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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여행기
□ 들어가며
난 원래 역마살이 있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체질이며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세계여행이라는 도전정신이 있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를 따라 나섰다. 세계여행을 해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말을 믿기에 처음 여행계획을 세우고 인도에 대한 지리. 역사. 문화에 대한 공부를 조금 하였으나 수박 겉 할기식 이었으므로 현지에 가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것과 현지 가이드가 설명하여 준 내용, 또 내가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적어 뒷날 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내가 나이들어 추억을 먹고 살 때쯤 이 자료들을 들추어 본다면 다시 한번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적는다. 물론 현지 발음이라든지 지명 등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 수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참고 하면서 봐주면 좋겠다.
□ 여행 일정(7박 8일, 이동거리 2,500km)
○ 첫째 날
2015. 12. 18. 14:30 인디아 항공으로 인천공항 출발→ 17:30. 홍콩공항 도착(2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 대기)→ 익일 01:30. 댈리 인디라 간디(DELHI INDIRA GANDHI)공항 도착(총 비행시간(11시간 소요). 현지 시간 22:00(우리나라보다 3시간 30분 늦음)
○ 둘째 날
댈리 꾸뚭탑과 인도의 문, 정부 청사, 각국 대사관 관람→ 12:00. 인도 국내 항공기를 타고 13:50. 바라나시 도착→ 사르나트 녹야원과 고고학 박물관, 갠지스강 관광
○ 셋째 날
05:50. 갠지스강 일출. 가트(화장터). 미로도시 탐방→ 07:30~20:10. 버스로 450km 떨어진 카쥬라호(12시간 40분 소요)
○ 넷째 날
07:00. 카쥬라호 에로틱 사원 관광→ 09:10~18:00. 기차 이용 아그라로 이동(8시간 50분 소요)→ 타지마할의 역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관람.
○ 다섯째 날
07:40. 아그라의 타지마할. 아그라 성. 시키리 성. 자마 마스지드 이슬람 사원 관광→ 16:10~21:30. 250km 떨어진 재플로 이동(5시간 20분 소요)
○ 여섯째 날
07:50. 암베르성. 천문대인 잔타르 만타르, 바람의 궁전. 물의 궁전. 핑크 시티. 재플 국립박물관 ‘알벗 뮤지엄’ 관람. 나하르 가르성 일몰 감상.
○ 일곱째 날
요가 체험 후 왕들의 화장터인 차따리야 기념관. 수공으로 카펫 제작과정 관람. 기념품 판매점 관람→ 16:30~17:40 국내선 비행기 이용. 댈리로 이동(1시간 10분 소요)
○ 여덟째 날
01:40.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 홍콩을 경유하여 인천공항에 10:40 도착(소요시간 9시간). 한국시간 14:10
□ 인도 개관
○ 총괄
인도의 면적은 한반도의 16배(남한의 33배)로 그 안에 28개 주를 도고 있으며 인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13억(공식적으로 10억 3,000만명)정도이며 수도는 뉴델리이고 기후는 남북의 길이가 3,219km로 열대 몬순기후부터 대륙성 기후까지(남부:열대 몬순. 북부:대륙성 기후) 다양하고 6~9월은 우기로 비가 많이 오는 편이다. 언어는 힌디어(32%)를 포함한 18개 공용어가 있으며 교과서는 영어로 되어있어 보조 공용어로 널리 통용되나 고학력자 이외에는 잘 모르는 편이고 종교는 힌두교(82.6%). 회교(11.4%). 시크교(2%) 외에 기독교 불교가 공존하는 나라로 힌두사상에 의해 만물은 모두 신이라는 사상에 의해 소나 돼지나 개가 모두 사람과 같은 동급으로 취급되므로 소도 갈매기도 비들기도 모두 사람들이 먹이를 준다. 특히 소는 우리에게 젖을 제공해 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로 숭배의 대상이므로 주인 없는 소가 자기 집 앞에 오면 풀을 준비해 두었다가 공양을 하듯이 주기는 하나 거리를 방황하다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이를 먹기도 하고 야채가게에 와서 야채를 먹으려다 쫓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 사상에 의해 큰 건물 주변에는 비들기 똥이 있어 악취가 심하고 골목골목에 쓰레기가 방치되어 미관상이나 위생상으로 아주 좋지 않아 수도인 뉴델리에서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히말리야에서 발원하여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흐르는 갠지스강. 인더스 강이 있고 사회제도로는 카스트 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외에 불가촉 천민이 있는 등 계급제도가 다양하여 빈부격차가 심한 편이다. 또한 술과 담배는 어디서나 할 수 있지만 파는 곳이 특별히 지정되어 일반화되지 않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밤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으며 인도인의 50%가 농업에 종사하여 자급자족 한다고 한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삼성. 현대. LG그룹 등이 진출해 있다. 또한 이곳의 음식문화는 카레가 들어있는 음식이 많고 자이라는 차와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운 난이 일반적이나 우리 음식문화와 차이가 있어 4일 정도는 참으며 잘 먹었는데 5일째부터는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이곳의 교통문화는 영국식으로 우측에 운전석이 있고 우리나라와 시차는 3시간 30분 늦으며 통화제도는 1달러가 60루피로 우리 돈 20원 정도이고 경제력은 우리나라 70년대 초반 수준으로 많이 뒤떨어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개발 가능성이 많은 나라이다. 앞으로 인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통일하여야 하고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강력한 통치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종교적으로 힌두교의 교세를 약화시켜 동물들의 관리와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여행경비: 여행사 인당 130만원지급하고 현지에서 옵션으로 20만원. 개인사용 10만원. 도합 160만원 정도.
