 제국의 탄압으로 물이 얼어붙어 그야말로 휴업 상태였다. 그래서 물을 마시지 못했음...
▲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남원시내로 흘러가는 원천천(용담천) |
용담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선원사가 있는 남원시내로 길을 향했다. 여기서 선원사까지는 겨우 2km 거리로 용담사입구에서 남원시내가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그 정도 거리는 걷는 것이 거의 일상화 된 상태라 흔쾌히 도보로 이동했다.
남원시내로 이어지는 원천로는 원천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남원시내 남쪽을 흐르는 요천에 걸 린 남원대교를 건너면 바로 남원시내가 펼쳐진다. 시내로 들어서 3~4분을 더 들어가면 주택가 속에서 기와 담장과 온갖 기와집을 내민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선원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