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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5.03.18 11:46 수정 2025.03.18 13:05
킹제임스 성경(출처=bibleinfo)
정동수 목사의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정 목사는 최근에 일련의 설교들을 통해 1611년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무오한 성경이며, 개역을 포함한 영어 현대역들은 카톨릭과 마귀가 변개시킨 부패한 성경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홍기 목사는 이러한 주장은 이단적이며 거짓된 가르침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교회와 신앙>은 김홍기 목사의 일련의 비판을 가감없이 게재함으로 한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현명한 판단을내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 편집부 - |
김홍기 목사 / Ph.D., D.Min. Christ Lives Ministries 대표. Talbot School of Theology (M. Div., D.Min.).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 D.)
여호와의 증인은 처음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다가 그들의 이단 교리에 맞추어 신세계역 성경(1961년)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신세계역은 개역성경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과 헬라어 본문(Novum Testamentum Graece) 및 여러 다른 사본들과 역본들을 사용해서 번역했기 때문에 내용상으로는 개역과 흡사하고 형식상(장과 절)으로는 동일하다. 그러나 신세계역은 성경의 몇몇 구절들(예: 마 27:50; 빌 1:21-23; 골 1:16 등)을 여호와의 증인들의 이단 교리에 맞추어 왜곡해서 번역했다.1 그리고 몰몬교는 킹제임스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킹제임스역과 더불어 자신들의 독특한 경전인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 및 “값진 진주”를 4가지 표준 경전’(“Four Standard Works”)으로 삼아 사용하고 있다.2 또한 통일교는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성경을 주심으로 구약성경이 빛을 잃었고, 문선명(자칭 재림예수)이 계시를 받아 기록했다는 “원리강론”(“새말씀”)이 주어짐으로 신약성경이 빛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통일교 경전이 성경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3 그리고 신천지는 개역성경을 갖가지 이단 교리로 왜곡해서 사용한다. 이단들은 이처럼 성경을 왜곡해서 사용하거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 받아들이거나, 교주가 만든 경전이 성경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흉악한 이단일지라도 성경을 악마화하지는 않는다.
킹제임스역과 다르면 무조건 사탄이 변개한 것
반면에 정동수 같은 신흥 이단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악마화한다. 그는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NASB, NIV, ESV, HCSB, NKJV, NET 등)은 사탄과 카톨릭과 이단자들이 변개시킨 성경이라고 주장한다.4 그리고 그는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은 배교자들이 사용하는 성경이요5,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이라고 말한다.6 또한 그는 스스럼없이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을 “적그리스도”7라 부른다. 그가 이런 신성모독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1611년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영감받은, 완전무오한 영어로 쓰여진 원본’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는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이 보존해 주신 원본을 100% 정확하게 번역했으므로 영감받은 성경이라고 말한다.8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이다. 이와 반대로, 그의 주장이 성경적으로는 이단 교리요 실제적으로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100% 입증 가능하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역은 입증된 오류가 많은 성경이기 때문이다.9
정동수는 킹제임스 성경을 이단적으로 우상화하는 일과 함께 킹제임스역과 다른 내용이 들어 있는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을 끊임없이 악마화한다. 그가 개역이나 영어 현대역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번역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는 킹제임스역의 번역만이 자필원본과 동일하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그는 “모든 원어의 뜻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번역된 것만이 참되고 바르다. 이 말은 원어 단어마다 여러 뜻이 있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반영된 뜻만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른 뜻이라는 의미이다”10라고 주장한다. ” 따라서 그는 킹제임스역의 번역과 다른 역본들 심지어 사본들(예: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마저 부패한 역본과 사본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는 역본들과 사본들이 부패하게 된 이유는 사탄과 카톨릭과 이단자들이 임의로 구절들을 삭제하거나 의미를 변경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동수는 킹제임스역과 다른 역본들과 사본들을 비판할 때 항상 이런 편향된 관점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의 비판의 대부분은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오류로 가득차 있다.
