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상속의 대사(大事) - 술작(述作)의 배경
이 어서는 1280년 7월 2일 대성인님이 59세 때, 미노부(身延)에서 사도에 있던 고(故) 아부쓰보(阿佛房)의 아내 센니치니(千日尼)에게 주신 어소식입니다. 진필은 사도의 묘선사(妙宣寺)에 현존합니다.
가. 대고중(對告衆)
센니치니는 쥰토쿠(順德) 일왕을 섬겼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여겨지는데, ‘센니치니’라는 이름의 유래가 대성인님 유배 직후 3년간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공양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대성인님은 다쓰노구치(竜ノ口) 형장에서 사도로 유배되셨습니다. 그곳에서의 2년 5개월 동안의 생활은 가혹한 자연환경, 게다가 염불자들이 목숨을 노리는 잠시도 심신이 편할 일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센니치니가 남편 아부쓰보와 함께 입신한 것은, 사도에서의 생활 중 특히 쓰가하라(塚原) 삼매당에서의 매우 힘든 상황 아래였던 1271년 11월 1일에서 다음 해 2월 사이였다고 추측됩니다.
대성인님이 처하신 유배인이라는 입장과 막부의 험악한 대응을 고려해 볼 때, 대성인님을 위해 음식 등을 전해주는 일이 발각되면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목숨마저 위험할지도 모르는 아주 엄중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센니치니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과 함께 대성인님을 지켜드린 것입니다. 감시의 눈이 매서운 낮을 피해 밤중에 음식을 비롯한 종이, 붓, 먹 등 여러 물건을 공양드렸습니다. 그 신심은 대성인님이 미노부로 들어가신 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아 남편을 세 번이나 대성인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나. 배경
본초를 쓰시기 한 해 전인 1279년 3월 21일, 순수하고 진실되며 강성한 신심을 관철했던 아부쓰보가 91세로 생을 마감하며 편안하고 엄숙하게 성불했습니다.
그해 7월 2일 아부쓰보의 유지를 받든 아들 토쿠로모리츠나(藤九郎守綱)가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머나먼 미노부에 등산하여 대성인님 곁에 납골(納骨)하였습니다.
본초에서 「그 아들 도쿠로모리츠나는 이 뒤를 이어서 오로지 법화경의 행자가 되어 거년(去年) 7월 2일 아버지의 사리를 목에 걸고 일천 리의 산해(山海)를 거쳐 고슈(甲州) 하키이(波木井) 미노부산에 올라와서 법화경의 도량(道場)에 이것을 모셨고」(신편어서 p.1478)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도쿠로모리츠나는 「금년은 또한 7월 1일 미노부산에 올라와서 자부(慈父)의 묘를 배견하니」(신편어서 p.1478)라 말씀하신 것처럼 도쿠로모리츠나는 1주기에 해당하는 그해 대성인님께 드릴 공양물을 가지고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였던 것입니다.
본초는 남편을 잃은 센니치니의 슬픔을 위로하시며 신심을 격려하심과 동시에 자식의 효심과 법통을 잇게 한 아부쓰보 부부의 신심을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또 추신에 「이미 법문은 일본국에 넓혀졌노라. 호쿠리쿠도(北陸道)는 분고(豊後) 스님이 교화해야 하는데」((신편어서 p.1478)라 말씀하셨듯 분고 스님, 단바(丹波) 스님, 아마부시(山伏) 스님 등의 절복 홍교가 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본초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사도에는 나카오키입도(中興入道), 코우입도(國府入道) 부부 등 제자 단나가 신심 수행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부쓰보를 잃은 것은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 도쿠로모리츠나가 법통상속하고 그 뒤를 이어 아부쓰보의 손자 니치만(日滿)이 ‘북국(北國)의 동량(棟梁)’이라며 닛코 상인의 기대를 받는 등 사도를 중심으로 한 호쿠리쿠 지방의 교선(敎線)이 착실히 넓혀지고 있었습니다.
본초는 아부쓰보가 보낸 갖가지 공양에 대한 감사 인사, 보탑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심심(甚深)한 법문(法門)이 기술된 어소식(御消息)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지요?
아부쓰보와 센니치니의 신심에 대하여
자세히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4월 보은어강 때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4월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