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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조선대부고 조이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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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산행후기 재경조대부고 조이산악회 제277차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탐방.
정종수(15회) 추천 0 조회 191 24.02.12 10:5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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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2.16 05:22

    첫댓글
    제277차 몽촌토성을 다녀와서...

    역사는 흐른다, 몽촌토성의 역사에 대하여..

    277차 조대부고 조이산악회 산행지는 몽촌토성이다.

    아침 일찍 약속장소인 몽촌토성 1번 출구에 나와 보니 벌써 부터 안형순회장님과 문병국사무총장님께서 나오셔서 조이산악회 선후배선배님들을 맞이하여 주신다.

    오늘 몽촌토성의 산행은 그 의미가 깊다.

    산행이 아닌 역사탐방이라 봐야 옳다.

    흔히들 말하기를
    "역사을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라고 말한다.

    2024년 1월 남산산행기에서 "김영삼정부는 1994년 서울정도600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벌리려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바람에 행사는 취소되고

    대신에 남산 기슭 수도방위사령부 옛자리 한구석에 "타임스퀘어 갭슐600점을 캡슐속에 지하15m 에 소장하기로 하고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해에 후손들이 개방해서 보도록 했다.

    그런데 정도(定都)
    600년이라는 그 자체가 설득력을 잃었다.

    서울은 이미 500년 역사를 갖고 있는 백제의 한성(漢城위례성)이라고 불리운 백제의 도읍지(서울)이
    엄존한다

    백제 역사를 살펴보면
    개국시조 온조가 BC18년 전에 세웠다.

    漢城(위례성)이 백제500년 도읍지라고 한다

  • 작성자 24.02.16 05:24


    서울의 역사는 1000년이 넘은 로마와 견주는 고도(古都)
    임에 틀림없다.

    오랫동안 백제의 도읍지가 어디냐?를 두고 한국 국사학계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였다.

    근대 국사학계의 거장 이병도박사는 윌례성이 하남시 춘궁동일대라고 했고

    충남 천안의 직산에 위례가 백제 漢城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던 중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몽촌토성 일대를 올림픽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중에 몽촌토성일대에서 백제의 유물 토기와 기와가 발굴되어
    몽촌토성이 백제의 수도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몽촌토성이 백제 수도이다" 라는 설이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았다.

    1997년 풍납동 토성 아파트재건축 현장에서 백제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선문대학교 국사. 고고학자 이형구교수가 풍납동 아파트현장에 나가 백제 토기와 유물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알려 아파트건설공사는 중단되고 백제 유물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풍납동 일대 1000여평에서 발견 유물이 몽촌토성17만 평에서 출토된 유물보다 더 많이 발견되고 왕궁터와 제사를 지내는 경당지구가 사적지11호로 지정되고 발굴작업이 계속된다.

    그래서 풍납동토성이 백제 수도 한성(

  • 작성자 24.02.16 05:26

    그래서 풍납동토성이 백제 수도 한성(漢城)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백제 위례성(漢城)이 어디냐? 를 두고 660년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래 고려시대에도 그 장소를 모르고 지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위례성의 위치를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김부식도 그 당시 백제 위례성의 위치를 몰라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왔다.

    백제시조 온조는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지를 정하는데

    그 한산(漢山)은
    [어머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 있어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렸을 것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도읍할 만한 곳)을 살폈는데, 비류는 바닷가(필자주 : 미추홀을 말한다)가 좋겠다고 하였으나 열 신하들이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북대한수(北帶漢水)하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지하며 동거고악(據高岳) 하며,

    남으로 비옥한 평야를 바라보고' 남망옥택(南望沃澤)이요,

    서쪽에는 바다가 막혀 있다, 서조대해(西阻大海) 하니, 이렇듯 천험의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

  • 작성자 24.02.16 05:27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역사는 흐르고 백제라는 나라도, 도읍지도 1500년이 흘러 기억속에 살라졌다.

