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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2.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
본문: 21:17-19
요절: 17b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7a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7b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번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째 질문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를 정말로 아프게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죄를 철저히 인식하고 고백하여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씻기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죄 사함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식이 없어서는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되려면 이러한 아픈 고통을 수없이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죄를 직접 지적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특이한 점입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자기 죄를 스스로 인식하고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치료하셨습니다. 세 번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고백을 완전한 것으로 확정하십니다. 사명도 마찬가지로 세 번 주셨습니다.
이제 과거의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완전히 새 출발 하게 되었고 사명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이러한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늘 새 출발하는 삶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면 새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17a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는 세 번 부인과 연관되었음이 명백합니다.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는 이 연관성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자기 사랑을 고백하는 이 순간에 불청객인 과거의 쓰라린 기억이 찾아왔고 이것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사랑이라는 말에 아가파오가 아니라 필레오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가페적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필레오적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으로 날카롭게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필리아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말인가? 네가 나를 필리아적으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인가? 물론 예수님은 그렇게 도전적으로 질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자기를 찌르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슬퍼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정리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이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질문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 과거를 들추어 내셨다.
2) 예수님이 심지어 자기가 그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까지 의심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말은 자기 존재의 심연에 도달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인생에서 자기가 이렇게 비참하고 무가치하게 보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정말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베드로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그도 인간이므로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마저도 자기를 인정해주시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갈 곳도 설 곳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고자 재산도 처자도, 그리고 모든 것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로 좌절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자기 의가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입니다. 자기 확신, 자기 믿음, 자기 능력에 기초한 자기 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진지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완전히 무너진 자기 의 위에서 주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이 인간의 깊은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 자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주님께서는 아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인간이 위선적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는,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확신했으므로 다가올 무서운 시험에 대비하지 못했으며,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다소 인간적이었으며,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예수님의 경고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참회가 곁들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 말씀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우리를 항상 받아주십니다. 이러한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이 싹트고 자라납니다.
17b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세 번이나 같은 사명을 주시는 것은 동시에 공식적인 확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세 번은 확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직수여식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우신 공식적인 이스라엘, 이방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또한 죄 사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죄 사함이 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이사야의 부르심은 이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7). 이로써 베드로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명을 받고 완전히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양, 즉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인을 내 양, 내가 보호하는 사람, 내 사람, 내 소유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목사라고 교인에게 작은 권리라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이래라 저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온전히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인 사이에는 인간적인 관계가 맺어져야 하고, 상하관계가 분명해야 모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의 길입니다. 모든 신자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적 관계를 맺으려는 이유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너무 부족하거나 맺혀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이 점에서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저의 젊음을 불태우고 사역한 선교단체에서 배운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서로 매우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표면에 불과하고, 사실은 모든 사람이 몇 사람의 컨트롤 아래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주면서 헌신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결국 양들을 키워서 잡아먹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명성과 권력이 커지고 자기 재산이 늘어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모든 사람과 건전한 거리감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형제들과의 깊은 관계는 반드시 타락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각자 예수님과의 관계가 없거나 약하므로, 거룩한 성령님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더러위집니다. 그러므로 특히 형제 간의 교제에서 감정 컨트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너무나 깊은 죄인이라 순수한 형제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죄악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단지 예수님의 소유라고 해서 성경적인 권고를 주는 영적지도자나 공동체에 굽히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예수님의 몸이므로 모든 사람이 유기체가 되어 서로 존중하고 순종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목사나 장로의 성경적 권고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목사나 영적 지도자는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하나님 말씀만 먹고 자랍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하나님 말씀만 가르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벗어나는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이 독소가 되어 예수님의 양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운 말씀, 그리고 이를 통해 깨달은 구약 말씀만 가르쳐야 합니다. 