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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개요
신약성경의 처음 4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복음’이 ‘네 복음서’로 기록된 것이 혼란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네 명의 저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독특한 서술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각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독특한 느낌, 즉 공통점 안의 차이점, 혹은 차이점 속의 공통점, 그리고 개개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변형시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은 그대로 말되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모든 행적들은 역사상에서 그대로 발생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4복음서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자세입니다.
마태복음은 세리였던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들과의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구약의 인용이 많으며, 그 구절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측면에서 인용됩니다. 마태는 세리였기에 복음서를 용의주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모세5경이 5권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5대 강론을 중심으로 강론과 행적을 순서적으로 5번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5대 강론이란 산상설교(5-7장: 하나님 나라의 법),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10장: 하나님 나라의 선포), 비유(13장: 하나님 나라의 확장), 교회안에서의 관계(18장: 하나님 나라의 교제), 종말강론(23-25장: 하나님 나라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1장
‘이스라엘’에 비췬 빛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족보, 토레도트)라”라고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14대씩 3구분으로 구성됩니다( 절). 14대로 억지로(?) 맞춘 것은 다윗 왕국의 중요성 때문입니다(‘다윗’의 히브리어 세 알파벳을 숫자로 환산하면 14입니다). 3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왕국의 준비기”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는 “왕국의 번성기”이며, 바벨론 포로부터 그리스도까지는 “왕국의 쇠퇴기”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 즉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왕국이 도래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왕들의 족보에 부정한 이방여인 4명( , , , )이 소개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태어날 “예수”는 이름 그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절). 또한 예수님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언의 성취자입니다( 절). 아하스가 유다를 통치할 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쳐들어왔을 때 이사야는 임마누엘이란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사 7:14) 그 아이가 철이 들기 전에 두 왕의 땅이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16절). 그리고 앗수르를 의지하였던 유다도 멸망당할 것인데 나중에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왕조를 영원히 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7:17-9:7).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이사야 예언을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마태복음 2장
이제 온 ‘세상’을 향해 비췬 빛 예수님을 살펴봅니다. 동방(페르시아나 바벨론)의 박사들(점성술사)이 갑자기 나타난 별을 보고 이스라엘에 왕이 태어난 것을 알고(민 24:17) 태어난 왕에게 경배하러 헤롯 왕궁으로 옵니다. 아마 그들이 수집한 별에 관한 모든 문서 중에 민수기의 별에 관한 기록도 있었을 것이며 그 별이 바로 유대인의 왕에 대한 별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대표자들에 의해 메시아로 인정이 되었지만 경배를 받지는 못했던 예수님을 살펴봅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왕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이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미 5:2). 그러나 그들이 헤롯의 눈을 의식했든지 태어나신 왕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되신 예수님을 살펴봅시다(히 2:17).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이스라엘)을 불렀다”라는 구절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절). 호세아 선지자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면서 위의 구절을 말합니다(호 11:1).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은 예수님이 친히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한 고통까지 동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헤롯의 유아살해를 살펴봅시다. 박사들은 아기에게 경배하고,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베들레헴과 인근의 2살 아래의 유아를 다 죽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31:15의 성취입니다( 절). 바벨론의 장관 느부사라단은 유다를 멸망시킨 후 라마에 포로들을 소집하여 바벨론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라마 근처에 라헬의 묘(창 35:19, 삼상 10:2)가 있음을 알고 라헬이 포로로 잡혀가는 후손들을 위해 통곡하고 있다고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즉 라헬의 이 통곡이 죽은 유아를 위해 통곡하는 여인들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해당한 ‘유아들’ 때문에 여인들이 통곡한 것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나 ‘그 유아’가 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면 모든 눈물이 씻어질 것입니다.
헤롯이 죽자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요셉은 악한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어 있음을 알고 갈릴리 나사렛에 가서 삽니다. 이것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절). 구약 성경 어디에도 메시아가 나사렛에 사실 것이란 구절이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사렛 사람들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조롱과 천대를 받았습니다(요 1:46; 행 24:5).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문자적인 성취라기보다는 의미적인 성취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구약을 단지 문자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문자를 초월하는 더 큰 성취를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멸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3장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말 4:5)고 하신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합니다. 이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사 40:3)는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절).
세례요한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이 임박한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저주와는 상관없다는 교만을 버려야 했습니다( 절). 그는 회개하는 자에게 회개의 징표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세례요한의 설교는 신명기 32장에 나와있는 모세의 설교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십니다. 만류하는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무슨 말입니까? 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가 씻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동일시되어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나오시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절). 세례 받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된 아들로 인침을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전쟁을 수행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세례를 받으시므로 자기 백성과 동일시되신 예수님이 이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십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생활동안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이 죄악을 보상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절).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서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시 떡이 있어야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늘 떡만을 요구했으나, 그리스도는 떡을 거부하시고 말씀 순종에 오직 살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 - ( 절).