    1997년 백제 도읍지는
    풍납토성 발굴작업이 계속되면서 풍납토성이 위례 하남성으로 백제 500년 도읍지가 맞다는 것이 통설로 자리 잡고 있는데 몽촌토성은 남성, 풍납토성은 북성으로 다 함께 한성
    (漢城) 이라 부른다.

    오늘은 백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한성백제박물관과 몽촌토성의 견학인데,

    몽촌토성은 남한산성의 줄기가 북쪽으로 내려와 구릉을 형성하였는데 이 구릉을 따라 산성(山城)
    을 다듬어 만들고 지형이 약한 곳만 토성을 축조해 성을 이루었으며 성 주위에 둘러 파 해자(垓子)를 만들고 성 아래에 목책(木柵)을 둘러 2중 3중으로 적을 막은 기능을 하였다.

    백제의 토성은 흙으로 쌓아올린 성 축조 깃법
    판축법(版築法)인데 네모 나무상자를 축으로 하여 나무상자 안에 진흙을 이겨 다지면서 성을 축조하는 공법으로 건축물이 아닌 담장이나 토성 등은 진흙에 물을 뿌려가며 시루떡처럼 층층이 달고로 다져가며 쌓았는데 이것이 판축법(版築法)이다

    판축공법은 돌로 쌓은 성보다 더 견고하고 튼튼하다니 그 당시 시멘트공법이

  • 작성자 24.02.16 05:29

    그 당시 시멘트공법이라 할 수 있다.

    몽촌토성의 유래로 백제시대 이곳 몽촌토성을 "굼말"이라고 했는데 "굼은 곰의 고어"이고 "말은 마을의 고어"다.

    '굼말'이 '꿈말'로 전이되고 오늘 날 '꿈마을'로 전이되었다.

    꿈은 한자어 '꿈몽夢'자로, 여기에 마을에 해당하는 마을촌
    "村"자를 더하여 '몽촌(夢村)'
    이 되었다.

    몽촌 토성에 오르기전
    88올림픽 조직위원이셨던 23회
    정찬구동문이 몸소
    함께 하면서 '평화의 문'
    "올림픽기념광장" "소마미술관" 를 안내해 도움을 주었다.

    "소마미술관에 들려 미술을 흥미"있게 관람했고 나오는 길에
    정찬구동문께서
    다과와 음료수를 대접해 주시니 동문들에 대한 도타운 사랑이 넘쳤다.

    이제 몽촌토성의 본격적이 탑방으로 "한성백제박물관"으로 향했다.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토기와 기와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한성백제 500년 시대를 조감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 들어서니 "어린이 위한 연날리기 행사"가 열려 북새통을 이뤄 정상적인 관람이 어려움을 느끼고 1층 로비 앞벽면에 토성을 쌓아 올리는 전사층을 재현하는 판축법(板築法)을 설명하였다.

  • 작성자 24.02.16 05:30

    판축법(板築法)을 설명하였다.

    판축법이란 토성을 쌓을때 토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단(基壇), 토벽(土壁) 등을 쌓을 때에 흙을 얇은 층상(層狀)으로 다져서 쌓아올리는 방법이다.

    토성 축조에 대한 설명 을 간단히 마치고 몽촌토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몽촌토성을 오르는 계단에 칠지도(七支刀)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칠지도는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날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고 칼의 중앙 뾰쪽한 부분을 합하여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른다.

    칠지도(七枝刀)는 4세기경 백제에서 왜국으로 보낸 철로 만든 검으로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이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근초고왕 때 여러 제후국에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은 백제의 제후국의 하나임을 나타낸다.

    근초고왕이 왜왕에 하사한 칠지도가 일본 국보로 등재돼 있다.

    몽촌토성의 구조를 살펴보면 남한산성에서 북으로 지맥이 흘러내려와 몽촌구릉지를 이루니 이 천혜의 구릉지를 이용해 산성을 만들

  • 작성자 24.02.16 05:35

    이곳을 몽촌토성이라 부리워진다.