○ 뉴델리에서
-. 11세기 쿠뚭이란 마을에 살라왕조가 건립하였다는 쿠뚭탑(Qutub)은 지하 15m. 5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 379개 계단이 있다고 하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하다 굴러 떨어져 100여명이 죽고 그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출입금지를 시켜 안에는 볼 수 없었다. 이곳은 최초 27개 힌두교 사원이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여 사원을 모두 파괴하고 붉은색 사암을 이용하여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여 3층 높이로 건축하고 밖에는 아리비아 글자로 코란을 세겨 놓았으며 왕이 죽자 그의 사위가 3층 위에 흰색 대리석으로 2층을 더 올렸는데 공식적으로는 1193년 73m 높이의 개선탑이라고 한다. 그 옆에 알라이 미나(Alai minar)라는 미완성 탑이 있었는데 원래 140m 높이로 건축하려다 24m 높이에서 중단된 미완성 탑이 있었다. 이슬람 사원이나 탑은 모두 메카인 서쪽방향으로 창문이 나 있어 기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출입문은 북쪽에 있었다. 쿠뚭탑을 보고 시내로 나오니 높은 건물은 거의 없었으나 여름 혹서기에 그늘로 이용하기 위해 큰 가로수가 많았으며, 1857년부터 1947년 까지 영국이 지배하면서 총독관저로 사용했던 대통령궁,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사망한 인도군인 9만명의 영혼을 위한 42m 높이의 개선문(인디아 게이트), 각국 대사관 건물이 있는 거리를 지나 바라나시로 가기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교통문화를 보니 이곳은 영국식 교통문화를 가진 곳으로 버스에는 반드시 운전사 외에 조수가 있었고 승객이 타는 곳과 운전석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으며 창문에 커튼이 전혀 없었다. 이는 몇 년 전에 버스 안에서 커튼을 치고 남녀가 성행위를 하다 들켜 이런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없다고 하며 이곳의 버스나 기차 비행기 등은 보통 30분에서 2시간씩 지연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여행할 때는 참고해야 할 것 같다.
※ 여행 가이드인 로히트 25세는 인도 바라나시에서 출생한 부라만 계급이었으나 뉴델리 국립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6개월 과정으로 한국어를 공부한 다음 삼성그룹에서 일하다 적성이 맞지 않아 가이드를 하고 있어 한국어 발음은 약간 서투르나 현지사정이나 역사 등은 아주 잘 알고 있어 아주 좋았다. 또한 한국말을 배우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는데 “한국 할머니 안내를 하는데 할머니가 밥 먹어. 라고 하기에 자기도 다음날 할머니에게 밥먹어. 라고 했더니 개세끼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예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과 처음 김치를 먹을 때 코 잡고 먹는 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아주 잘 먹고 있는데 한국 아줌마가 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켜 준다고 하며 설명하던 중 “고추를 따서 말려가지고 갈아서 김치를 담근다고 하여 그럼 한국남자들은 모두 고추가 없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먹는 고추가 따로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과 막걸리를 우유인줄 알고 마셨다가 술이 취해서 혼나고 나서 막걸리와 우유를 구분하였다”고 한다.
-. 이동하면서 가이드의 인도상황에 대한 설명 중 인도군인은 징집제가 아닌 모병제의 성격을 띠어 직업군인이 많은데 주로 시골출신들이 많으며 보수는 적으나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편이며 왕은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실권은 수상중심(현 모디수상)으로 통치가 되는데 학교는 초교 2년, 중학 6년, 미들하이스쿨 2년, 하이스쿨 2년, 대학 4년으로 되어 있으나 카스트 제도에서 바이샤. 수드라 계급출신은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하며 국립대는 학비는 저렴하나 진학하기가 아주 어려우며 사립대는 한국과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인도는 연애결혼은 거의 없는 편이고 90%가 중매결혼인데 신랑은 말을 타고 장가를 가는데 지참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으며 결혼식은 약 1주일(신부집. 신랑집을 경유하여 힌두스님에게 택일을 받은 다음 6시간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성대한 잔치를 한다)정도 치른다고 하고 힌두사상에 의해 이혼자는 더러운 사람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혼율은 아주 낮다. 또한 수도는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문바이에서 켈커타로 옮겼다가 현재 뉴델리로 옮겼다고 한다.