광야생활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시는 증거로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만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 - ( 절).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 앞에 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 6:13) - ( 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친히 시험을 받으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백성들을 새롭게 출애굽시켜 안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붙잡히는 것이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역의 중심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긴 것과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백성을 안식의 길로 인도하시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사역의 중심지를 옮기셨습니다. 이것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사 9:1-2)라는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절). 앗수르가 침공한 이후 그 땅은 종교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해 그야말로 사망과 흑암이 지배하던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땅은 여러 인종이 섞여 살던 낙후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사역의 중심지를 옮기므로 큰 빛이 비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사역의 중심지를 옮긴 것조차 예언의 성취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네 명의 제자를 부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절). 이 소명은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과 관계가 있습니다. 야곱(창 49:13)과 모세(신 33:19)는 스불론과 납달리의 영광을 예언했습니다. 해변에 고기들로 풍부해질 것이고, 열국 백성이 부름을 받아 여호와의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을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가 부르신 이유는 다른 랍비들처럼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데에 있지 않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이었던 갈릴리의 영적인 풍성함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후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절). 또한 예수님은 모든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드디어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은 이미 구원받은 자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 구원받기 위한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율법의 원래 의미와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산상보훈이 율법보다 더 무거운 짐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보훈이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에게만,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교회 안에서의 관계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곧 다가올 완전한 나라를 기대했기 때문에 선언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사회혁명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자신과 더불어 도래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소개하시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그 중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천국시민의 정체와 그들이 받을 복을 소개하십니다. 첫째로 천국시민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사회적으로 고통을 당하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둘째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죄로 인해 굴육을 당하기에 하나님께 눈물로 통곡하는 자입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아무 악의와 원한이 없습니다( 절). 넷째로 개인정의와 사회공의가 편만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입니다. 다섯째로 자신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입니다. 여섯째로 거짓없이 하나님을 향해 한 마음을 품는 자입니다( 절). 일곱째로 희생을 지불하면서까지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미움과 편견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처럼 천국시민은 오직 천국의 상을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복 받은 천국시민은 천국의 법을 증거해야 할 소금과 빛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증거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자들이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밟힐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소극적인 면). 그 다음 예수님은 천국시민이 산 위에 있는 동네(회칠때문에 태양에 빛남)와 등불(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둠을 밝히던 유일한 도구)처럼 숨길 수 없음을 말합니다(적극적인 면). 천국시민은 천국의 법인 “착한 행실”을 밝히 증거해야 할 자들입니다( 절).
예수님은 천국의 법이 어떤 성격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문구를 통해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를 제시하셨습니다.
“살인”의 경우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죽이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 대한 ‘분노와 모독’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형제에 대한 분노와 모독이 신속히,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는 절대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간음”의 경우 유대인들은 육체를 범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혼”의 경우 유대인들은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이혼과 이혼녀에게 장가드는 것까지도 간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맹세”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속이는 수단으로 삼았지만 예수님은 모든 맹세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으니 말에 신실함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복수”의 경우 유대인들은 율법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기에 복수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악한 자를 결단코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원수 사랑”의 경우 유대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인 율법 재해석의 결론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받은 천국시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시민은 율법의 문자적인 순종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이 반영되어 있는 율법을 진정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절).
마태복음 6장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였기에 유대인들에 의해 잘못 해석된 모세의 율법을 바로 해석하십니다. 율법순종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상태에서 행해져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율법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선행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예로 들면서 천국시민은 은밀한 가운데,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제”의 경우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기도응답의 효력을 위해 구제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의 동기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기도”의 경우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회당과 거리 어귀에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중언부언(길게 기도하기만 하면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의미없이 말을 반복하는 것)하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고 다음으로 기도의 표본( - 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기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3가지와 우리의 유익을 위한 3가지가 있습니다. 앞의 3가지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인정되기를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가 계속적으로 확장되기를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즉각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뒤의 3가지는 생활하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것과 용서받은 자답게 용서하며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금식”의 경우 유대인들은 ‘나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금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인 형식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바른 금식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절).
이제 예수님은 천국시민의 구체적인 생활원리를 가르칩니다. 천국시민은 재물과 염려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선 예수님은 보물(재물뿐만 아니라 구제, 기도, 금식을 포함한 모든 선행)을 땅에 쌓아두는 자들을 경계하십니다. 재물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절). 어두우면 더듬거릴 수밖에 없듯이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자는 영적인 소경이라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분별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재물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나중에는 재물만이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재물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게 됩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재물의 신인 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절).
