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44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신군부세력의 정권 탈취 음모에 맞서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일어나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18년간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기대하였던 시민들은 신군부의 노골적인 쿠데타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국회는 해산하고, 정치인들은 연금과 구속으로 탄압하였습니다. 대학은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들이 장악하여 어떤 정치 행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시위를 군인들은 폭력으로 막았으며, 급기야 전두환의 발포 명령으로 수백 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게 되자 시민들은 자위 차원에서 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으로 시위와 저항은 끝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군인들은 진실을 밝히지 않고 정권을 차지하고 권력을 누린 다음 죽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부도덕한 정권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40여 년이 지났으니 아픔은 잊혔으리라 생각하지만 고통은 여전합니다. 거짓과 음모로 피해를 본 5·18 유공자와 광주시민들을 모욕합니다. 보수 정치인들조차 거짓 주장에 동조하며 분열을 일으킵니다. 사실과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진실을 인정할 용기도 없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도 없습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어둠 속에 지내며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근거나 증거도 없이 우둔한 생각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혼란과 분열을 겪지 않도록 지혜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주의 아픔은 잊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아파하고, 분노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와 생명과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시민들이 아픔과 슬픔, 고통을 겪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나간 일들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배우지 못합니다.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일제 식민시대의 고통을 있고, 침략 행위를 옹호하기도 하고, 어떤 정치인은 ‘친일파가 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 전쟁의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있는데, ‘전쟁 준비를 하며 전쟁도 불사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독재 시대 고문과 투옥, 자유를 빼앗겨 고통을 받은 이들이 많은데, 독재자를 우상화하려는 정치인도 많습니다.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 국민의 눈물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요?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독재자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수만 명이 희생되고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2년이 지났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며 무기를 공급합니다. 전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계속 공격합니다. 4만 명 가까이 희생되었고, 가자지구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생들이 전쟁 반대를 외치지만 정부는 반유대주의라고 비판합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사람들은 기억하며, 유대인들을 동정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켜도 피해자라는 이유로 지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치 독일과 똑같은 행위를 하며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기 때문에 동정여론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며 외면하려고 합니다. 세계의 시민들이 불의와 폭력을 외면할수록 세상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생명의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을 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께서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고통 받으며 탄식하고 신음하는 피조물(롬 8:22)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간구하시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선한 의지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전쟁과 폭력,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들의 의지는 사라졌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던 기쁨과 감격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근심만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제자다울 때가 언제였을까요? 믿음 좋을 때, 신앙 고백을 할 때, 열정을 나타낼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을 때, 진정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당부하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말씀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옥에 가두고 때리고 협박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제자를 제자답게 만들고,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힘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의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 사건 때 제자들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4)고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고,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 힘을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선포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선포하시자 제자들은 ‘기뻐하였다’(20절)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과 슬픔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주님은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평화를 선포하시며 제자들에게 파송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하나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주님의 일을 계속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마 28:19-20) 파송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힘과 지혜,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주님의 의지로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님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전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제자들에게 ‘힘’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주어집니다.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니라.’(23절) 이 권한은 죄를 사하는 권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며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신성모독이라며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한은 ‘세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죄를 용서받은 상징적인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거부하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은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힘입니다. 그 힘을 가리켜 성령의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래 전 어느 원로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스펀지 목회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성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목회는 그렇다 치고, 성도들 또한 스펀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스펀지는 물을 잘 흡수합니다. 이와 같이 좋은 신앙은 수용을 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도 받고, 성령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의지와 결단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성도답게 만드는 성령을 받아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지 않을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그 힘은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만듭니다. (고전 12:3) 또한 주님께서 기도하신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요 17:22) 그 힘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새롭게 만들어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그 힘이 우리가 낙심하고 지치고 고통을 겪을 때,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롬 8:26)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 충만은 오순절날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취하였다’고 하듯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기쁨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순종하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 힘이 항상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성령을 받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