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선사(奉先寺) 입문
▲ 봉선사 느티나무 |
연꽃 논두렁을 둘러보고 잠시 접어두었던 봉선사 경내로 이동했다. 경내 직전에 이르니 훤칠 한 키의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베풀며 나그네를 맞이한다. 연꽃 논두렁에서 작렬한 햇살에 시달리다 그의 그늘을 맛보니 지옥에서 극락으로 탈출한 기분인데, 나무의 예사롭지 않은 덩 치를 보니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었다. 허나 그가 직접 속삭이기가 쑥쓰러웠는지 그 밑도리 에 안내문을 두어 그의 사연을 대신 읊어주고 있다.
이 나무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현재의 봉선사를 짓고 광릉(세조의 능) 의 원찰로 삼은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절이 송두리채 파괴되었던 임진왜란과 6.25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56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음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이며 고품격 그늘을 아낌없이 드리운다. |
▲ 검은 주근깨로 자욱한 하마비(下馬碑) |
하마비의 울퉁불퉁한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7자가 쓰여있다. 그 내용은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닥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그로 인해 하마비라 불린다. (하마 서식 지를 알리는 비석이 절대로 아님)
하마비는 궁궐과 관아, 향교, 서원, 높은 사람의 무덤과 사당 앞에 세우던 비싼 존재로 제왕 과 왕후(황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무조건 말에서 내리게 했던 위엄 돋는 비석이다. 하지만 절은 하마비를 지닐 자격이 아예 없었다. 다만 봉선사는 세조(世祖)의 위패를 담은 어실각(御 室閣)이 있어 하마비를 장만하게 되었으며, 그 하마비의 위엄으로 절에 해코지를 하려는 유생 과 양반들로부터 굳건히 절을 절을 지킬 수 있었다. <대구 파계사(把溪寺, ☞ 관련글 보기>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 관련글 보기)도 봉선사와 같은 이유로 하마비를 지녔음> 어실각은 1468년에 지장전 자리에 지어진 것으로 이때 하마비가 세워졌는데, 비석의 높이 93 cm, 너비 37cm, 두께 18cm 덩치로 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렸던 봉선사의 위엄과 명성을 느끼 게 한다. |
▲ 경내를 가리고 앉은 청풍루(淸風樓) |
청풍루는 팔작지붕 2층 건물로 1층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 역할을 하는 공간으 로 2층을 따로 설법전(說法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풍루 앞 계단에서 청풍루 너머까지 천왕 문(天王門)과 해탈문(解脫門), 소설루(小雪樓)가 겹겹이 있었으나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년에 싹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신도들이 '조약돌 모으기 운동'을 벌여 1985년 지금의 청풍루 를 장만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종무소에서는 시원한 물과 믹스커피, 사탕을 제공하고 있으니 입과 목이 심심하거나 날씨가 힙겹게 느껴지면 잠시 길을 멈추고 머물러도 된다. 또한 경내 앞에는 전통차와 불교용품, 서적을 판매하는 전통찻집이 있어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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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쪽에서 바라본 청풍루(설법전) | ▲ 당간지주(幢竿支柱) |
청풍루 주변에는 검은 피부의 당간지주가 우두커니 서 있다. 이 돌덩어리는 1469년에 장만한 것으로 명종(明宗) 시절에 봉선사와 강남 봉은사(奉恩寺)에서 승과를 치를 때, 승과기를 높이 달아두기도 했다. 1매의 대석을 깎아 양쪽 기둥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두 기둥이 하나의 돌로 연결된 흔치 않 은 형태로 기둥 높이는 148cm, 기둥 너비 34cm, 기둥 사이 40cm, 전체 너비 108cm, 두께 100 cm 규모이다. 지금은 승려들을 바쁘게 만들던 승과도 없고 괘불걸이 역할도 후배들이 담당하 면서 마음에도 없는 한가로운 신세가 되었다. |
▲ 동종이 깃든 2층 범종루(梵鍾樓) 1층에 봉선사 제일의 보물인 동종(대종)이 깃들여져 있다. |
봉선사에 왔다면 범종루를 꼭 살펴보기 바란다. 청풍루 동쪽 구석에 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쉬 운데, 그 1층에 봉선사 제일의 보물인 동종(대종)이 들어있다. 아무리 봉선사에 왔더라도 그 를 안보고는 봉선사에 갔다고 우길 수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비중이 큰 존재이다. (연꽃 논 두렁도 좋지만 절의 개방된 보물과 문화유산은 가급적 다 보고 가는 것이 관람과 답사의 예의 라고 봄) |