재물이 없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국시민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목숨과 몸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음식과 옷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염려한다고 해도 자기의 키(목숨)를 한 자(한 시간)도 더할 수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구체적인 예로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듭니다. 천국시민은 염려에 소비할 그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절). 천국시민이 염려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니 하루를 삶의 단위로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절).
마태복음 7장
이제 예수님은 천국시민이 생활 속에서 갖게 되는 극단적인 면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시므로 율법 재해석을 마무리하십니다.
우선 천국시민은 유대인들처럼 ‘파괴적인 비판’을 일삼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천국시민은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절). 또한 천국시민은 유대인들이 이방원리를 쉽게 도입한 것처럼 ‘무비판’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복음)를 개 돼지(불경건하고 가증스러운 자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절). 복음을 잔인하게 짓밟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천국시민이 유대인들과 달리 이런 극단적인 모습에 빠지지 않고 능력있게 사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시민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일곱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육신의 아버지와 선하신 영혼의 아버지를 비교하여 기도응답이 확실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절)
예수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율법재해석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기주의적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의 원래 의미와 목적을 바로 깨달은 천국시민은 이타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당시 힐렐이라는 랍비는 “네가 미워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 전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적극적인 면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절).
율법의 근본 원리와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마음에서 우러난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신 예수님이 이제 율법순종의 결과를 말씀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이 세상에 넓은 길과 좁은 길, 단 두 길밖에 없음을 말씀합니다. 좁은 길은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가는 사람들이 적고, 넓은 길은 영광의 길이기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넓은 길을 가도록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거짓 선지자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기는 커녕 평안을 빌어 주었습니다. 이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구별이 잘 안됩니다. 오직 그들의 열매로 구별이 됩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절). 그 열매는 거짓과 탐심과 호색일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더불어 불법을 행한 자들은 영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주를 고백하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기도 했지만 주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을 것입니다. 행함에 의해 증명되지 않은 고백과 능력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절).
이제 최종결론입니다. 주의 뜻을 행한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같이 어떤 폭풍우(세상핍박과 시련)가 몰아쳐도 끄떡없을 것입니다. 주의 뜻을 행하지 않은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같이 폭풍우가 몰아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는 고백과 능력과 행함이 결합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심히 놀랐습니다. 그 가르치심이 권세있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태는 예수님의 권세있는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있는 행적을 소개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로 취급받았던 한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었는데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절). 이것은 그 문둥병자의 등록원부를 제거하시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제사장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말씀의 절대 권위를 인정한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절).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천국잔치에서 유대인들이 상좌를 빼앗기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무시받았던 여인까지도 치유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창조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던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 모든 치유사역은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절). 인생의 모든 부족과 연약이 온전히 치유되는 메시아의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치유를 체험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큰 이익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절). 예수님이 신세타령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누릴 것을 바라고 있는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길을 가고 있으니 나를 따르겠다고 하는 너도 동일한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알고 따르려면 따르라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예수님께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절). 예수님이 인륜을 무시하고 너무 잔인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씀은 인륜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데(18절) 그렇게 되면 그 제자는 바다 건너편에서 벌어질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제자의 자격을 갖추려면(행 1:21-22) 지금 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이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갑니다. 중간에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죽겠다고 외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바람과 바다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놀랍니다( 절).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은 자연만물까지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다를 건넌 예수님은 이방지역인 가다라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만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절).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을 부정한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시고, 그 돼지들이 물속에서 몰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능력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물질적인 손해 때문에 귀신들을 쫓아내신 메시아를 쫓아냅니다( 절). 우리도 혹 물질적인 손해 때문에 메시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태복음 9장
다시 본 동네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절).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죄의 용서란 것도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인생이 병으로 고생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죄의 결과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절).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멸시받던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부정한 자들과 식사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호 6:6)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절).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제사를 드리기는 하였지만 온갖 외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선지자 호세아의 시대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해 필요하듯이, 구주는 죄인들을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기쁜 교제 가운데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혼인집 비유를 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 또한 새 천조각은 새 옷에 붙이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하십니다. 금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새 시대가 도래했으니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새 시대가 되었으니 구시대처럼 슬픔과 의심 가운데 살아갈 것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옛 것은 지나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기쁨과 확신 가운데 살아갑시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부탁으로 죽은 소녀를 살려주기 위해 길을 갑니다. 이때 12년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져도 구원을 얻겠다는 믿음으로 병을 고침받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한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 뿐만이 아니라 인생 최대의 적인 사망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십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절).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이 증명되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으로 퍼집니다.
