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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의 비밀(엡 1:8-10)
양현주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 7절 말씀을 다루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형식으로 구성된 바울의 찬양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 시는 단순한 찬미를 넘어서 성경 전반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압축적이고 심도있게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 시의 내용을 통해 향후 에베소서의 진술방향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지침이 됨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 7절은 전체시의 두 번째 단락, 다시 말해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리고 찬양하는 단락이 시작되는 절이었습니다 .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림자와 같은 구약의 희생제사를 통해 미리 예표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피로 하늘의 지성소에 이르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1:7f)된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7절의 말미에 이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8절은 그 은혜에 대해 상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절의 시작은 7절과 맞물려 있는 셈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단락은 7절에서 12절까지인데 7-10까지는 모두 7절에 대한 점층적인 부연 설명이 담긴 종속절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에서는 명확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구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이후로부터 10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식구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순한 속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전모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술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이루신 대속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7절) 죄의 용서를 받게 되는데, 그 은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 가운데 넘치도록 부어졌고(8절), 이러한 지혜와 총명의 상태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알리심으로써 일어난 사실이며(9절), 이 모든 것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10절).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속죄 구원은 우리의 생명을 영원한 불못에서 건져내시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뛰어넘는 구원의 장황함, 방대함, 영광스러움의 사실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의 근원이자, 목적의 완성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작과 끝, 알파요 오메가이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8절의 시작은 관계대명사 ‘ἧς’로 시작하는 데, 이는 바로 앞 7절의 ‘은혜’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우리 안으로 지혜와 총명 가운데서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 직역의 의미가 선뜻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은혜는 너무나 풍성하여 죄의 용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는 사실 또한 값을 매길 수 없을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8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 사실은 지혜와 총명 가운데 실행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께 적용되는 것인지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가 통상 해석하는‘ἐν’(-안에)이라는 전치사가 다양한 해석의 용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는데, 지혜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지혜와 총명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ἐν’은 상태의 의미)로 먼저 해석되는가 하면, 또 다르게 이러한 속성이 우리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고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서 은혜를 넘치게 하셨다”(‘ἐν’도구나 수단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한 부분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렘 10:1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영이신데, 그 존재하심과 지혜와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이렇게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에게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겔28:4)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단1:17) 이러한 성경의 용례를 살펴볼 때, 이를 하나님의 편에서 지혜를 발휘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과 인간에게 은혜의 도구로서 지혜와 총명이 주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 모두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지혜와 총명’으로 번역된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참으로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혜와 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의 구절은 이러합니다. ‘σοφίᾳ καὶ φρονήσει’ 여기서 ‘σοφία’, ‘φρόνησις’ 둘 다 지혜, 지식 혹은 총명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σοφία’(지혜)와 ‘φρόνησις’(총명)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저작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등장합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σοφία’와 ‘φρόνησις’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σοφία’가 지성의 직관을 통해 얻어진 근원적 지혜, 진리에 대한 불변하는 지식이라면, ‘φρόνησις’는 생활가운데서의 선택을 내포하는 실천적인 지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한 번 선택하고 마는 일회성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 가운데서 점점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는 지속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σοφία’와 ‘φρόνησις’를 헬라사람들과 철학자들이 적지않게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이 두 단어에 각각 앞에서 말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서로를 대응시킨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일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만을 선택하여 ‘그리고’로 대등하게 연결해 놓은 곳이 단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재번역한 70인역의 다니엘 2:23이요 나머지 다른 하나는 오늘의 본문인 에베소서1:8입니다. 이로 볼 때, 바울은 지식에 해당하는 이 두 단어를 대충 무작위로 선택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저 두 단어를 나란히 연결한 것은 이 두 단어를 함께 대등히 거론한 당대의 통용되는 구조적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행정수도인 동시에 로마의 1, 2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를 가르친 스승을 배출한 교육,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도시 출신인 답게 헬라의 철학에 능통했습니다. 지금 8절에서 ‘지혜와 총명’으로 번역된 이 두 단어도 헬라철학에서 특별한 학문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전문용어입니다.