    몽촌토성 둘레를 따라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칩입을 1차적으로 막고 토성아래 목책(木柵) 울을 둘러 2차 방어를 하고,
    목책(木柵) 넘어서도 외측 토성벽에 가파른 경사를 두어 기어오르기도 험난하게 만들었다.

    몽촌토성의 구조가 꾸불 구뿔 대칭으로 이루어졌으니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활이나 병기로 공격할 수 있으니

    그 당시 몽촌토성은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기능을 하였다.

    백제시대에는 몽촌토성을 따라 해자(垓子)가 있었지만 88올림픽을 앞두고 공원과 시설, 도로를 조성하면서 메꾸어져 지금은 일부 구간만 존재하고 있다.

    몽촌토성 둘레길을
    돌다보면 충헌공 김구와 그 후손 김종수 묘가 있는데

    충헌공 김구는 조선 숙종때 단종복위에 앞장선 공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김종수는 김구의 후손으로 "몽촌대감"으로 불리워졌으니 그 출생지가 몽촌임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몽촌토성 둘레길에 가장 높은 곳에 장대(將臺)
    라고 불리워진 일종의 전투 전망대가 있었다고 한다.

    몽촌토성은 자연구릉을 이용해 토성을 만들었다.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장대(將臺)라는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장대(將臺) 란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ㆍ지휘

  • 작성자 24.02.16 05:36

    명령ㆍ지휘하던 대. 성(城), 보(堡) 따위를 말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없어졌다.

    몽촌토성 아래에 천막으로 둘러싸여진 곳이 현재에도 발굴작업이 계속되는 백제 역사의 현장이자 몽촌토성의 중심 주거지이다.

    몽촌토성 위 둘레길을 돌아 몽촌토성 발굴현장에 이르기 전에
    공원내에서는 취식이 금지되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 으쓱한 곳을 찾아 홍어 막걸리 잔치를 벌렸다.

    홍어회 무침에 막걸리 한잔 걸치며 형님 한잔! 아우 한잔! 하며
    정과 사랑이 오고갔다.

    조대부고17회 이종욱선배님께서 동해 명주 막걸리 한병을 가저오셨는데 한 목음씩 나누어 맛보았다.

    우리 조이산악회에는
    15회 안종윤선배님이 공학박사,
    17회이종욱선배님이 이학박사, 그리고 22회 김경준이 경영학박사이니 박사들의 행진이 이채롭다.

    막걸리 한잔을 걸치면서 한성백제가 왜 망했는가에 대해 보충 설명을 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은 바둑의 천재였다고 한다.

    바둑을 좋아해서 전국의 바둑명수를 불러다 궁내에서 바둑전을 벌리고 몸소 바둑을 즐겼다.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정립된 상황에서 영토확장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 작성자 24.02.16 05:37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다.

    3국 간에 팽팽한 전운이 감도는데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 라는 소문을 듣고 백제에 보낼 바둑 천재 스파이를 찾고 있는데 "도림"이란 스님이 나타나 스스로 자신이 백제에 가서 첩보 스파이역을 자청한다.

    도림스님은 백제에 내려와 개로왕과 날마다
    바둑을 두며 개로왕의 신임이 두터워 지고 도림스님은 이때 개로왕을 선동해 " 백제가 무릇 삼국중에 발전하고 국력이 출중하지만 궁궐이 초라하고 나라지키는 성벽이 부실해 국가로서 체통과 위상이 서지 않는다" 고 말해 꼬드겨 개로왕은 대대적으로 궁궐을 수축하고 성곽을 쌓게 한다.

    대대적인 궁궐과 성곽수축으로 백제는
    국가재정은 파탄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원성이 하늘을 찔럿다.
    국력과 군사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도림스님은 몰래 백제 한성(漢城)을 빠져나와 고구려 장수왕에게 "지금 이때야 말로 백제를 공격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장수왕은 이때다 싶어 3만군사를 몰아 백제 한성을 공격하는데 밤낮 7일동안 전투끝에 한성
    (漢城)이 함락됐다

    백제 장군출신인 '재중걸로'와 '고이만년'이 백제를 배반하고 고구려에 투항해 백제 침략에 앞장섰다.