소문을 들은 두 소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 바른 믿음을 고백한 두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고쳐 주셨음을 더 널리 전합니다.
길 가다가 예수님은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십니다. 이때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깜짝 놀랍니다( 절). 그들은 메시아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방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성과 촌을 다니시면서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이런 사역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심히 불쌍히(내장이 동할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여기셨습니다( 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예수님이 직접 추수할 일꾼들을 부르시고 파송하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12명의 사도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절).
제자들은 먼저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방인 선교가 예수님의 생전에도 이미 씨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선권은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거저 받았으니 물질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거저 주어야 합니다( 절). 일꾼이 양식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에, 하나님의 공급에만 의지해야 하기에 제자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자들을 영접하면 평안이 임할 것이고, 영접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대항했듯이 파송받은 제자들도 사탄의 공격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절). 사탄의 공격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성령께서 지키실 것입니다.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절).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전도자들을 위해 항상 예비된 곳을 준비하실 것입니다(23절).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결국은 진리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은 사람의 영혼은 결코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절).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세상이 제자들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제자들도 스스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복음전하는 자는 가족과 자신에게까지도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는 가족보다도,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배타적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불화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따라야 합니다.
파송받은 이들이 항상 고난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기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이처럼 복음을 위해 잠깐 고난받은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실족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걸려 넘어진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은혜만 선포하고 심판은 시행하지 않자 그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35:5-6과 이사야 61:1을 결합하여 인용하므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면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은 선지자들보다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제일 작은 자입니다( 절). 그는 메시아를 가장 가까이서 예언하였기 때문에 선지자들 중에 제일 크며, 반면에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구시대의 인물인 그는 천국에서 어떤 신약 성도들보다 제일 작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푼 고을들조차 걸려 넘어졌습니다. 무리들은 세례요한을 귀신들린 자로, 예수님을 대수롭쟎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고을들의 교만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절).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은 무섭고, 결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고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어린아이들처럼 예수님을 순수하게 따르는 자들만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절).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자들만이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2장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과 동시에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식일 계명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자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을 가지고 안식을 범하였다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배가 고플 때에 진설병을 먹은 것과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성전 안에서는 일한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것이 죄가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법의 권위가 안식법의 권위를 능가하여 제사장들을 보호했다면 성전보다 더 큰 예수님의 권위가 제자들을 보호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다 된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절).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제자들을 걸고 넘어진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동을 가지고 걸고 넘어집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그들이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취급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반대가 극렬해지자 예수님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잠시 피신하셨습니다. 피신 중에도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메시아가 오래 참으심으로 심지어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을 베풀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사 42:1-4). 그리스도는 요란하게 자신을 선전하는 왕이 아니라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왕입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절).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자 무리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짓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질서가 잘 잡혀 있는 사탄의 왕국이 어떻게 서로를 쫓아내는 일이 가능하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사탄)을 결박하고 그 세간(무리들)을 늑탈하는 능력있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절).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왕국을 멸하려 오신 다윗의 자손임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이렇게 명백히 대립되어 있기에 아무라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하다가 회개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절). 여기서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적그리스도만이 범할 수 있는, 환란시에 성도들이 범할 수 어떤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시에 유대인들이 취할 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악한 자는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우니까 메시아라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큰 표적이 되었듯이, 예수님이 3일동안 매장되어 있다가 부활할 것이 메시아의 결정적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으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스바 여왕이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새 시대가 왔으나 계속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됩니다( 절).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친족이 됩니다( 절). 혈연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참여기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지고, 적대적이 된 이유는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하나님의 나라개념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첫째는 말씀을 듣는 네 가지 마음을 상징하는 “밭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버림받은 백성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게 숨기기 위해서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 절). 무릇 있는 자(택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불택자)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절). 예수님의 이 비유해석을 들어봅시다. 길 가 밭은 마음이 완악하여 말씀을 받지 않은 것을 뜻하고,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외부적인 도전(환란과 핍박)앞에서 넘어지는 것을 뜻하고, 가시떨기 밭은 말씀을 깊이 받지만 내부적인 도전(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앞에서 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바로 깨닫고 실천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 무조건적으로 임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에 쐐기를 박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 결실이 달라집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반응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둘째 비유는 “가라지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세상 끝날에 가서야 완전히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절). 이것은 권징을 금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현재 어떤 기준을 세워서 선인과 악인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율법과 유전을 기준으로 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와 천국에서 제외될 자를 명백히 구분시켜 버린 유대인들의 생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율법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구원문제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비유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보기에 작고 미미하게 시작되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결말이 있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절).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절). 이 비유들은 당장 큰 격변이 일어나 천국이 건설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교정시켜 주는 것입니다. 믿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천국의 성장과 완성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 비유는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천국이 숨겨져 있다는 것과 그 가치가 어떤 것보다 우선됨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또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합니다( , 절). 이 비유들은 천국이 정치적인 승리를 통해 눈에 확연히 보이게 올 것이며, 그 결과 자기들은 쉽게 그 나라에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줍니다.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성공에서 제외된다 할지라도 복음을 제일 귀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비유는 “그물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심판이 어떤 형태인지를 가르칩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작된 심판은 결코 지연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명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절). 유대인 서기관들은 옛것(구약)만을 가르쳤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기 때문에 새것(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천국의 실체와 교훈)과 옛것을 동시에 가르쳐야 합니다. 무식한(?) 제자들이지만 더 나은 서기관들입니다.