-. 힌두교는 약 5,000년 이상 된 가장 오래된 종교로 배다라는 경전을 이용하고 힌두스님에 의해 의식이 집전되나 사원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이는 집집마다 개인별로 신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많은 우리나라에 비해 그 점은 좋은 것 같았으나 모든 사물은 모두 신이라는 사상에 의해 아주 적게 닭, 양고기는 먹으나 소, 개, 돼지고기는 먹지 않아 길에 주인 없는 이런 동물들이 쓰레기를 뒤지고 도로에 똥을 보아 길을 걸을 때 조심하여야 하는 점, 또한 관리자가 없는 동물들이 거의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사원등은 비들기 똥에 의해 아주 더러운 점에서는 좋지 않았다. 힌두교의 유명한 신은 그 중에서 부라흐마신(창조의 신), 시바신(파괴. 재생의 신), 비쉬누신(유지와 보존의 신)이 있다고 하며
-. 인도의 종족은 흑인계통의 전통 인도민족으로 손으로 밥을 먹는 러비다 족이 있고 유럽에서 들어온 아렌족,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들어 온 몽고계통의 무굴족이 있다고 한다.
○ 바라나시(Varanasi)에서
-. 녹야원
델리공항에서 1시간 50분 동안 비행기를 타고 3,000년 되었다는 힌두교의 성지인 갠지스 강과 불교 성지가 있는 바라나시 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부처님의 최초 설법지인 사르나트(Sarnath)의 녹야원에 갔다. 녹야원은 부처님이 룸비니에서 탄생하시여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곳 리쉬파타나(성자가 머무는 곳)인 녹야원에서 최초 5제자(콘단나. 밧디야. 밥파. 마하나마. 앗사지)와 사슴에게 불. 법. 승. 3보와 고집멸도인 4성제에 대해 설법을 하신 자리(불교 4대 성지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르 포함)라 하여 녹야원이라 명명이 되었다고 하며 이곳 입구에는 걸인과 상인들이 어우러져 혼잡한 곳을 뒤로 하고 안에 들어가니 파괴된 아쇼카 석주(사자 3마리)와 최초 불교사원의 모습을 보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 부처님 의 최초 앉아서 설법을 하셨다는 자리에 사리탑과 같은 원통형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 이를 닦을 때 쓰는 치약나무와 보리수나무를 보고 밖으로 나오니 힌두왕의 학정에 반발하여 아쇼카왕이 불교를 널리 전파하여 대승. 소승. 티벳(라마교)로 발전하였으나 후에 힌두교의 번성으로 이에 흡수되어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그 옆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 앞에 도착하니 입구 중앙에는 아쇼카 석주의 머리인 사자 4마리 상(보이는 면은 3마리)이 있고 그 밑에는 사자. 말. 소. 코끼리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으며 좌측 방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상.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고 우측 방에는 힌두교의 석상과 조각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코는 이슬람교가 점령했을 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 힌두교에서는 수도자들을 벌릿(스님)이라 하고 힌두교 제사장은 멍그. 불교 스님은 사두라고 하며 불교 방에는 부처님 상이 있지만 힌두교 방에는 위대한 3명의 힌두신(부라흐마.시바. 비쉬누)의 상이 있었다.