    '재중걸로'와

  • 작성자 24.02.16 05:41

    '재중걸로'와 '고이만년'이 몽촌토성으로 피신중인
    개로왕을 사로잡아 개로왕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개로왕을 조롱 하였다.

    결국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에서 장수왕의 칼을 맞아 죽었다.

    괴롭게 죽어서 개로왕인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아차산 기슭에 버려졌으니 찬란한 500년 한성백제 역사가 한스럽고 애닯다 하지 않으리요!

    이로써 백제 도읍지인 한성(위례성)백제는 5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지금의 공주 웅진성으로 천도하여 웅진백제를 열었으며 5세기 말 6세기 초에 백제 성왕이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사비백제' 시대을 열었는데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사비성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을 다했다.

    475년 한성백제가 망하고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도읍지를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옮기니 "웅진백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처럼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몽촌산성 탑방 즐거움을 더했다.

    약속된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 탐방로를 단축하기로 하고 마지막
    코스인 "곰말다리"인데
    곰+말(마을의 고어)을 기념하여 만든 다리다.

    또한 그 다리위에서 조이산악회의 단결과 화합을 다짐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점심은 닭

  • 작성자 24.02.16 05:42

    점심은 닭도리탕전문 음식점인데 막걸리와 소주 한 잔을 걸치며 정담을 꽃피웠다.

    조이산악회에서 최고 연장자인 안태호선배님이 건배 제의와 덕담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올해 82세인데 나이를 잊고 젊고 활발한 모습으로 함께 해주셨다.

    졸업기수별로 호명해 일으켜 세워 박수로 환영했는데 가장 많은 동문 참석율은 19회 박찬선선배님 기수로 여섯분이나 참석하였다.

    이번 산행 참여자의 특징은 22회를 기준 윗기수 선배님들께서 많이 참석해 주셨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앞으로 조이산악회에 관심과 애정을 갖아주시고 줄기차게 참여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오늘의 주요인물은 23회 정찬구동문이시다.

    정찬구 동문은 조대부고 모교 운동장 전면에 인조잔디구장을 설치하고 그둘레에 육상용 타탄트랙을 국민체육진흥기금으로 설치하게해주셨으니
    정찬구 동문의 숨은 공로가 오늘에사 빛을 보았다.

    정찬구동문께서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으로
    올림픽과 2002월드컵 등 국제스포츠행사를 성공리 개최하고
    국민체육진흥공단 스포츠사업본부장을 역임하며 한국스포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 작성자 24.02.16 05:45

    크게 기여하셨다.안인창 동문은 조대부고 브라스밴드 악단장 출신으로 육군본부 군악대장에 이어 서울올림픽조직위 음악담당관실장으로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및 모든 문화예술행사에 필요한 음악을 선곡 편집 연주단체섭외 교육 등을 총괄하여 한국의 음악성을 세계에 알리는 훌륭한 족적을 남기셨단다.

    88올림픽기념광장 벽면에 올림픽성공에 크게 공헌한 자를 기리기 위해 공헌자의 이름을 석판에 새겨져 있는데 우리 조대부고 6회 안인창동문과 23회 정찬구동문 두사람이나 그 이름이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

    조대부고 동문으로 자랑스럽고 그 공로를 우리 조대부고 동문들이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찬구동문께서 문병국 사무총장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여 아주 귀한 "88올림픽 기념 우표집"을 선물하셨다.

    하도 즐거운 나머지 교가제창도 잊고 오늘 행사를 마무리했다.

    3월달 둘째주 일요일 청계산 시산제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 많은 선후배 동문님들이 참여하실 것으로 기대해 본다.---김경준 댓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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