욥의 유령(幽靈)이 재림하신 주를 본다니
그의 설교(“12. 성경론,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는 이러한 점에 대한 실례(實例)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기서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에 있는 3가지 구절들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욥 19:26에 대한 개역의 번역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 표를 간단하게 하나 만들었습니다. 개역성경 분석에 있는 건데 내용이 어떻게 성경이 이렇게 내용이 다를 수 있냐는 거에요. 제가 몇 가지만 여러분에게 예를 들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욥기 19장 26절 개역개정, NIV 등을 가서 보면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이 맨 마지막에 자기의 구속자가 이 땅에 서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맨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육체 밖에서 자기의 구속자 주님을 보면 이게 무슨 예기에요 우리나라 식으로 예기하면 유령이지요 유령, 그렇지요? 육체 밖에 있으니까.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과 루터의 성경에 모든 옳바른 성경에는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무슨 소리에요? 육신을 입고 몸의 부활을 믿으면서 지금 욥이 고백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요. 육체 밖에서와 육체 안에서는 그냥 180도 다른 거지요? 맞습니까? 11
정동수는 욥기 19: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을 번역함에 있어서 킹제임스역은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표현했는데, 개역과 NIV는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말은 유령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지만,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말은 성도가 자신의 부활한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령이 하나님을 본다는 표현을 한 개역과 NIV는 기괴한 이단 교리를 전하는 것이고, 성도가 부활한 몸 안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표현을 한 킹제임스역은 정통 교리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정동수의 이러한 주장은 정당한 것인가? 그러면 먼저 개역과 몇몇 영어 현대역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개역: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킹제임스역: “yet in my flesh shall I see God.”(나는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NIV: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나는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NASB: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나는 여전히 내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보리라.)
ESV: “yet in my flesh I shall see God.”(나는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HCSB: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나는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6에 대한 구절을 번역함에 있어서 NASB를 뺀 다른 영역본들은 모두 같은 표현(“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NASB의 “내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보리라”는 표현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표현과 의미에 있어서 사실상 같으므로 영역본들은 모두 동일한 번역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NIV가 개역과 동일하게 “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번역했다는 정동수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개역만이 여기서 다른 번역을 했는데, “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개역의 번역은 과연 정동수의 말처럼 유령이 이 땅에 서신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본다는 기괴한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져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은 이 땅에서 잠자고 있다가 마지막 나팔소리에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천국에 있는 영혼과 재결합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5:50-51; 살전 4:13-17). 따라서 개역이 욥 19:26을 “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뜻으로 번역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정동수는 개역이 여기서 부활한 성도가 종말에 이 땅에 서실 주님을 (부활의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닌) 유령(幽靈)으로서 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개역의 가르침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 개역은 욥 19:26에서 부활한 성도가 재림하신 주님을 유령으로서 볼 것이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개역은 여기서 성도가 ‘의식이 있는 존재’로 천국에서 주님을 본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반면에 영어 성경들은 욥 19:26에서 부활한 성도가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부활의 몸 안에서 본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로이 저크 교수는 이 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욥은 죽은 후에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는 의식이 있는 존재로 계속 살 것이다. 그는 소멸되거나 영혼의 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을 것이라고 방금 말한 후에 어떻게 육체 안에서 주님을 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부활의 몸을 받을 것이라는 뜻에서 말했거나(이 경우 히브리어 전치사 min은 여기서 “안에서“(in)로 번역되어 “. . . 의 관점에서”(from the vantage point of)로 번역됨; 36:25에서 min은 그런 의미로 사용됨), 또는 그는 어떤 물질적인 육체와는 “별개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뜻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min은 보통 “. . . 없이”(without)을 의미함; 11:15b 참조), 즉 죽음 이후이지만 부활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점은 min이 일반적으로 ". . . 없이"를 의미하지만 동사 "보다(ḥāzāh)"와 함께 나타날 때 ". . . 의 관점에서"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점은 19:26a가 죽음에 대한 그의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 평행법 안에서 26b절도 죽음 이후의 부활 상태가 아니라 죽음을 언급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12