비유를 마무리하신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무리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나사렛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놀라면서도 시기심으로 가득차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많은 능력을 행지 않으십니다( 절).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이 능력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방법은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접붙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마태복음 14장
분봉왕 헤롯은 자신의 근친상간을 지적한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미신과 여론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허세와 관능에 팔려 세례요한을 죽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배를 타고 빈 들로 떠납니다( 절).
무리가 빈 들까지 쫓아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저녁이 되어 무리가 돌아갈 때가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수많은 무리에게 줄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지 시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손에서 계속적으로 넘쳐나는 떡과 물고기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풍성히 공급하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건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바다 가운데로 들어선 제자들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생기는 빵과 물고기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때와는 달리 풍랑으로 심히 고생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베드로의 요청에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께로 가다가 물결을 보고 두려움에 빠지자 물에 빠져 들어갑니다( 절). 주의 능력에 대한 순수한 믿음만이 예수님의 능력에 동참하는 비결입니다. 이 사건으로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우리 체질을 아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마태복음 15장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갈수록 격해집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왜 장로들의 유전(소위 율법의 구체적인 적용)을 범하느냐고 쏘아 붙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유전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섬겨야 할 물건들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고 선언하면 그 물건은 부모를 섬기는 것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 책망하십니다( - 절).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율법이 절대적인 것이지 사람들이 편하기 위해 만든 유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태도를 날카롭게 비난하시자 그들은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예수님은 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은 식물이요, 소경의 인도하는 또 다른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정함과 부정함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부정케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종교적인 형식을 아무리 준수했다 할지라도 마음이 정결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절).
예수님은 이방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들도 부르기를 꺼려하였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절)라고 소리지르면서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받았기 때문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개 취급 받으면서도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하는 그 여인의 믿음( 절)은 예수님을 감동시켰고, 그녀의 딸은 고침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역시 이방지역인 갈릴리 호숫가 동쪽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발 앞에 엎드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절). 예수님은 자신에게로 몰려든 이들의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굶주림도 돌아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못합니다( 절). 예수님은 칠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
예수님이 다시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돌아오십니다. 이제는 사두개인들까지 동원이 되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과연 메시아라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상은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절). 이런 유대인 지도자들의 거짓 누룩은 심각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먹을 것을 염려합니다( 절).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물질에 대한 지배력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영적이고 내적인 요소를 염려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완악하지는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노골적인 반대에 직면하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신약교회의 기초가 될 제자들을 교육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절). 이 고백이 신약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 위에 세워진 신약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파하게 되며( 절), 천국열쇠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절). 이 말은 신약교회가 죄의 결과인 사망의 권세하에 매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입교시키고 출교시키는 권세를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밝히면 로마에 대해 소요와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하기에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그러면 안된다고 떼를 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꾸짖으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누릴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절).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교회가 예루살렘의 영광을 대신하여 차지하게 될 날까지 살게 될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28절). 신약교회는 주님처럼 고난의 길을 자원하여 걸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며칠 후 예수님은 소위 말하는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밝히 보이십니다. 율법의 제정자인 모세와 율법의 집행자인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이심이 분명하게 증명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였던 베드로는 하늘 영광을 잠시 동안만 보도록 허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을 빨리 얻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렸던 동일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절) 자신들의 기대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한번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비참을 돌이키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구약성경이 말했는데(말 4:5-6) 그것이 언제쯤 성취될 것인지 묻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이 누릴 영광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때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간질병자를 고치지 못해 애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고쳐주신 후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 이 일 후에 예수님은 또 한번 더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성전세를 요구하자 예수님은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절). 예수님은 오해를 막기 위해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전세를 바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숨겨진 하나님의 아들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주어진 고난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잘 걸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본 장은 넷째 강화로서 교회 안에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교제는 어떤 성격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몇몇 제자들을 중시하는 것같이 느낀 나머지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하십니다( 절).
