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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시 세우시다(21:15-23)
우리는 전반부에서, 예수님이 지치고 실망하고 배고픈 제자들에게 식사를 차려주시고 교제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상처가 씻기고 관계가 감성적으로도 회복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이 베드로를 다시 사도와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시는 배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만 대화하시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다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너무나 신비해서 죄로 얼룩진 우리는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기도로써 본문을 대하려 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려고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2) 직무에로의 부르심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가? 누가 부르심을 받는가?
분량이 많으므로 3번에 나누어서 연구합니다.
5.4.2.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6)
본문: 21:15-16
요절: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5a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요한은 베드로를 지금 „시몬 베드로“라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하시는데, 이것도 공식적인 이름입니다. 이로써 요한은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공식적인 일이 일어남을 알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공식적으로 사도로, 교회의 반석으로, 그리고 어린양의 목자로 다시 세우고 계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말은 1:42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이 단 한 번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그때 그는 „바위“(게바, 베드로)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부활 후에 또다시 이 이름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에게 지금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래와 같이 부서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신뢰하면 아무리 인간적으로 강할지라도 베드로와 같이 됩니다. 인간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가 이제부터 자기 신뢰를 버리고 단지 예수님 말씀에만 순종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되도록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베드로를 다시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를 견고하게 하여 초대교회가 그를 중심으로 다시 세워진다는 약속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마 16:18에서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 시작을 보고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그의 공식적인 이름을 부르신 후에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이란 같이 식사한 여섯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른 제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가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하는지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이것은 외적으로만 본다면 지금까지의 상황을 통해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일 먼저 가려고 했고(7), 10절의 명령을 즉시 먼저 순종했습니다(11).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2-3년의 공동생활에서 이러한 것이 분명히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인정하시면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사랑과 다른 제자들의 사랑의 강도를 서로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보다 더 깊은 배경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떠날지라도 자기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마 26:33 이하; 요 13:36 이하). 이것은 추호의 거짓이 없는 그의 진정한 고백입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 체포 당시에 칼을 들고 군대의 무리에게 돌진한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의 결심과 믿음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져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교회 대표가 되어 앞으로 아무리 잘할지라도 „너도 어쩔 수 없다“, „너도 배신자가 아닌가“라는 꼬리표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를 배신하지 않는 확고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베드로, 바위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지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그는 배신을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가 부인할 수 없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의 시작이 됩니다. 이제부터 그는 오직 주님의 능력과 은혜만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자기 의지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21:18). 그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또한 자기가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죄 사함 은혜가 그를 다시 세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도 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사랑은 아무리 고귀할지라도 그것에는 혈과 육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대답인 „필레오“에서 드러납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거듭나지 않는 한 우리는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뜨거운 불 시험을 거쳐 연단되어야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함 받고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예수님의 질문은 인간을 알고 그를 진정으로 치료할 수 있는 영혼 상담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십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과거의 잘못을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는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사함을 받아야만 건강하여져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핵심 문제를 사랑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가장 자신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주십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새로이 사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죄인들에 대한 헌신입니다. 베드로는 이제부터 최고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막 10:45). 그는 예수님과 같이 남을 발을 씻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요 13장). 그래야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참고로 20절을 보면 지금 이 대화는 걸어가면서 다른 제자들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고 단지 요한만 가까운 곳에서 뒤를 따라간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후에 베드로와만 대화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없는 곳에서 매우 깊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15b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먼저 „나이 퀴리에“(그렇습니다 주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완벽한 대답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주님께 보여준 사랑의 행동에는 조금의 거짓도 과장도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완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음에도 그분은 부활하신 날 바로 자기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공부를 통해 예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죄를 깨닫고 용서함을 받은 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눅 7:36 이하에서 예수님은 죄를 지은 여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랑은 더욱 완벽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원문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선, 자기 사랑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자기가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주님께서도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과연 주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에 아가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지만, 베드로는 필레인을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확실히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아가판이라는 말을 피한 것이 드러납니다. 아가페는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하고, 필리아는 친구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그는 „그러하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즉, 그는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후에 다시 필리오적으로 사랑한다고 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여기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자기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경외심과 이에 따른 겸손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실패를 통해 아가페는 주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숭고한 사랑이고, 자기는 한 단계 낮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깨달음과 그의 솔직하고 진실한 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겸손해졌는지가 드러납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를 알게 되면 이렇게 겸손해집니다.
15c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예수님은 이제 자기 양을 그에게 맡기실 수 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그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사도직을 위임하셨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예수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사도가 됩니다.
이곳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은 자기를 정말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목자 직을 위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에서 직분자로 세움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이 직무를 주십니다. 과거의 베드로와 같이 자기가 살고자 예수님을 뒤편으로 하는 자가 아니라, 10장의 목자설교에서와같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앞에서 많은 예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특히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좋은 예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헌신을 배워서 자기도 예수님과 같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현실을 보면, 대부분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를 위해 목회를 합니다. 사실은 대부분 교인도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 예수님 말씀으로 자기를 먹이는 목사는 오히려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는 끝까지 말씀을 먹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이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아가페는 온통 대상을 위해서만 하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질문을 또 던지시고, 베드로도 같은 대답을 하고 예수님은 같은 명령을 주십니다: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예수님이 질문을 반복하신 것은 결코 베드로의 대답이 불충분하거나 그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하므로 더욱 깊이 새기시려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소상하게 아시는 하나님 아들의 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1.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시고 또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목자 직을 주십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는 모두 주님의 양 떼를 먹이는 헌신적인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러한 사역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부르심을 따라야 합니다. 이들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 자와 그분의 헌신적 섬김과 사랑을 받은 자만 들어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이것이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만이 사역자는 아닙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어떤 모양이든지 예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는 자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목자입니다.
2.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사랑하시고 또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목자 직을 주십니다. 아무나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나 목자가 되려고 해서 한국교회가 크게 타락했습니다.
3.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계속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헌신을 배워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참회자가 되어 예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