-. 갠지스 강(1)
우리는 인력거를 타고 우리나라의 동대문 시장 같은 곳을 지나 갠지스 강으로 가는데 길을 좁은데 소. 인력거. 오토바이. 자동차. 오토릭사. 리어카. 개 등이 석이여 통행하므로 대단히 혼잡하였는데 무질서 속에 질서라고 그래도 사고 없이 서로 잘 비껴가고 있었다(도로가 좁아서인지 버스는 통행을 금지시켜 인력거를 탈 수 밖에 없다고 함). 우리가 탄 인력거는 자전거를 개조하여 제작한 것인데 2명이 탑승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길도 좋지 않아 페달을 밞고 가는 인력거꾼이 많이 힘들어 보여 팁으로 2달라를 주었다. 갠지스 강은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경유하여 뱅갈만까지 흘러가는데 강물에는 히말라야에서 좋은 약물재료들이 함께 떠내려 오므로 절대 변하지 않는 성스러운 약수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강에 도착하니 깨끗하지 않은 갠지스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에 배들이 많았는데 배를 이용하여 장사하는 사람. 또 그 배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은 강가 가트(계단식의 강변)에서 화장을 하는 모습과 힌두교 의식 집행하는 광경,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무상과 함께 다들 악착같이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현명한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약 7km에 달하는 강변에 가트라는 계단식 장소가 84개가 있는데 2개는 화장터로 쓰이고 82개는 기도하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태어나서 7일이 되면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살아가다가 죽어서 이곳에서 화장을 하여 강물에 뿌려지면 다음생애에 좋은 곳에서 태어나 환생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장례식의 절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사람이 죽으면 대나무 사다리(칠성판)를 만들어 눕히고 지인에게 통지하여 모이게 한 다음 장남은 머리를 깍고 흰옷을 입은 다음 1주일 동안 집에 있다가 갠지스 강물로 목욕을 시킨 다음 말려서 화장을 하는데 화장 경비는 500~500달라가 들어가는데 강물에 가까울수록 더 비싸다고 하며 화장을 할 때는 망구스 나무 300~500kg과 기름대신에 나무가루를 뿌려서 하므로 시체 대우는 냄새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옆에 가서 보니 시체 타는 냄새는 별로 없는 것 같았으며 시간은 6~7시간이 소요된다고 하고 최대 30구까지 일시에 화장이 가능하나 우리가 갔을 때는 13구의 화장을 하고 있었다. 또한 화장을 하는 장소에는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고 화장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멀리서 슬쩍 몇장 찍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시체를 태우는 옆에는 소들이 앉아서 불을 쏘이고 있었다. 강가에는 힌두교 사원에서 무료급식하는 장소와 함께 장사하는 사람. 걸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갠지스 강(2)
다음날 우리는 갠지스강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어제 지나갔던 길을 따라 가니 길은 한산했으나 개와 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길가 옆에는 담요같은 것을 1장 덮고 잠자는 사람들이 많았으며(이곳의 기온은 여름에는 45℃까지 올라가는 더운 날씨이나 지금은 조석으로는 다소 쌀쌀하고 낮에는 약간 더운편) 길거리에서 자이(차)를 팔고 있어 한잔 사서 마셔보니 우유와 생강을 넣은듯한 맛으로 우리 입맛에는 그렇게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고 그 컵은 황토로 만들어 굽지 않은 것으로 차를 마시고 던져 깨버리는 1회용 컵이었으며 치약나무를 파는 사람. 그것을 사서 이를 닦는 사람들이 보였으며 길에는 소똥이 있어 길바닥을 보면서 걸어야 했다. 이곳 강가의 땅값은 매우 비싼편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배를 타고 한 바퀴 도는데 이 강은 수심이 깊은 곳은 50m나 되며 빨래하는 사람. 추운 물에서 목욕하고 기도하는 사람, 화장하는 사람, 배를 이용하여 꽃등과 방생의 재료인 물고기 등을 파는 사람, 소리나는 종을 파는 사람, 갠지스강의 모래를 담아가는 항아리 같은 모형을 파는 사람, 강에서 살아가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꽃등을 하나씩 사서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 갠지스강에 띄워 보내며 기도를 하고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이곳은 보통 안개가 많이 끼어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없으나 오늘은 일출을 제대로 보는 행운을 얻었다고 한다. 일출의 장엄한 모습을 감상하고 강가로 나오니 도사같이 보이는 힌두스님이 있어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모델료를 1불 달라고 하여 적선하는 샘치고 1달러를 주고 목걸이 등을 판매하는 사람,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귀찮게 하였는데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지 만약 관심을 보이면 끝까지 따라오며 귀찮게 한다고 하여 안산다고 강하게 의사표현을 하면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 이곳에는 정글에서 나체로 생활하는 힌두스님들이 매년 1. 14일 나체로 목욕하러 온다고 한다.
○ 바라나시(Varanasi)에서 카쥬라호로 이동
버스로 무려 12시간 40분 동안 이동을 하는데 도로공사로 인해 빨리 달릴 수도 없고 승차감이 아주 좋지 않으며 먼지가 자욱한 우리나라 70년대 초반의 도로를 달려오며 인도의 빈민(불가촉 천민)들이 움막을 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이 오는 중간에 있는 일 하바드시라는 도시는 검은색의 야무나강과 황토색의 갠지스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매년 1. 14. 힌두스님들이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명절과 같은 집회를 하는 장소로 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많다고 하며 우기에 강물이 불어났을 때 이용하는 부교가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고개를 넘어 올 때 흙먼지 가득한 정상에서 도시락으로 준비한 점심을 먹는데 개와 나누어 먹고 버스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밀어서 시동을 걸게 하였으며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젊은이 4명이 와서 담배를 달라고 하여 1가치씩 보시를 했다. 이곳은 주 경계를 넘어올 때 마다 통행료를 지불하고 있었고 소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인도에서 소를 키우는 이유는 우유와 소똥을 얻기 위함이므로 길가에서 소똥을 반죽하여 기와장 같이 다듬어 만들어 말리고 있었으며 모두 연료로 이용된다고 한다. 이곳의 주인 없는 소는 목걸이가 없었고 사육을 하는 소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으나 코를 뚫은 소는 없었다. 교행을 할 때 편도 1차선인 경우에는 우측으로 추월을 했고 편도 2차선인 경우에는 좌측으로 추월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영국식 교통문화가 아닌가 싶다.
