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21(주일) 눅19:1~10 삭게오에게 임한 구원 예산수정교회
사람은 겉으로 풍족해 보여도 영혼 깊은 곳에 공허와 목마름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결코 쉼이 없다’고 했습니다. 파스칼도 ‘사람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 채우실 수 있는 빈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부자였지만, 그의 영혼은 목마르고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부자이지만 영적으로 목마른 삭개오(1~4절)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1,2절). 그는 백성들을 착취하여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남은 것은 자기 이익으로 챙겼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가졌지만, 동족에게는 매국노, 죄인으로 취급받아 마음은 늘 공허했습니다. 재물을 많았지만 행복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길,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24). 부자는 돈으로 편리함을 얻지만, 그 돈이 영혼의 구원과 평안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삭게오의 영적 결핍이 바로 예수님, 즉 복음을 찾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셨다”(1절)는 소식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복음이 도착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사건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이자 세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4절). 복음은 겸손히 내려놓는 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체면, 자존심,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갈망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반응입니다.
적용) 나는 세상적인 풍족함이나 체면 때문에 영혼의 갈망을 덮어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삭개오처럼 주님을 보기 위해 나의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께 달려가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5~7절)
예수님은 ‘삭개오’를 ‘너’라고 하지 않으시고 직접 그 이름으로 부르십니다(5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장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낙인찍힌 존재였는데, 그 이름을 불러주신 것은 그를 한 인격체로 존중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깨끗한 순수한”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탐욕과 부정으로 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과거의 죄로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본래의 정체성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5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체하지 말고 즉각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하시며,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은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름을 아시고, 삶의 상황을 아시며, 직접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하심으로 구원의 사명을 드러내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주님은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내 인생의 집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아시고 인격적으로 부르실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순종하며 주님을 내 삶의 집으로 모셔들이고 있습니까?
3. 삶의 변화와 구원(8~10절)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빼앗은 것은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결단합니다(8절). 율법은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줄 때 원금에 5분의 1을 더해 갚으라고 했습니다(레위기 6:5). 그러나 삭개오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네 배’를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억지나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라고 하시며,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9절)이라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는 본래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었지만, 세리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동족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믿음과 회개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자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1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삭게오처럼 잃어버린 자였으나,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오늘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또 다른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삶의 실제적인 변화이며, 구원은 ‘오늘’ 우리에게 임합니다.
적용) 나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증거로,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회개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간증을 듣게 하고 있습니까?
결 론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늘 마음의 공허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인격적으로 다가오셨고, 삭개오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삶은 회개와 변화의 열매로 구원의 실제를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구원의 선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