천국시민들은 서로를 받아주어야 합니다. 이런 소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거나 무시하면(특별히 핍박의 때에) 무서운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율법적인 태도로 살아가므로 다른 이들의 양심까지 실족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를.. 차라리... 나으니라”( 절).
천국시민은 멸망에 처할 위험에 빠진 자들을 되찾기 위해 온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절). 천국시민들은 범죄한 형제를 잘 권면해야 합니다. 함부로 권징하면 안되기에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결정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절).
교회의 거룩을 위해 권징이 필요함과 동시에 천국시민은 형제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절). 용서하는 삶이 용서받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19장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은 이제 요단강(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강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강)을 건너 유대 지경으로 접어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관해 질문하자 예수님은 창조섭리( 절)를 들어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들이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자 예수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때문에, 즉 남편의 잔인한 행위로부터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허용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절). 예수님이 마음대로 재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정생활보다 우선순위에 둔 결과 스스로 고자가 된 자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절).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어린이들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진행에 어린아이들이 방해하자 제자들이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제자들을 책망하시고는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절). 어린아이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입장, 즉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입장이 바로 천국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한 부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난 후에 따르라고 하십니다( 절). 그 부자청년은 상대적인 선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절대적인 의(모든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우위에 두고 순종하는 삶)를 통해서만 영생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든 것(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자는 반드시 영생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절). 그러나 자기 의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30절). 나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선한 분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천국시민이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마태복음 20장
베드로가 자신의 충성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19:30). 이제 예수님은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들어 그 의미를 더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은혜의 원리하에서 상급을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 평가하여 많은 상급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책망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절)
제자들은 영광받을 것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데 반해 예수님은 수난받을 것을 다시 한번 더 말씀하십니다( - 절). 예수님이 거듭 거듭 고난을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동원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하시고는 도리어 마실 잔(고난 혹은 심판을 상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을 것과 연결시켜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절).
여리고를 떠나가실 때에 소경 둘이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절) 이들은 조용히 하라는 무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띄워 주십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이기에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여 나귀 새끼 등에 탑니다. 이것은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슥 9:9)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절). 이렇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무리들이 열렬히 환영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여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을 다 쫓아내십니다. 당시에 제물을 가져올 수 없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전내에서 제물을 파는 자들이며, 다른 화폐들을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부르는 게 값이라서 이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절).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보다는 성전을 이용해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사 56:7)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이 무엇하는 곳인지 가르치십니다( 절).
성전을 청결케 하신 후 예수님은 성전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완성하러 오신 분임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본 아이들은 성문에서처럼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에 대해 격분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시 8:2)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절).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좌정하실 예루살렘으로, 왕이 경배받으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루 저녁을 예루살렘 성 밖에서 보내신 예수님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잎사귀밖에 없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십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마릅니다. 제자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묻자 예수님은 기도의 능력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절). 예수님이 아직 열매 때도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저주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슨 권세로 그런 일련의 일들을 행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절) 그들은 요한을 거부하면서도 백성들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십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곧 그들 자신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여론에 휩쓸려 다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세 가지 비유를 하십니다. 첫째는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상속자인 첫째 아들은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가겠다고 대답만 해 놓고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상속자가 아닌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이 비유는 상속자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의 교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절).
둘째 비유는 “불의한 농부들의 비유”입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은 주인에게 세를 주기는 커녕 주인이 보낸 종들이며, 심지어는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이 비유는 언약의무 수행에 충실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절).
마태복음 22장
세째 비유는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임금에게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자기들의 볼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또한 임금들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임금은 처음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을 진멸하고 아무 사람이나 초청합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겨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그 나라로 초청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여러 가지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로마의 권세나 유대인들의 독립열망 중 어느 하나와 충돌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권세에 대한 순종을 어느 정도 인정하시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일에서조차 하나님에게 돌려야 할 명예는 결코 무시되어서 안된다고 말씀하시므로 올무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절).
둘째는 “부활에 관한 문제”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수혼제도에 입각한 7중 결혼 사례를 예로 들어 부활할 때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이 있다면 7형제가 한 여인과 같이 살아야 되는 근친상간이 벌어질 것인데 부활이라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부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과 부활 때는 세상의 결혼 같은 것은 없이 모두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하시므로 올무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셋째는 “제일 큰 계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 율법사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전 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큰 계명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절).
