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마 7:21-2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공원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천국 간다고 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하면 죽으라는 말처럼 들려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당장 죽으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다, 언제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마 6:9). 아버지의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어디 있느냐, 천국은 언제 이루어지느냐는 물음은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며, 우리는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물론 천국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할 때, 천국은 완성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온전한 믿음으로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집이 세고, 흠이 많고, 허물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지와 결단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믿음은 삶과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천만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 미움과 증오, 차별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보다 안 믿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이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합니다. 선한 행위를 사람들이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선한 영향력을 나타낸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세상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전도하고, 주님께 충성을 다한다고 하는데, 그들에게서 사람들은 예수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과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 말씀이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히려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성공과 출세는 믿음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은 죄 때문이라고 정죄합니다. 모두 예수님의 뜻이거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예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주여’라고 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할 때 ‘주님’을 부르며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신앙고백이나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실천은 주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면 천국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믿음이 없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없지만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못 간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으로 옳고 선한 일을 판단한다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을 잘 지키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잘 지키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 주님으로부터 ‘너는 그만하면 영생을 얻을만하다’고 인정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묻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자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0:25-37).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사람들은 ‘내 이웃’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웃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의지와 선택과 상관 없이 자비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원치 않는 일이라도 기꺼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웃 사랑을 실천합니다. 많은 일을 합니다.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 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 불의한 권력에 탄압 받는 이들, 차별에 고통 받고 슬퍼하는 이들, 자본의 힘에 눌려 가난하게 사는 이들, 세상의 수많은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22절) 오늘 교회가 많이 하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교회가 커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솔직히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고, 그런 교회가 부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하여 일했는데 주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하게 사실을 아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다’는 뜻은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일치’를 말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고백하여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능력을 받은 자들입니다. 선지자로서 헌신적인 삶을 살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믿음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시고, 그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한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하실까요?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악한 일을 한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행하면서 ‘주의 이름’이라고 포장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 있고, 주님의 뜻과 생각을 잘 알고, 그 뜻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은 지식과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대부분 ‘내가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치워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 하나가 되고,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 좋고, 성실한 그리스도인, 능력이 많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자기 의지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신앙심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무너집니다. 오늘 말씀처럼 ‘비가 오고 큰물이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튼튼하게 신앙을 쌓아 올렸는데 무너진 것은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 반석이 ‘아버지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율법 조항을 잘 지키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도 사랑하라, 사랑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것은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 때,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도록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