오늘의 본문 에베소서 8절에서 바울은 이 두 용어를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일상어의 지위를 넘어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체계 안에서 학문적 용어로 다루어진 것이 성경에서 ‘그리고’로 대응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이런 헬라철학의 전문용어를 차용하는 것은 일상어로는 다 드러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이러한 엄밀한 용어를 통해 간명하면서도 깊게 표현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과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헬라철학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가 헬라철학의 용어를 도입한 것은 그것과 똑같은 사상을 가져서가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 구속사적 전모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표현한 ‘φρόνησις’(총명)가 철학적으로는 습성, 습관적으로 굳어지는 지속적 선택으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지식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지만, 여기 에베소서 8절에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실천적 지식 혹은 지혜으로서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 전반에 흐르는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지혜는 자연인의 습관의 문제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무슨 도덕적 각성을 통해 착하고자 노력하여서 얻게 되는 습관적 변화가 아닙니다. 그의 변화는 믿음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리의 변화요, 이후의 점점 거룩해져가는 삶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지혜와 총명’이라고 할 때에 이는 단순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게 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순종의 실천으로까지 이어지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신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법적 죄사함 받은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 살아가는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성격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지식은 단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는 수준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 감정, 의지 전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하는 전인적인 지식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만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 지식이 나의 삶에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은혜요 껍데기 뿐인 지식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이 나를 회개로 이끌어냅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로부터 작은 두루마리를 받았을 때,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그가 천사의 말대로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과연 그의 입에는 다나 그의 배에서는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자연인적인 자부심이나 열망을 고양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찌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감추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2) 이러한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 앞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스스로를 자부하며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 감추인 것이 없고, 그의 손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자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고 해서 삶 가운데 즉각적으로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의 삶에는 지속적인 죽임(mortificatio)과 살림(vivificatio)이 있습니다. 이 죽임과 살림에는 특정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살아있으려면 그는 계속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역설이자 비결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경고의 메시지는 반대로 그 말씀을 듣는 자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열매를 맺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경고, 죽음의 메세지를 삭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지 않고 당장 현재 죄가 이끄는 감각과 쾌락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그럼으로써 이 시대는 삶의 본질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더 이상 그를 생각지 않게 되니 이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 버리고 인간 생명의 고귀함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연에 비해 인간의 생명은 하잘것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후 인간이 맞이하게된 비참한 신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가장 비참해지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현대 사회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망없어 보이는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현실과는 다르게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는 그의 뜻의 비밀을 아는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8) ‘그 뜻의 비밀’! 흔히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비밀’이라는 용어를 반지성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쓰인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연인들에게는 완전히 감춰져서 알려고 해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백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 비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바울 또한 로마서 16장 25절에서 “영세전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깨달을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여 설득하려 해 보았자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그것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계시의 비밀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비밀인 것입니다. 이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때’와 ‘목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 즉 계시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중 절정에 해당하는 ‘말세’가 시작되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백성들에겐 아주 멀고도 막연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다가올 말세의 때를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사66:18)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때가 이르면’이라는 말이 바로 말세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님께서 불의 혀처럼 강림하셨을 때 주의 제자들이 만국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세예언을 가지고 선포합니다.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세상사람들은 흔히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성경이라는 게 이스라엘 국가의 유대인들이 믿던 신화 아닌가? 왜 남의 나라 신화를 가지고 남의 나라의 신을 믿고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함을 믿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은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전 미리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 가운데의 절정인 ‘말세’가 이미 시작되어 지금 우리의 시대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사의식은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더욱 굳은 믿음과 소망의 동기부여가 될 것입니다.
계시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또한 ‘목적’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여기서 드러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되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다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계시의 비밀의 드러남은 하나님의 목적을 따르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재통일’이라는 거룩한 목적, 바로 이 목적을 따르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연합은 단지 인간적인 연합의 슬로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WCC로 대표되는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은 인간적인 연합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곳에는 유일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도, 영생으로 이끄는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도 없습니다. 거꾸로 기독교가 ‘연합’에 매몰되어 사라져버린 형국입니다. 하지만 오늘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거론하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만물의 연합입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고한 기준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는 민족적인 경계를 허무는 수평적인 연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수직적인 연합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구약 성도들이 알 수 없었던 계시의 비밀, 이방인과 유대인이 구원에 함께 참여하였다는 이 사실이 현재의 우리에게 부여해 주는 의미는 상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전체 구속역사 중 가장 절정에 다른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또한 이러한 연합의 사실은 고정되어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통일이라는 영광스러운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첫사람 아담조차도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한 위치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장엄하고 풍부하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은 이러한 사실의 깨달음 가운데 지속적인 실천에 이르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있는 소망은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하여 살펴보겠지만, 결국 그리스도와 만물의 통일이라는 목적의 핵심에는 교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이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증시하고 실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요 핵심기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 가운데 교회의 속성으로 배우는 통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거룩성은 이러한 신학적 해석의 배경가운데 도출된 교회의 속성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자라가는 그의 몸된 교회, 이것이 교회의 영광스러움이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회의 유의미성입니다. 우리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또한 이러한 교회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나날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는 교회로 자라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