▲ 봉선사 동종(銅鍾) - 국가 국보 |
봉선사 대종(大鐘)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동종은 1469년에 왕실에서 만들어 내린 것이다. 조 선 초기 대표적인 대형 범종으로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 규모인데, 종 꼭대기 에는 용통(甬筒)이 없고 2마리의 용이 서로를 등지며 종의 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 종 어깨에 는 2중의 가로줄을 둘러 몸통 부분과 구분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 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네모난 연곽(유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가로 줄 밑 부분에는 강 희맹(姜希孟)이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글씨를 쓴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종을 만든 사 연과 관련자들의 이름이 소상히 깃들여져 있다. 종 입구 위쪽에는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 는 당시 유행하던 물결 모양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고려 종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로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보살입상, 육자광명진언(六 字光明眞言)이라는 조선 종의 새로운 요소가 등장해 조선시대 종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종의 나이는 거의 560년을 헤아리나 아직 정정하여 매일 새벽과 저녁에 타종으로 몸을 풀고 있다. 범종루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동종 밑에는 속인(俗人)들이 무심하게 던진 동전들이 먼지를 옷으로 삼아 잠자고 있다. 세금을 들여 만든 저들을 저리 놀려둘 것이 아니라 수거하 여 제발 좋은 데에 썼으면 좋겠다. |
▲ 대의왕전(大醫王殿) |
범종루 옆에는 범종각처럼 생긴 건물이 있다. 그는 '대의왕전'이란 낯선 이름의 현판을 내걸 고 있는데, 대의왕은 큰 의원(醫員) 왕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절에서 그 명칭이 어울리는 존 재는 누가 있을까? 바로 약합을 지닌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로 대의왕전은 그의 거처이다. 약사여래불은 돌로 다져 금동을 씌운 것으로 얼굴 부분만 도금을 입히지 않고 돌의 원초적인 색깔을 유지하고 있어 서로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선사의 내력을 살펴보 도록 하자. |
▲ 대의왕전 약사여래불 탐스러운 광배(光背)부터 몸통까지 모두 금색 투성이나 얼굴만 하얗다. 게다가 몸통에 비해 얼굴이 너무 커서 달랑 얼굴만 있는 모습 같다. |
크낙새도 마음 놓고 서식한다는 광릉숲 동쪽 부분에 봉선사가 아늑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곳은 우리나라 교종(敎宗)의 본산(本山)이자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25교구 본사로 조선 초 부터 광릉(세조와 정희왕후의 능)과 왕실의 원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에 힘입어 탄탄대로를 달렸던 위엄 넘치는 절이다. 이렇게 대단한 위치와 위엄을 지닌 이곳은 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雲岳寺)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운악산 봉선사'를 칭하고 있는데, 그 운악산은 바로 현등사(懸燈寺, ☞ 관련글 보기)를 품고 있는 뫼로 여기서 무려 20km나 떨어져 있다. 그 산줄 기가 여기까지 미친다고 하여 주변 산을 다 제치고 운악산을 내세우는 것이다.
창건 이후, 조선 초까지 딱히 사적(事績)이 없어 창건 시기에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하며, 세종 (世宗) 때 불교 7종을 선교(禪敎) 양종으로 강제 통합하면서 사라졌다고 전한다. 그렇게 사라 진 운악사는 반세기도 안되어 봉선사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등장을 한다.
1468년 조선 7대 군주인 세조가 승하하자 그의 아들인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은 봉선사 서쪽 숲을 능역(陵域)으로 삼아 광릉을 조성했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동쪽 숲에 있던 운악사 터에 89칸 규모의 절을 짓고, 광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그 시절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게 지 어졌다. 절이 완성되자 선왕(先王)인 세조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선사라 했으며, 예종은 봉 선사 현판과 대종(동종)을 절에 하사했다.
