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삶의 이념이 있고, 이 이념을 쫓아가며 삶을 운영한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무개념을 쫓아간다.
사람의 한 평생이 이런 패턴이기에 사람의 일생은 결국 자기 이념 추구였던 것이다.
이 이념 추구를 그 사람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멈춰 서서 자기가 쫓고 있는 대상을 헤아리는 자 많지 않다.
왜, 무엇을, 어떻게 나는 추구하는 것인가를...
오늘 당신은 무엇을 쫓아다닌 것인가?
중국 도가 철학자 장자가 조릉이라는 곳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을 때
남쪽에서 거대한 까치가 날아와 장자를 스치고 가까운 밤나무 숲에 앉았다.
재빨리 숲으로 따라 들어간 장자는 화살로 까치를 겨누었다.
가만히 보니 그 까치는 나무에 붙어있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사마귀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는 게 아닌가.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까치는 그 사마귀를 노리고, 자기는 까치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마귀나 까치는 먹이에 마음이 팔려 자기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기는...? 까치를 노리고 있는 자기는 누가 노리고 있는 것인가?
"먹이를 노리는 자가 또 먹이가 된다. 이익을 쫓는 자는 해를 부른다."
여기까지 각성이 이른 장자는 활과 화살을 버리고 급히 밤나무 숲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뒤쫓아 온 밤나무지기에게 붙잡혀 밤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실컷 욕을 먹게 되었다.
그 후 장자는 한 순간 욕심에 팔렸던 자신이 부끄러워 석 달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인가를 노리고 쫓아간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개인도 사회도 산다는 것은 어떤 과녁을 세우고 거기에 화살을 날리는 과정과 같다.
개인도 사회도 자신의 목표 자신의 이익을 향하여 치달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산업사회의 생리에서, 영리 단체 회원으로서 한 사람의 사냥꾼 같지 않은가?
그러나 위험한 사냥꾼이다.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까치는 사마귀를 노리며 장자는 까치를 노린다.
이익과 목표 달성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자기 삶의 방식에 젖어들고,
자기 삶의 정당성을 분별하지 않고 인생이 소멸되어감을 의식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반성이 없다.
흐르는 강물처럼, 달리는 자동차처럼 오로지 본능과 이익에 지배되는 인간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그는 병과 실패와 불행과 세월에 습격되고
모든 관계와 꿈과 우상을 내려놓고 인생 무대에서 슬프게 퇴장한다.
그가 쫓는 자였을까? 쫓는 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쫓기는 자였던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보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규칙적으로 바쁘게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끝없이 꿈과 이익과 우상을 쫓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정신 팔려 있지만
그들의 등은 그 보이지 않는 사냥꾼의 손에 들린 화살의 표적이 된다.
죽음이, 병이, 무서운 공허가, 대책 없는 미래가 그들을 노린다.
생각하라. 뒤를 돌아보라. 쏜살처럼 달리는 열차에서 가끔은 내려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쫓고 있기에
그들에게는 쫓는 자가 없다.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영광이 그들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2024. 6. 14
이 호 혁
첫댓글 영광이 따르는 삶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