저크 박사의 말처럼 개역은 “죽음 이후이지만 부활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고, 영어 성경들은 “부활의 몸을 받을 것이라는 뜻에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동수는 개역과 영어 성경들의 이러한 번역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킹제임스역은 영어로 쓰여진 자필원본이므로 킹제임스역의 번역과 다른 개역의 번역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고, 사탄이나 천주교나 이단자들이 표현과 의미를 변개시킨 것이므로 그러한 번역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있는 성도의 존재 양태를 유령이라는 말로 환치하여 개역의 번역이 마치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개역의 본문의 본래의 뜻을 완전히 왜곡하여, 개역이 욥 19:26에서 욥의 유령이 이 땅에 서신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본다는 기괴한 형태의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동수는 여기서 개역을 부당하게 그리고 불법적으로 악마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악한 행위는 정동수의 킹제임스 유일주의 이단 교리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바람을 잡는다가 뭔가? 영이 괴롭다는 것이지
둘째로, 정동수는 전도서 1:14에 대한 개역의 번역을 비판한다. 그는 개역과 킹제임스역의 번역을 대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 그 다음에 전도서 1장 14절 유명한 구절이 있어요. 개역성경 가서 보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 근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 이것도 번역하면 우리 흠정역 성경에 가서 보니까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한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 너무 너무너무 헛되서 내 영이 괴롭구나. 지금 전도자 이 솔로몬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이거 완전히 내용이 다른 내용이에요.13
정동수는 개역은 전 1:14을 “바람을 잡는 것 같다”로 번역을 한 반면 킹제임스역은 “영을 괴롭게 한다”로 완전히 다른 번역을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개역의 번역은 여기서 영어 현대역들(뉴킹제임스역 포함)과 같은 맥락에서 번역을 하고 있다. 각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개역: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킹제임스역: “all is vanity and vexation of spirit.”(흠정역: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NKJV: “all is vanity and grasping for the wind.”(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NASB: “all is vanity and striving after wind.”(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NIV: “all of them are meaningless, a chasing after the wind.”(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ESV: “all is vanity and a striving after wind”(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HCSB: “everything to be futile, a pursuit of the wind.”(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4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는 바람, 숨, 마음, 영혼 등을 뜻한다. 따라서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로 번역한 이유는 ‘루아흐’를 ‘바람’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며, 킹제임스역이 “영혼의 고통”으로 번역한 이유는 ‘루아흐’를 영혼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아흐’와 관련된 본문의 히브리어 단어 ‘레우트’라는 단어는 갈망, 분투를 의미한다. 그래서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은 본문에 있는 이 두 단어(우레우트 루아흐)를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로 번역했고, 킹제임스역은 그것을 “영혼의 괴로움”으로 번역했다. 이처럼 번역이 달라진 이유는 근본적으로 ‘루아흐’를 바람 혹은 영혼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의미상의 큰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은 삶의 허망함을 말하고 있고, 킹제임스역은 삶의 괴로움을 뜻하는 것인데, 둘 다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데 있어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전적인 의미로 볼 때 둘 다 가능한 번역이며 의미상의 차이도 별로 없다.
그러나 정동수는 이 두 성경의 각기 다른 번역에 대해 “이거 완전히 내용이 다른 내용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는 ‘루아흐’는 바람 혹은 영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역은 그가 보기에 “최종적이고 유일한 권위”요 영감을 받아 무오한 성경이며,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은 사탄과 카톨릭과 이단자들이 변개시켜 놓은 부패한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역의 번역은 100% 하나님의 말씀이고,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의 번역은 100%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는 번역본의 역자들의 이해의 차이로 인하여 발생한 번역상의 차이를 하나님의 보존 섭리와 사탄의 변개의 차이로 치부한다. 이것은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학문적인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또한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미신을 믿는 자들과 광신자들 및 과대망상을 품은 자들과 음모론자들의 사고방식이다.