논쟁을 마무리하시기 위해 이제 예수님이 먼저 질문을 하십니다. 다윗이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는데(시 110:1) 그렇다면 메시야가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부터 아무도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물어오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23장
유대 지도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과 논쟁하자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그분이 직접 그들을 판결하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표면상 모세율법을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이되 그들의 외식적인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절). 랍비는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시며,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며, 지도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7대 화(禍)’를 선언하십니다. 첫째 화(13절)와 일곱째 화(29-32절)는 선지자들과 마지막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죄악 때문에 받을 화입니다. 둘째 화(15절)와 여섯째 화(27-28절)는 표면상으로는 열심이지만, 속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악 때문에 받을 화입니다. 셋째 화(16-22절)와 다섯째 화(25-26절)은 성경을 잘못 사용한 죄악으로 인해 받을 화입니다. 넷째 화(23-24절)는 성경의 핵심을 잘못 파악한 죄악으로 인해 받을 화입니다. 핵심인 넷째 화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문자적인 율법준수는 있었으나 율법의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통렬하게 책망하십니다( 절).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악의 한도가 차면 진노가 불가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창 4:8, 히브리성경의 처음 책)부터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대하 24:20-22, 히브리성경의 마지막 책)까지의 모든 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절). 그 결과 이스라엘의 자랑하던 도성 예루살렘도 황폐하여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예루살렘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시 118:26)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절). 완전멸망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배교했으나 남은 자들이 새로운 역사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예수님이 성전파괴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곧 세상 끝이 임할 줄 알고 종말의 징조를 묻습니다. 제자들을 세상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고, 또 바로 그때에 성전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거짓 메시아들에게 기만을 당하지 말라고 말씀(4-14절, 22-28절)하시면서 그 말씀들 사이에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징조(15-21절)를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절).
예루살렘이 멸망되더라도 바로 세상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의 지연이 있고 난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29-31절). 그렇다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이 세대란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말하며, 이것은 재림을 위한 환란의 시작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환란이 당시 세대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재림을 위한 환란의 종결기가 있을 것인데 그 세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36절). 그러면 여러 징조를 통해 재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요? 노아 당시에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물심판이 임했듯이 종말도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절).
예수님은 5가지 비유를 통해 종말준비의 태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도적의 비유”입니다. 도적이 예상치 않은 때에 오듯이 주님의 재림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계속적으로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절). 이 비유는 갑작스런 재림을 대비한 계속적인 경계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모든 소유를 맡기고 먼 곳으로 떠납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절) 먼 곳으로 떠난 주인이 오는 시간은 오래 지연이 됩니다. 그러나 언제 올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 밤중에도 주인이 올 수 있으니 장부정리를 하루 하루 해 놓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재림을 대비한 끊임없는 의무수행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25장
셋째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신랑의 도착이 지연되자 그것을 알고 지혜롭게 잘 준비한 다섯 처녀만 혼인식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절). 이 비유는 재림을 대비하여 지혜롭게 준비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의 소유를 맡아 잘 관리한 종들은 후에 상을 받게 되고, 잘 관리하지 못한 종은 쫓겨나게 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절). 이 비유는 재림을 대비하여 적극적으로 일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섯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지극히 작은 형제들을 돌본 자들은 양이 되며, 형제들을 돌보는 책임을 회피한 자들은 염소가 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절). 이것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절). 이 비유는 재림을 대비하여 형제돌봄의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
종말에 대한 말씀이 끝나고 나자 예수님은 네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때가 유월절 바로 이틀 전입니다. 한편으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의논합니다. 예수님은 수난받으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유월절 바로 전날입니다. 에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아까워 하면서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절).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은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도 결코 값비싼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들은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논의합니다. 가롯 유다는 메시아에 대한 실망과 탐욕으로 노예의 값에 해당하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절). 예수님의 가치가 이렇게 무시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샘을 솟게 할 뿐만 아니라 증오의 샘을 솟아나게도 합니다.
이제 드디어 유월절이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십니다. 우선 배반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죄사함을 주기 위해 죽으시고 흘리시는 예수님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 절).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의 죽음을 자기 백성과 수립하시는 언약승인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제공하신 희생의 열매는 영원히 지속되는 교회의 음식이며, 음료수가 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 죽으심이 가져다 준 혜택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인 희생으로 새 언약을 세울 것이지만 자만에 빠져 있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주님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슥 13:7)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절).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는 사역은 오직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절).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오래 전부터 고난을 예견해 오신 예수님이 왜 갑자기 약해지셨을까요? 그것은 죄 없는 영혼이 인류의 모든 죄를 지게 되는 고통이었습니다. 범죄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죽음과 비교하여 예수님이 너무나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절). 예수님이 사망의 고통을 당하실 즈음 제자들은 전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절).