※ 소똥은 벌레를 퇴치하는 효력이 있어 인도인들이 집을 지을 때 소똥과 흙을 같이 반죽하여 벽을 바를 때 사용한다고 한다.
○ 카쥬라호(Kajuraho)에서
카쥬라호는 델리에서 동남쪽으로 595km 떨어진 우리나라 면 소재지 만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9세기경 달신의 후예라는 찬델라 왕조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힌두교 사원이 있는데 그 벽에 농도 짙은 미투나 상(남녀 성교상)이 있어 에로틱한 조각사원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07:00경 가장 거대하고 예술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칸다리아 마하데바 사원인 서쪽 사원군과 동쪽 사원군을 보았는데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사원의 축소판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 사원은 여러 가지 체위로 성교하는 방법(가마:색스. 스트라:방법)을 조각한 에로틱한 사원이란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84개였지만 이슬람의 침공으로 모두 파괴되고 현재 8개가 남아있다고 하며 가마스트라로는 64가지 방법이 있는데 동성애. 그룹색스. 동물과 성교하는 수간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사물놀이. 코끼리 타고 사냥하는 모습 등 인도인의 생활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이렇게 가마스트라를 조각하게 된 이유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왕족이 불교와 제너교를 믿어서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인구가 감소하여 국력이 약해지므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인구증가 정책으로 이런 조각을 하게 하여 스님들이 파계하고 결혼을 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08:30 기차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탔다.
※ 힌두교 사원은 삼각 깃발이 꽂혀있고 사원 입구에는 코끼리신 상이 있는데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코끼리 상에 절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 기차 여행과 아그라 뮤지컬 관람
기차를 타기 위해 카쥬라호역에 도착하니 소 3마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소님과 인사를 나눈 후 역 안에 들어가 기차를 타고 09:10 출발하였는데 25분 정도 연착하여 18시가 다 되어 아그라에 도착하였다(8시간 50분 탑승). 우리가 탄 기차는 3층 침대열차로 깨끗하지는 안 않았지만 그런대로 탈만했다. 특히 침대 기차여행은 가끔 차와 도시락.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행상들과 차장이 좌석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다니긴 했지만 버스 여행보다 훨씬 안락하였으며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데 아주 좋았다. 차창 밖 넓은 들판에는 유채. 사탕수수. 밀등을 재배하고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보였으며 들판에는 산은 거의 없으며 논 가운데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철 아주 더울 때 그늘을 이용하고 경계선을 표시하는 목적으로 심어 놓은 것 같았다. 아그라 역에 도착하여 Mohabbat the taj 라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 이어폰을 쓰니 한국어로 대사가 나왔다. 뮤지컬은 인도 무굴왕조(몽고징기스칸. 테무틴의 후예들이 파키스탄 지역을 정복하고 살다 현지인화 되어 인도로 내려온 종족)가 아그라에 제국을 건설하고 이슬람 문화를 꽃피우며 살다가 5대 왕인 사자한이 왕비인 문타지 마할을 사랑하여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는 내용으로 그렇게 장엄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볼만했다.