교회 헌금 더 거두려고 삼일마다 드리는 십일조로 바꿔
셋째로, 정동수는 아모스 4:4에 대한 개역의 번역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 아모스 4장 4절에 가서 보시면 개역성경에 따르면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려라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게 교회에는 이게 엄청나게 좋은 거지요.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 그러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요? 네 킹제임스 성경에는 삼년마다 드리라고 그랬어요, 삼년. 여러분 신명기 14장에도 가서 보시면 삼년마다 드리는 그런 십일조는 있어도 삼일마다 갖다 드리는 그런 십일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 삼년이냐 삼일이냐?14
정동수는 킹제임스역은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하고, 개역은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개역이 십일조에 관한 성경 원본의 가르침을 교회에 유리하도록 변개시킨 것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신명기 14장을 예로 들며 개역의 삼일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관한 명령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러나 암 4:4에서 개역의 번역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몇몇 영어 성경들의 번역이 개역의 번역과 동일한데, 그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역: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킹제임스역: “bring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삼년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NASB: “bring your tithes after three days”(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NIV: “bring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삼년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ESV: “bring your tithes after three days”(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HCSB: “bring your tenths after three days”(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대조를 본다. 개역, NASB, ESV, HCSB는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한 반면, 킹제임스역과 NIV는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다른 번역을 본다. 그런데 모든 성경이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했을 텐데 왜 두 가지 다른 번역이 나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단어와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번역자들이 일(日)과 년(年)으로 각각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욤이다. 욤은 일, 시간, 년, 기간을 뜻한다. 따라서 욤을 일 혹은 년으로 번역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면 개역은 왜 욤을 일(日)로 번역했고, 킹제임스역은 년(年)으로 번역했는가? 그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가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아모스 4:4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위선의 죄를 풍자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새번역을 보면 풍자적인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여기서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델(“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에 가서 예배드리는 대신 죄를 지으라고 명한다. 아모스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예배의 다른 중심지)로 가서 예배드리는 대신 더욱더 죄를 지으라고 명한다. 그런데 이 명령은 참으로 실제적인 명령인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드리는 대신 죄를 더욱더 지으라고 실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풍자적인 의미로 그렇게 명한 것이다.15 이와 마찬가지로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고 명했을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흘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실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풍자적으로 명한 것이다. 아모스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위선적인 종교적 행위를 책망하고 있다.
신명기 14장은 구제를 위해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신 14:28)만 명한 것이 아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먹고 마시는 용도를 위해 매년 드리는 십일조(신 14:21)도 명하고 있다. 따라서 암 4:4에 나오는 십일조는 삼일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는 정동수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의무적인 십일조는 삼년마다 드리는 것도 있고, 매년 드리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 4:4은 실제적인 의미의 십일조가 아니라 풍자적인 의미의 십일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개역과 NASB, ESV, HCSB는 암 4:4에 나오는 십일조를 풍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라”고 번역했고, 킹제임스역과 NIV는 그것을 실제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삼년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에 따른 번역상의 차이인데, 필자는 개역과 NASB, ESV, HCSB의 번역이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정동수는 암 4:4에서도 킹제임스역의 번역이 100% 옳고, 개역과 다른 영어 성경들의 번역은 100% 틀리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킹제임스역이 하나님이 보존하신 ‘영어로 된 원본’이라는 ‘신화 같은 이단 교리’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보존하신 영어로 된 원본이라는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킹제임스역이 많은 오류들을 교정해 왔을 뿐 아니라 현재도 교정되지 않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은 킹제임스역이 ‘영어로 된 원본’이 될 수 없는 실제적인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같은 신화 같은 이단 교리에 근거해서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라”는 개역의 번역은 교회에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탄과 카톨릭과 이단자들에 의해 조작되고 변개된 것이라고 말한다.