1550년 교종 수사찰(首寺刹)이 되어 교학 진흥의 중심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 된 것을 낭혜(朗慧)가 중창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다시 절이 날라가자 1637년 주지 계민 (戒敏)이 중창했으며, 1749년 재점(再霑)이 중수했다. 1790년 나라에서 천하 사찰을 관리하고자 5개의 규정소를 두었는데, 봉선사는 함경도(咸鏡道) 사찰을 관리하는 규정소가 되었으며, 1848년 화주 성암(誠庵)과 월성(月城)이 중수했다. 1902 년 월초(月初)가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수사찰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삼자 봉선사는 중법산(中法山)의 일원이 되어 경기도 지역 사찰을 관리했으며, 원흥사가 1904년 문 을 닫자 그곳에 있던 건물 일부와 불상, 탱화 등을 봉선사로 옮겼다. (봉선사 칠성탱과 독성 탱은 그곳 출신임)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면서 31본산의 하나이자 교종대본산(敎宗大本山 )이 되었으며, 1926년 월초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초반에는 무탈하게 총탄이 비켜갔으나 1951년 3월 6일 인근에서 전투가 벌 어지면서 법당 등 16동 150칸의 건물이 무심한 총탄에 싹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많은 탱화와 불상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 다행히 대종과 괘불은 그 난리통에 겨우 살아남았고, 삼성각은 건물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1959년 화엄(華嚴)이 범종각을 세워 대종(동종)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며, 1961년부터 1963년 까지 운경(雲鏡)과 능허(凌虛)가 운하당(雲霞堂)을 세웠고, 1970년대에는 독립운동가 출신인 운허(耘虛)가 큰법당을 중건했다. 그리고 1977년에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웠다. 특히 1970년대에 돈과 권력을 꽤나 쥐고 있던 이들의 지원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박정희의 측근으 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악명을 떨친 이후락도 있었다. (이후락 공덕비도 있음)
경내에는 큰법당을 비롯해 관음전, 지장전, 삼성각, 조사전, 방적당, 회랑 등 2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국보인 동종과 1735년에 조성된 비로자나삼신괘불도(국 가 보물), 국가등록문화유산인 큰법당, 지방문화재인 칠성도, 독성도, 목조불좌상(경기도 문 화유산자료) 등이 있다. 그 외에 5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와 하마비, 당간지주, 조선 후기 승탑인 보운당(報雲堂)승탑이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를 귀띔해준다.
절 앞에는 넓게 논두렁을 닦아 연꽃을 심었는데, 매년 7월 말에 '봉선사 행복바라미 연꽃축제 '가 열린다. 또한 지금의 봉선사를 있게 해준 광릉이 1km 거리에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 보면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며, 광릉숲이 절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숲내음도 진하다.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어린이와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여 름숲속학교, 불교 지식을 전하는 불교대학과 다양한 문화강좌를 열고 있다.
끝으로 봉선사는 친일매국 문학가로 악명이 아주 대단했던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와도 인 연이 깊다. 그의 6촌형으로 독립운동 경력이 화려했던 운허가 봉선사에 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그 소식을 6촌동생에게 직접 알려주었다. 당시 이광수는 여기서 가까운 사릉리에 서식하고 있었다. 독립 소식에 염통이 쫄깃해진 이광수가 봉선사로 염치없이 피신을 오자, 운허는 그런 글러먹은 6촌 동생을 위해 절 담장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머물게 했다. 방 앞에는 추사체(秋史體)로 쓰인 ' 다경향(茶經香)' 현판이 있어 그 방을 다경향실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이광수는 6촌형의 권유 로 법화경(法華經)을 탐독해 죄인의 심경으로 돌베개를 베고 살았다고 한다. (진심으로 그랬 는지 쇼로 그랬는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나중에 그때의 추억을 곱씹고자 나중에 '돌배개'란 수필집을 내었다. (그가 머문 인연으로 일주문 부근에 '이광수 기념비'가 있음)
* 봉선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길 32, ☎ 031-527-1951~2) * 봉선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방부당(房付堂) 큰법당 뜨락 동쪽에 자리한 건물로 능엄학림 승려들의 교육 장소로 쓰이고 있다. 방부당이란 이름은 승려들이 어느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마음을 정리하며 다음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란 의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