○ 아그라(Agra)성
아그라는 델리에서 야무나 강을 따라 약 200km 내려온 곳에 있는 인구 100만명 정도의 지방도시로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이자 타지마할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는 아그라성 내를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야무나 강변에 축조된 성에 들어가니 입구는 부산 영도다리 같이 길을 들어서 문을 닫는 구조로 주변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외침을 막도록 설계된 붉은 사암의 성으로 성폭이 4km정도로 인도에서 3번째 큰 성이다. 이 성은 1565~1857년 무굴제국의 3번째 왕인 악바르 대제에 의해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3중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지하는 물탱크와 감옥이 있었고 현재 군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60%정도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성에 있는 자하길 궁전은 터키에서 수입한 파란색 타일과 금으로 치장한 힌두교와 이슬람문화가 합성된 건축물이다. 이 성에는 왑비가 목욕할 때 쓰는 큰 컵모양의 물통(1개의 돌로 만들어 졌다고 함)이 있었고 지붕 위에는 물 탱크가 있어 물의 온도에 의해 냉. 난방을 하였다고 하며 출입구는 나무로 문을 만들지 않고 카펫을 3중으로 쳤으며 여름 방. 겨울 방을 따로 만들었는데 여름 방에는 밖에서 바람이 잘 들어 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여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창문으로만 밖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궁전에서 사자한 왕이 2번째 부인인 문타지와 같이 살았고 나중에는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무덤을 만드는데 4배나 비싼 수입 물건을 사용하려 하자 어랭젭부라는 왕자가 자기 형을 죽이고 아버지인 사자한을 8년 동안이나 감옥에 유폐시켜 놓아 그 곳에서 타지마할을 보면서 자기가 사랑한 문타지라는 왕비를 그리워하다 죽었다고 한다. 궁전 안에 넓은 뜰은 원래 여자 상인만 들어와서 궁내에 있는 여자들에게 장사를 하였는데 영국이 점령(90년 동안) 후 호수로 사용하다 인도가 독립하여 영국인이 물러가자 쓰레기장이 되었으나 현재는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또한 왕에게 백성이 직접 직소할 수 있는 일반회실로 사용하던 넓은 공간에 지금은 John russell calvin(영국인)의 무덤이 있었다.
○ 타지마할
아그라 성에서 직선거리로 1km 정도 되는 야무나 강가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사자한의 2번째 왕비인 문타지의 마할(묘)라고 한다. 이 건물은 가로 300m, 세로 580m의 부지에 기단부가 사방 95m, 본체는 사방 57m, 높이 67m, 네 귀퉁이 탑의 높이 43m로 22년에 걸쳐 연인원 20만명을 동원하여 1653년 완성되었다. 이 건축물이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1. 4개 기둥이 수직이 아니고 89도 경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는 만약 쓰러지면 본체가 손상되지 않게 설계), 2. 지반이 강가 습지여서 지하에 350개의 우물을 파고 서로 연결하여 그 위에 습기를 먹으면 철같이 강해진다는 올리브 나무를 깔고 건축을 하였다는 것. 3. 큰 창문의 창틀과 그 안의 창살. 꽃 등의 무늬를 한 개의 돌로 조각하였다는 것. 4. 세월이 흐를수록 흰 대리석의 빛깔이 변하지 않고 더 고와진다는 것. 5. 안에 있는 꽃무늬 장식은 후레쉬 불을 비추니 칼라색이 드러난다는 것 등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 14명은 그 안에 들어갈 때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경비를 하고 있었고 볼펜. 화장품. 밧데리를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여 그 냥 들어가니 안에 들어갈 때 신는 덧신발을 하나씩 주었고 외국인 출입문이 따로 있어 입장하기는 편했다. 타지마할의 건물 앞에는 지하 샘에서 나오는 물로 만들어진 분수가 솟아나고 있었고 좌우 철저한 대칭으로 건축이 되어 있었으며 타지마할의 전체 현태는 돔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정면에는 아치형의 창틀과 출입문 11개가 있었으며 입구 좌우에는 왕비가 죽기 전에 왕에게 하였다는 유언이 아라비어어로 기록되어 있고 건물 안에는 사자한 왕의 큰 무덤과 문타지 왕비의 작은 무덤이 2개 있었다. 무덤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데 해설사 같은 사람이 후라쉬로 빛을 비춰주면 칼라색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는 현상을 보여주면서 1달라를 달라고 하였다. 타지라는 말은 문타지라는 왕비의 이름이고 마할이란 묘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타지의 묘라는 뜻인데 문타지라는 왕비는 사자한 왕의 2번째 왕비로 예쁘고 귀여우며 항상 자신을 땅으로, 왕을 하늘로 비유하며 겸손을 잃지 않았고 국정에 현명한 조언을 했다고 하며 14번째 아이를 낳고 나서(10명 살아남음)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자기가 사랑하는 왕에게 죽어서도 계속 사랑해 달라는 것과 자기 친정식구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하고 죽어 타지마할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 시크릿 성
시크릿 성은 아그라로부터 40km 떨어진 성인데 자이풀(자이푸르)에 있는 암배르성의 이슬람 계통의 아크벌 왕이 결혼하였으나 아이가 없어 고민을 하다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스티라는 스님을 만나 힌두교를 믿는 여인과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의해 4번째 왕비(조다왕비)인 만싱이라는 왕의 2번째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언자인 스님에게 주기 위해 시크릿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5년간 거기로 옮겼다가 물이 부족하여 다시 아그라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성은 양쪽으로 7km에 달하는 아그라 성보다 큰 성인데 붉은 사암으로 축조되었고 3가지 문화(이슬람. 힌두. 기독교)가 공존하는 평화스런 성으로 백성 대표 9인이 모여 회의하는 귀빈회실이 있고 현재의 은행같은 중요한 물건을 넣어둔 창고가 있으며 스님들이 기도하는 곳, 외침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전망대가 있으며 여름궁전. 겨울궁전이 따로 분리되어 있고 양옆에 방이 있고 가운데 거실이 있는 양옆에 방이 있고 가운데 거실이 있는 인도 전통 가옥형태로써 체중이 250kg. 키가 7.5피트인 왕이 자는 넓은 침실를 보고 16:00경 이곳으로부터 250km 떨어지고 파키스탄 사막과 접경지역인 자이풀로 버스를 이용, 출발하여 4시간 30분 동안 달렸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고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을 볼 수 있었으며 길옆에는 나무를 심어 주인 없는 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붉은 벽돌로 바람이 통하도록 동그랗게 쌓은 것을 보았으며 인도인이 즐겨먹는 카레는 감기. 당료. 혈압에 좋다고 하고 헤나는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고 탈모를 방지하여 준다는 설명을 들으며 Gold palase 호텔로 들어왔다.