그가 이 사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행했는지는 사도행전, 베드로서에 잘 드러납니다. 그는 완전히 변해서 그리스도 양을 먹이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베드로에게만 주신 사명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단지 그가 우리들 대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양을 먹일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먹일 수 없으면 음식으로 먹일 수 있습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형제를 섬겨야 합니다. 남에게 부족한 것을 내가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서로 섬기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각 지체는 말씀 안에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이러한 교회가 세워지기는 너무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반드시 권위적이거나 매우 온유하고 잘 섬기는 듯한 카리스마적인 사람이 등장하고 그런 교회만 잘 되는 듯합니다. 카리스마란 한국인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달리 권위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련되고 친절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워서 남을 내적으로 지배하는 품성을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심리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러면 교인은 아주 포근하게 그를 신뢰하고 그의 지도 안에서 기쁨을 가집니다. 지도자가 자기를 잘 품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가 성경에서 말하는 이리와 늑대와 같은 자입니다. 그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심리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shepherding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이론이 있습니다. 이 매력적인 이론으로 사람을 자기에게 묶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누구라도 사람을 자기에게 매면 안 됩니다. 사람을 늘 예수 그리스도께 보내야 합니다. 각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Group dynamics가 일어나면 안 됩니다. 온전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장성한 교회의 지체로서 자발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아멘, 아멘“이라는 말로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는 말씀을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띠 띠고“는 여행 준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출 12:11; 눅 12:35,37; 17:8; 행 12:8). 즉 어디를 다닌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에는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즉 자기 뜻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따랐을 때도 그렇게 살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씀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거합니다(참조: 마 16:22-23; 17:4; 20:24; 26:33; 요 13:6 이하,36 이하; 18:10-11).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또한 그렇게 살았지만, 사실은 사도가 무슨 일을 하는 직분인지도 모르고 복음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막 1:17 말씀이 문자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베드로를 반석으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마 16:18).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니지 않고 그의 팔(손)을 벌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찾고 구하고자 기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은 그렇게 기도합니다. 즉, 이제 그는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베드로가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행 10:9). 베드로전후서에 나타난 배드로는 복음서의 베드로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계속됩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베드로가 남의 말을 듣고 여행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남의 말이 귀에 들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그가 형제들의 요청을 듣고 즉시 행하는 보도는 참으로 인상적입니다(행 9:38). 또한 그는 성령님의 지시를 듣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 여행을 떠났습니다(행 10:15). 그는 유대인이므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이방 땅을 밟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순종했을 때 그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행 10:34-35).
실은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일은 불쾌한 일입니다. 이 예언적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잠시 불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에만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분은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목자 예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불안해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0-11). 그러므로 베드로는 앞으로 이렇게 귀가 순한 사람이 됩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 말씀에 커멘트를 답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것은 베드로가 순교하기까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베드로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2) 그는 순교할 것이다.
3) 그의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만약 누가 자기가 순교할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 예언을 듣는다면 몹시 불안해할 것이며, 앞으로 그의 삶은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 큰 안심과 용기가 됩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으나 실패한 것이 성취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자기가 십자가에서(„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이라는 예언 말씀이 그를 또다시 모든 근심과 수치심으로부터 해방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자기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있다는 확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까지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계 2:10 말씀을 성취하게 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바로 그후에 „나를 따르라“고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이 말씀은 요 1:43, 혹은 마 8:22 말씀과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르게 들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메시아의 승리의 길로 따라간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좀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네가 나를 잘 따르면 너의 팔자를 고쳐 주겠다! 요즘 언어로 표현한다면, „네가 십만명 교인의 교회가 되도록 해주겠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13:36 이하에서 자기가 원했던 것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세우심을 받고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는 중차대한 책임을 떠맡은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가 이 책임을 얼마나 진지하게 영접했는지는 벧전 5:2-4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지금 한국에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잘 가르쳐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목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을 자기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예수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목자의 자격은 자기 뜻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 특히 주님의 말씀을 잘 좇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교회를 키우려고 하지 말고 주님 말씀만 좇고 그분 말씀만 가르치는 목자가 되어 순교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실패를 넘어서서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늘 깊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인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심어져서 그것이 역사하여 나를 변화시켜야 하고, 이를 통해 이 사랑이 다시 예수님께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심으신 그 사랑이 발아해서 성장하면 순교까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합니다(19)
첫댓글 주예수님, 오늘 모든 교우와 함께 하사 허럭된 세상의 삶의 시간동안 ,베드로 처럼 죄악된 어제의 모든 삶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사함을 통해 새로운 제자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은혜를 입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