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2025.8.3(주일) 누가복음 7:11~17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예수님’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 말도 못할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위해 울어주고, 함께해 주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속 나인성 과부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이제는 하나뿐인 아들마저 잃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과 아들은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생계의 기반이자 사회적 보호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경제적·사회적으로 철저히 고아와 같은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녀를 돌보셨다”(16절)는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돌보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파카드’, 즉 ‘잊지 않고 찾아오다’, ‘돌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신지, 특별히 나인성 과부의 입장에서 경험한 돌보심이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1. 슬픈 마음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 우리 아픔을 아시는 주님(11~13절)
나인성 과부는 남편을 잃고, 이제는 외아들마저 장례를 치르고 있는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녀를 “보시고”(13절), 그 마음을 아시고 다가오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말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눈물만 흘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장례 행렬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깊은 상실감과 아픔을 공감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감정적 동정이 아닌, 그 사람의 고통에 함께 들어가 공감하시고 행동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가가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슬픔을 그치라는 강요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소망이 올 것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감정적인 연민을 넘어서, 우리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사랑입니다. 적용) 내 마음에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 나는 예수님께 그 감정을 열어드리고 있나요?
2. 죽음도 이기시는 예수님 – 다시 살게 하시는 주님(14~15절)
당시 과부는 경제적 보호자 없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아들을 잃는다는 것은 단지 가족의 슬픔을 넘어 삶 전체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14절) 이 한 마디에 죽음이 물러갑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과부는 아들을 다시 품에 안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과부의 삶 전체, 즉 과부의 미래와 삶의 의미를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녀는 단지 아들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미래, 소망을 되찾은 것입니다. 또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주셨다”(15절)는 말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와 정체성을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돌보심입니다. 과부는 자기 손으로 묻으려 했던 아들을 되돌려받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지는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단순한 위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청년이 살아나고, 어머니에게 돌아간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파카드)’이 실제가 된 순간입니다. 적용) 나는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절망적인 내 인생의 현실에도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3.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은혜 –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는 주님(16,17절)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단순한 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된 일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마을 전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놀라운 은혜의 물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은, 그 어머니 한 사람만을 위한 돌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는 기적이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신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16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것은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 신앙의 회복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 느낀 사람들,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낀 이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적용) 나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은 나를 돌보셨다!”고 믿음으로 고백하시고 증거하십니까?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나의 간증은 무엇입니까?
결 론
내가 무너졌다고 생각될 때, 예수님은 가장 먼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은 곧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울지 말라."(눅 7:13)는 주님의 음성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회복의 시작이고, 믿음으로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죽은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의 손은 오늘도 죽어가는 마음, 식어버린 관계, 꺾인 소망을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죽음도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손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장례행렬 앞에 멈춰 서시는 예수님,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기적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의 삶도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