○ 자이풀(Jaipur) 암배르성. 천문대, 바람의 궁전. 물의 궁전
자이풀은 라지스탄 주(주지사는 여성)의 소속으로 인도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핑크 시티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도시로 도로도 반듯하게 나 있었으며 암베르성과 잔타르 만타르라는 천문대, 물의 궁전, 하와마을의 바람의 궁전. 알벗 박물관 등이 있는 도시이다. 또한 도시 안에는 힌두교를 믿는 부유층이 살고 도심 밖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빈곤층이 아이를 많이 낳으며 살고 있으며 변두리에는 정부에서 텐트를 치고 집 없는 사람들이 잘 수 있도록 이불 등을 대여하여 주는 구호소가 있다고 한다.
-. 암배르성은 1592년 무굴황제 악바르의 참모출신 카츠츠와 하왕조의 만싱이 짓기 시작하여 자이 싱이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성은 카스트 제도의 크샤트리아(힘이 센 군인계급) 가 지은 성인데 너무 웅장하여 이를 시기한 무굴제국의 자한길왕이 침입하여 상당부분 파괴되었으나 현재도 체트리아 왕족의 딸의 아들이 12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현재 17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왕족은 부인이 12명이나 되고 또 부인 외에 애인도 두고 있어 애인이 살 수 있도록 산 위에 현재의 아파트와 같은 나하르가르 성을 축조하여 애인 9명이 살아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루비. 에매날드 등 보석이 많이 나오는 힌두교 성으로 다른 성들과 보석을 선물로 주고 화친하여 서로 평화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짚차를 타고 암배르 성에 올라가 보니 이곳에도 비들기들이 많아 냄새가 나고 있었으나 궁은 화려한 편이고 미로와 같은 길을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으며 왕비들이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안에서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도록 도록 설계되어있었고 궁 옆에는 인공호수를 만들어 도르레와 같은 모형의 물 끌어 올리는 기계를 이용하여 성 지붕위 탱크로 물을 끌어 올려 냉. 난방과 함께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식당과 같은 곳에서 12왕비가 음식을 만들어 오면 왕이 맛을 보고 가장 맛있는 요리를 하는 왕비와 동침을 하였다고 하는 설명을 들으며 성화봉 모양의 가로등 길을 지나 무료변소에 들어가니 이곳에서도 돈을 받으려고 하는 사기꾼이 있었다.
-. 물의 궁전. 천문대.
암배르성에서 내려와 젤(물)마하르(궁전) 입구에 도착하여 보니 호수 가운데 궁전이 있고 그 주변에 가마우찌가 놀고 있어 기념사진을 찍고 시내로 들어오는데 이 궁전은 원래 호수가운데 궁전을 먼저 짓고나서 물을 채워 궁전을 만들었는데 여름철 45℃가 넘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천문대에 가기 위해 입구에 도착하니 헤나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어 손등과 팔에다 코끼리. 코브라. 꽃 등의 문신(약을 발라 1시간 건조하면 7일정도 간다고 함)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은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해가 있어야 작동하는 해시계인데 오늘 시차는 24분이라고 게시 되어 있었다. 작은 해시계는 1칸에 1시간을 나타내고 큰 해시계는 1칸에 15분을 가리키는데 2초까지 정확하게 맞춘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그림자에 의해 해의 위치가 남극에 있는지 북극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설이 있었고 또 그 옆에는 별자리를 보는 시설이 있었는데 별자리가 12개 있으며 시간마다 별자리가 달라진다고 하고 우리가 갔을 때는 사슴자리에 있다고 한다.
