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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바보처럼 살지 맙시다.
성경 사도행전 24장 24-27절
찬송 438장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려움 가운데 있던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그만 죄수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너무너무 싫어하던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의 몸이 되어 예루살렘 감옥에 있다가 가이사랴 감옥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로마 총독 벨릭스가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더불어 대회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바울이 왜, 무슨 일로 죄수가 되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들은 묻고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바울을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는 유대 여자였거든요.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부터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어쨌든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믿는 도리,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복된 기회였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믿음을 가질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이를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따라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총독 부부에게 구원을 선물해주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런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4-25)
그런데 여기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전해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었다고 성경은 소개합니까? 그것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혹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 다른 데서는 몰라도 사도 바울이 로마 총독 벨릭스 부부 앞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대신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의 내용을 복음으로 전했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 앞에서나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증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바울이 로마 총독 부부에게 전한 복음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성경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빼고 오직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소식만 전했다고 말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로마 총독 앞에서도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맞지요?
그렇다면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보다 벨릭스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 내용, 곧 십자가와 복음이 품고 있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의 소식을 조금 더 강조해서 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사실을 두고 사도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의 소식을 벨릭스 부부에게 강론하였다고 말씀하는 거고요.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벨릭스 부부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서 특별히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의 소식을 강조해서 전하였을까요? 왜냐하면 로마 총독과 그의 부인 드루실라에게 이 가르침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총독으로서 벨릭스는 얼마나 사치스럽고 방탕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의롭고 절제하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가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 총독 부부를 향해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 담대하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소식도 전합니다. 오랫동안 사치하며 방탕하게 살아온 그들이 이런 가르침을 싫어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자로서 사람을 기쁘게 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복음에다 더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이라고 해서 복음에서 제외시키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순전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이 순전한 복음만이 세상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 말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이 복음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과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복음에다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에다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심지어 그가 천사일지라도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내신 구원의 길을 부인하고 다른 길을 말하는 자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리라(계22:18-19)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벨릭스 총독 부부에게 순전한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주시는 그와 같은 선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대신 그는 바울에게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24:26)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 하시는데, 벨릭스가 구하는 것은 돈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돈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로 주려 하시는 그 현장에서도 어리석은 인생은 돈만 밝힙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기복주의가 다 이런 것 아닙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여 그 앞에 오직 빈손으로 죽는 일과 영원한 저주와 형벌만이 기다라고 있다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죽어 땅 아래, 영원한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질 인생에게 아무리 높은 지위와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이 땅의 권세와 명예가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아무리 큰 권세라도 십 년을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오직 돈과 명예와 권세만을 쫓아 살아갑니다.
이런 인생의 영적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먼저 주려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주시며 믿으라 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 새 생명으로 살라 하십니다. 그 길에 가장 높아지는 길이 있고, 그 길에 가장 부요하게 사는 길이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그런데 불쌍한 인생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통해 선물해주시는 최고의 선물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껏 구하는 것이 잠간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돈을 구합니다. 벨릭스도, 그의 뒤를 이어 유대 총독이 된 베스도도 유대인의 호감을 사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할 뿐,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안타까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24:26)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행24:27)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행24:9)
이렇게 죄 아래 사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선물하시는 은혜와 구원에 무관심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오직 이 땅의 권세와 돈에만 관심을 보일 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그것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아닌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불나방처럼 섶을 지고 불 가운데로 뛰어듭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그 후에 빌라도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요18:33-16)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려 하시는 것과 인생이 얻기를 구하고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들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 하시는 것에 온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는 사실과 가장 존귀하게 되고 풍성하게 사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주시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하늘나라,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넓은 길을 버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앞서 가신 좁은 길로 나아가십시오. 이를 위해 스스로를 향해 늘 질문하십시오. 지금 나의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혹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합니까? 그를 욕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살피십시오. 혹 내게 예수님 닮지 않은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 인격을 닮아가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말이나 행동, 악한 습관들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이웃에게 더 큰 기쁨이 되어 살아갈까? 묻고 또 물으십시오. 그리고 늘 예수님처럼 살아가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을 닮아 가십시오.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 부부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벨릭스 총독 부부는 복음을 듣고 회개해야 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다음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세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만을 취하던 악한 삶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온갖 사치와 방탕을 일삼던 삶에서 떠나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장차 임할 심판을 대비하며 그에게 주어진 부와 권세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 길만이 그가 사는 길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엑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성도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처럼 의와 절제를 따라 살며, 장차 올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는 모든 복은 다 거기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입에서 항상 나오는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직 예수님처럼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