정동수는 성경 해석의 바른 원리를 무시하고 킹제임스 유일주의라는 비성경적인 미신을 믿고 성경을 악마화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정동수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사탄의 간계를 알고 대적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정동수의 사악한 영향력으로부터 한국교회의 성경과 성도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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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lter Martin, “The Kingdom of the Cults” (Minneapolis: Bethany House Publishers, 1997), 125-129.
2 같은 책에서, 192-193.
3 문선명, “원리강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47쪽, 2025. 3. 13. https://church.ffwp.org/contents/principle_view_2023.php?num=568&page=3
4 정동수, “천주교의 반종교개혁: 트리엔트 공회 및 로욜라의 예수회,” 유튜브 동영상, 5:11-41; 25:7-16, 2023. 5. 5., https://www.youtube.com/watch?v=VU1Y82Qe58M&t=1531s.
5 정동수, “성경 변개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단 교리 총정리, ” 유튜브 동영상, 17:07-30, 2023. 8. 29., https://www.youtube.com/watch?v=zIQLMH1galY.
6 정동수, “개역성경은 예수님이 창조된 신이라는 이단 교리를 가르침,” 유튜브 동영상, 38:27-44, 2024. 2. 23., https://www.youtube.com/watch?v=IKtAr6xSE7s.
7 정동수, “개역성경은 예수님이 창조된 신이라는 이단 교리를 가르침,” 유튜브 동영상, 35:48-36:52, 2024. 2. 23., https://www.youtube.com/watch?v=IKtAr6xSE7s. 정동수는 필자가 2024년 3월 2일에 “이단자 정동수, 개역성경이 적그리스도? 최악의 성경론 이단”이란 제목으로 인터넷 방송을 한 후 자신의 이러한 치명적인 말이 폭로되자 그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35분 47초에 갑자기 잘리고 편집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유튜브 동영상(“정동수의 육성, 개역과 영어 현대역들(NASB, NIV, ESV)은 '적그리스도,' 사상 최악의 이단!” 2024. 9. 24.)에는 정동수의 육성이 그대로 생생하게 녹화되어 증거 자료로 남아 있다.
8 정동수,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킹제임스 온리) 정의: 클라우드 등,” 킵바이블, 2024. 5. 1. https://www.keepbible.com/KJB1
9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은 1769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블레이니 박사에 의해 75,000사항이 대폭 교정되었고, 그중 400여 개 이상은 표현과 의미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1611 KJV는 민 6:14에서“one lamb without blemish(흠 없는 어린 양)”라고 번역했는데, 1769년은 “one ram without blemish(흠 없는 숫양)”로 개정했다. 그리고 1611 KJV는 겔 24:7에서“she powred it vpon the ground(그녀는 그것을 땅에 쏟았다)”로 기록했는데, 1760년 KJV는 “she poured it not upon the ground(그녀는 그것을 땅에 쏟지 않았다)”로 변경했다. 그리고1611 KJV는 요 15:20에서 “The servant is not greater than the Lord(종이 그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라고 번역했지만,1768 KJV는The servant is not greater than his lord(종이 그의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로 바꿨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다음의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음. The KJV Store, “1769 Oxford Standardized Revision of the 1611 King James Bible Facsimile Edition.” https://www.thekjvstore.com/1769-oxford-standardized-revision-of-the-1611-king-james-bible-facsimile-edition/.
10 같은 글에서
11 정동수, “12. 성경론,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MP3 파일, 2:29-3:38.
12 Roy B. Zuck, “Job,”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eds. John F. Walvoord and Roy B. Zuck (Grand Rapids: Zondervan, 1983), 741-742. 볼드체는 강조를 위해 필자가 표시함
13 정동수, “12. 성경론,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MP3 파일, 3:39-4:13.
14 같은 오디오 파일에서, 4:15-46.
15 John A. Jelinek, “Amos,” The Moody Bible Commentary,” eds. Michael Ridelnick and Michael Vanlaningham (Chicago: Moody Publishers, 2014), 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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