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식료품을 주문하는 생협은
매주 월요일에 주문을 하면
수요일에 문 앞에 갖다 놓는다.
잊어버리기 전에 12시가 넘자마자 주문을 하려고
필요한 것이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았던 메모지를
컴퓨터 옆에 붙여놓았다.
내일이 주문하는 날 맞는지
요일을 확인하며 보니까 오늘이 16일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일이 아버지 월급날이네...
매월 17일은 아버지의 월급날이었다.
아버지의 월급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지가
삼십 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17일은 여전히 나에게 아버지의 월급날이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17일이라는 날짜가 눈에 들어오면
십중팔구는 아버지의 월급날을 떠올린다.
어느 집이나 그랬듯이,
나 어릴 땐 아버지가 봉투에 넣은 월급을 받아오셨다.
급여내역이 빼곡하게 적힌 갈색 봉투에
백 원짜리 지폐를 주축으로 일 원짜리 동전도 들어있었다.
아버지의 월급날은 가족 모두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엄마는 생활비 계산을 다 해놓고
수고하신 아버지를 위해 정성껏 저녁상을 준비하셨다.
우리들은 우리대로 제비 새끼들 마냥
골목 입구의 점방에서 사 오실 뽀빠이를 기다렸고,
우리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삼촌 둘과 작은 고모는
큰형인 아버지가 주실 용돈을 기다렸다.
진정한 술꾼이셨던 아버지는
술을 조금 마시는 사람이 제일 밉다고 하셨다.
너나 할 것 없이 힘들게 살던 시절,
박봉을 쪼개서 퇴근 후 술을 마시는데
그런 인간들은 술을 안 마시고
안주를 자꾸 집어 먹어서 술값만 올려놓는다면서.
그렇게 술을 좋아하셔도 월급날엔
학교 앞 막걸리집에 외상값만 갚아주고는
항상 일찍 오셔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우리를 위해 사 오신 것들을 나눠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우리 아버지 월급은 3,800원 정도였다.
그 해 겨울,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잃어버리고 오셔서
집이 초상집처럼 되었기 때문에
3800은 잊을 수 없는 숫자가 되었다.
전화를 놓기 전에는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늦도록 오시지 않으면
엄마의 신중한 판단 하에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었다.
악몽의 그날,
월급날이니까 당연히 일찍 오시려니 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밥상을 차리셨던 엄마는
대문 밖을 서성이다 들어와 찌개를 다시 데우는 일을
반복하시며 불안해하셨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소식이 없던 아버지는
끝내 우리가 잠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분위기가 살벌하다 못 해 숙연하기까지 했다.
월급봉투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오셨다고 했다.
삼촌들과 작은 고모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마주 앉아 있었고
나는 작은 삼촌의 명령을 받고
문틈에 얼굴을 대고 서서 아버지 방을 염탐했다.
술독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누운 채로 눈을 껌벅거리며
지난밤 술을 마신 다음의 행적을 되짚어가며
어디에서 월급봉투를 잃어버렸는지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셨고,
엄마는 그 옆에 앉아 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을 꽂은 채
무언의 독촉으로 강력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기억을 해내지 못 하시면 엄마에게 심한 문초를 당하실 처지였다.
술독을 못 이겨 몇 번이나 토하고 난 후에야
월급봉투를 찾아보겠다며 퀭한 얼굴로 나가신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술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월급봉투만이 아니었다.
지갑, 서류봉투, 우리 주려고 사오시던 소년중앙 잡지
그리고 엄마가 큰맘 먹고 사주신 자전거.
자전거는
학교까지 걸어서 삼십 분도 안 걸리는데
아버지가 술을 안 마실 테니 사달라고 조르셔서
얻어낸 자전거였다. 엄마가 믿지도 않으셨지만.
그걸 술 마시고 잃어버리시다니.
그런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지만 월급날이 아니어도
저녁이 되면 온 가족이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오셔야 저녁밥을 먹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반찬을 만들고,
아버지가 오셔야 장롱 위에 얹어 놓았던
모처럼 생긴 맛있는 것을 내려서 먹었다.
월급봉투를 가져오셨기 때문에
대우를 받으셨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월급이 은행으로 바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 돈을 쓰고 살아가는 요즘엔
아버지의 자리가 있는 ‘식구’라는 개념이
점점 옅어져 가는 게 현실이 되었다.
월급날,
양복 안주머니에 월급봉투를 넣고
제비새끼들에게 줄 뽀빠이가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든 채,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던 젊은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계란이나 들기름 발라 구운 김이 맛있는 반찬이었던
직사각형의 자주색 나무밥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시간들이 몹시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