많은 무리와 더불어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가롯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팝니다. 베드로는 민족적인 메시아 사상에 근거하여 자기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칼로 어떤 사람의 귀를 벱니다( 절). 예수님은 열 두 영(한 營은 약 6000명)이나 더 되는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임의로 부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조용히 잡히셨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절) 기도로 승리하신 예수님은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뜰까지 끌고 갑니다. 한밤중에 열린 산헤드린 공의회는 무고한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짓 증거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시 110:1, 단 7:13)고 대답하십니다( 절). 이 말로 인해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됨을 떳떳하게 선포하십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의 질문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부인하여 이르되,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 , 절). 기도에 승리하지 못한 제자들은 고난의 순간에 결국 주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우리도 기도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27장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형집행권이 있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 절). 이것을 본 가롯유다는 스스로 뉘우쳐 예수님을 판 은 30을 성전에 던져두고 나가서 목을 맵니다. 이 뉘우침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후회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스가랴 11:12-13과 예레미야 19:1-13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였던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부터 하챦은 급료를 받자 그것을 성전의 토기장이에게 던집니다. 이 예언의 성취로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챦은 돈에 팔렸으며, 그 돈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에 쓰였다는 말입니다. 그 땅이 피밭이라고 불린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황폐할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서의 성취입니다.
재판이 벌어지던 중 총독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건드리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절). 빌라도도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절). 그러나 무리는 끝까지 억지 주장을 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합니다.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는 무서운 말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절). 그들의 이 말로 인해 예루살렘이 훼파되었고, 그들의 후손들은 2,000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방황하고 학살을 당하는 고통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은 온갖 비참에 처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재판이 끝나자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들은 왕 노릇을 해 보라고 예수님을 왕 같이 꾸며줍니다.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들려주고, 무릎을 꿇고 절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조롱의 행위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절).
희롱이 끝나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갑니다. 밤새도록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이 너무 힘이 없자 군병들은 시몬이란 사람을 붙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웁니다( 절).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체가 일시적으로 편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십자가인지를 더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군병들이 죽어가는 죄인에게 마지막의 호의를 베푼다고 진통제 역할을 하였던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마시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고는 마시지 않습니다( 절). 그 쓸개즙이 너무 씁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취상태에서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모든 고통을 일일이 느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객기를 부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완전히 다 당하셔야 죄인들의 모든 고통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옷을 벗긴 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습니다( 절). 이것은 또한 다윗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시 22:18). 예수님이 조롱당하시므로 우리는 영원히 당해야 할 조롱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적인 굴욕과 불법이 자행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쓰여진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절). 이것도 조롱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강도 둘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강도의 괴수라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지나가는 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못 박힌 강도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절).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절).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니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절). 자신들에 의해서,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는 죽음임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조롱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자 약 3시간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합니다. 빛을 창조하신 분이 어둠속에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주님의 고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어두움은 또한 하나님의 외면을 말합니다.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장 쓰라린 고통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이 어두움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그래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냐 보자고 합니다( 절).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습니다( 절).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죽은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여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미래의 부활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들이 새롭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로마의 백부장과 군병들이 두려워하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절). 유대인들은 마음이 패역하였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이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 그 광경을 주의깊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후에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이들이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냅니다(사 53:9). 요셉은 비밀리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절)였기에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 장사는 예수님의 죽음이 고귀한 죽음이며, 장차 부활할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새 무덤에 장사되자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무덤을 지킵니다. 돌, 인봉, 파숫군들이 동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도 그들은 스스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생명(육체적인 생명)이 죽음(속죄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러가고 예수님이 부활하십니다. 무덤에 찾아왔던 여인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기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절). 여인들이 달려갈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천사들이 한 말을 다시 한번 더 반복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절).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목자의 지팡이를 쥐신다는 뜻입니다(마 4:12-16).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자신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라 죄의 삯인 사망을 해결하셨으며,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군사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는 커녕 군사들에게 돈을 주어 거짓말을 유포하게 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절)는 말을 퍼뜨리게 합니다. 거짓 증언은 참 증언보다 더 빠르게 퍼져갑니다. 예수님을 대적한 이 거짓은 지금도 온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지금도 이 거짓에 속고 있습니다.
열 한 제자는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고 가서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신 바로 그 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료식을 베푸십니다( 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한하신 권능(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으로 말씀하셨고, 무한한 사명(모든 족속)을 주셨으며, 무한한 친교(세상 끝날까지 항상)를 확인하셨습니다. 임마누엘(마 1:23)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임마누엘(마 28:20)을 약속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