-. 바람의 궁전
천문대를 관람하고 걸어서 하와마을에 있는 바람의 궁전으로 이동하면서 보니 이 궁전은 외곽이 성으로 쌓여있고 출입문이 12개 있으며 1층은 상가, 2층 이상은 학교, 병원, 주거공간으로 사용하며 문을 닫아 버리면 출입로가 막힌다고 한다. 이 궁전은 1799년 자이풀 도시의 한 가운데 5층으로 지어졌는데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고 건물은 남북으로 약 100m 정도이나 폭은 약 20여m로 창문이 900개 정도 되어 동쪽에서 바람이 들어와 서쪽으로 빠지는 구조로 여름에 시원함을 느끼게 설계되어 있었다.
-. 알벗 박물관(알바르트 뮤지엄)
비들기들이 너무 많아 냄새가 심하게 나는 이 박물관은 영국왕족인 알벗이 제풀에 사는 왕비와 결혼하여 살면서 남긴 유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1632년부터 사용했던 카펫트와 이집트. 중국. 일본. 무굴왕조와 교역했던 물품과 영국. 유럽 로마 등지에서 선물로 받은 물건, 힌두교. 불교 등에서 사용했던 물건, 인도 각 주에서 사용했던 물건으로 등으로써 물 담배. 접시. 주전자. 일본복장. 칼. 도자기 병. 2,500년 전 미이라. 부처님 상. 코브라를 어께에 걸고 있는 시바신. 옷. 가방. 총기. 포. 도끼. 투구. 헬맷. 청동 보석함. 장식품. 코브라. 사슴. 여우. 돼지. 코끼리. 염소, 가방. 터번 모자. 키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연주하는 큰 키타인 Rabab. 종. 의자. 나무 조각품. 상아로 만들어진 채스판. 힌두스님들이 요가하는 모습. 이발소. 악기 및 그릇 제작과정 등 실로 많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2,5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미이라가 엑스레이 사진과 함께 전시된 모습과 코브라를 어깨에 걸고 있는 시바신 상 등은 특별했다.
-. 나하르가르(Nahargarh) 성으로
암배르성 왕의 애인 9명이 살기 위해 1700년경에 높이 435m나 되는 높은 산에 34년에 걸쳐 축조한 이 성은 짚차를 타고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위에 올라가보니 2층 발코니를 통하여 모든 방에 다 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왕의 방에서는 9명의 애인 방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요리를 하는 부엌. 화장실. 수행원과 비서가 사는 방. 사원. 옷방과 함께 3중 안 중앙 방에 해먹과 같은 그네를 달고. 라이트. 벽난로 등이 설치되어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전망대로 갔다. 우리 여행 가이드 로힡이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라고 전망대 카페에서 일몰풍광을 감상하며 치맥파티를 하여 준다고 하여 맥주 15병과 함께 치킨을 시켜놓고 건배를 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도중에 흥이 나서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한가락 뽑고 내려와 호텔로 와서 기타를 치며 춤을 추는 공연팀, 여행을 온 여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꿈나라로 향했다.
○ 요가체험과 체뜨리아 사원
다음날 아침에 요가체험을 한다고 무리하게 몸을 비틀었더니 온몸이 뻐근한 것을 느끼며 밖으로 나와 낙타를 몰고 오는 현지인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옛날 왕족들을 화장하고 그 자리에 사원을 세웠다는 체뜨리아(Chhatrian)사원에 도착하니 성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만 싱 왕과 왕족의 아이들을 화장한 장소. 사리 등 납골을 보관하는 탑. 그 탑에는 왕들의 생존공적 등을 조각한 그림이 있는 힌두교 사원 같은 곳을 보고 재풀공항으로 가서 35분 지연된 국내선 비행기를(16:30~17:40)타고 델리공항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는데 러시아워와 겹쳐 평소 30분 거리를 1시간 30분 동안 이동하여 중국음식점에 갔는데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볼 수 없는 중국음식이 나와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공항으로 다시 와 2시간 25분 지연된 비행기를 타고 홍콩 경유 한국으로 돌아왔다.
※ 밥으로 이용된 알량미란 쌀은 길쭉한 쌀로 밥 같지 않아 입에 맞지 않았고, 빵은 카스테라와 제과점 빵이 간혹 나오긴 하는데 잼과 우유. 커피 등이 없어 먹기가 사나우며 자이라는 차도 별로 우리 맛에 맞지 않았으나 난이란 밀가루 빵은 졸깃하여 먹을 만하였으나 찍어 먹을 만한 것이 없어 처음 4~5일은 참고 먹을 수 있었으나 고통스러웠다. 인도 여행 시에는 고추장. 김치 볶은 것. 김, 햇반. 멸치 잣갈류 등을 가지고 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용량이 너무 커서 파일을 첨부하지 못해 사진이 안 나와 좀 서운한데 필요한 동기들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주면 사진을 곁들인 원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