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라 》
살후 3:5
〈 에덴에는 없었던 인내 〉
달포 전 지방회 목사님들과 베트남 달랏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출발할 때 한 목사님께서 “그곳은 과일천국입니다. 실컷 먹고 옵시다!” 하셨습니다.
여행 중 하루 세끼를 다 챙겨 먹고, 현지의 싱싱한 과일을 또 마음껏 먹었습니다.
해외여행으로 들뜬 기분에, ‘배둘레햄’이 대책 없이 팽창하는 것을 깜박했습니다.
그때 늘어난 체중, 아직까지 줄이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인내입니다.
입에 달콤한 온갖 음식의 유혹을 물리치고 참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인내를 못하고 달포가 지나도록 ‘베트남 뱃살’로 고생하고 있으니 참 부끄럽습니다.
☞ 오늘 설교 주제가 ‘인내’입니다. 인내의 사전적인 뜻이 뭘까요?
[인내] 괴로움이나 어려움 따위를 참고 견딤
인내의 대상은 ‘괴로움’ ‘어려움’입니다. “괴롭고 어려워도 참아라” 이것이 인내입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는 조금 다릅니다. 다이어트는 배고픔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배도 안 고프고,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아요. 그런데 ‘땡기는’ 유혹을 못 참습니다.
유혹을 참는다. 이것도 인내의 뜻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괴로움, 어려움, 유혹을 참고 견딤” 이것이 인내의 뜻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선악과 못 먹어서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괴롭지도 않았고, 어렵거나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바라보니,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유혹에 못 이겨 덥석 깨물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그때부터 괴로움과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 에덴동산에서는 ‘인내’가 쓸모가 없었습니다.
기후가 덮거나 춥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최적이었습니다.
배고프면 지천으로 널려있는 과일을 따먹으면 되었습니다.
배부르면 아무데나 누워서 늘어지게 자면 그만이었습니다.
동물들도 서로 헤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화목했습니다.
☞ 유혹을 못이겨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괴로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 선악과 이후 인내, 삶의 기본이 되다 〉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이후부터 춥고 배고팠습니다. 동물들도 사나워졌습니다. 맹수가 되었습니다.
당장 먹고 입고 잘 것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괴롭고 어려운 일이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당장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참는 것입니다. 인내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참는 것, ‘인내’가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을 마련하기까지 배고픔을 참아야 합니다.
입을 것을 마련하기까지 춥고 더운 것을 참아야 합니다.
잠잘 곳을 마련하기까지 괴롭지만 참아야 합니다. ☞ 의식주 문제 입니다.
의식주를 해결하면 참는 것이 끝이 납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너’ 대인관계는 어떻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인내가 기본입니다.
인내 없이 원만한 대인관계는 언감생심입니다.
대인관계의 기본은 참는 것입니다. 인내입니다.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잡고, 밥벌이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인내가 바탕입니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 일, 인내입니다.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 이것도 인내입니다.
엊그제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교감 선생님 뺨을 때렸습니다.
이 학생은 문제아가 되어 이 학교 저 학교로 전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인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입고 먹고 자는 의식주를 꼽습니다.
사실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 인내는 의식주보다, 사랑보다 앞섭니다. 인내가 삶의 기본입니다.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
사람은 인내를 잘 배우고 학습하여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여야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인내가 삶의 기본이다!” 이것만 알아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손주들에게 인내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 다 가질 수는 없다. 사랑을 독차지할 수 없다. 관심을 혼자 누릴 수 없다.
“저도 인내하면서, 인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인내를 생각할 때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할렐루야~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의 인내’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마는, 우리는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벧후 3:15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오래 참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노하기를 더디 하실까요?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하심, 언제부터 시작하셨을까요?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인내, 노하기를 더디하심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성질같아서는 따 먹는 순간, “네 이 노오옴!” 단칼에 베어버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인내하십니다. 왜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그때부터 하나님의 오래참음, 노하기를 더디하심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고 떠나면, 그때부터 부모의 인내가 시작됩니다.
집 나간 자식이 되돌아올 때까지 삽작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새 기다립니다. 인내입니다.
☞ ‘부모의 인내’는 ‘하나님 인내’의 유비입니다.
〈 인내의 완결판 - 예수 그리스도 〉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얼마나 참아주십니까!
① 자식의 인내가 아무리 커도, ② 부모님의 인내만 못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인내, 그 인내가 아무리 커도 ③ 하나님의 인내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큰 고통을 참아주실까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두 가지 인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인내, 성육신(인카네이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피조물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으로 오십니다.
이는 보통의 인내가 아닙니다.
_ 요즘 한국인들 반려견을 많이 키웁니다.
_ 반려견을 너무 사랑하는 어떤 분에게, “당신이 반려견이 되어야겠습니다!” 해 보십시오!
_ “당신이 개가 되어야, 그 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 할 사람 있을까요?
_ 아무리 개를 사랑해도 스스로 개가 될 사람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사람으로 이 땅에 와야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기꺼이 사람이 되기로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인내 ‘성육신’입니다.
두 번째 인내, 십자가
피조물 인간으로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또 한 번 인내의 결단을 해야합니다.
피조물로 낮아지는 인내에서 목숨을 내놓기까지 참아야 하는 인내, 그 인내를 감내합니다.
우리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인내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고통도 끔찍했습니다.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렇게 인내하셔야만 했습니까?
피조물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사람들은 ‘인내하지 않고는 못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가 되었습니다.
☞ 하나님이 이제 사람들이 인내하도록 힘을 주셔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인내하는 힘을 주겠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인내하는 힘, 하나님이 주십니다!
〈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라 〉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본질이 ‘인내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배고픔, 헐벗음, 수치와 모욕을 참는 것을 학습해야 합니다.
_ 이 인내를 배우지 못하면, 교감 선생님 뺨을 치는 3학년 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_ 부모도 인내를 하여야 하고, 인내하면서 자식들에게 인내를 가르쳐야 합니다.
_ 이렇게 인내하면서 한 평생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들, 인간입니다.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 인내의 총본산, 인내의 종결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라”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너희가 병아리 되어 주의 날개 아래 들어가라!”
바로 이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인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인내의 열매를 얻기 원한다면 ‘주의 날개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미 닭이 추위, 비바람, 폭풍우를 막아주듯이 주님이 막아주십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하지 않는, ‘억지 인내’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와 힘만으로 참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무언가에 쫓기듯, 억눌리면서 하는 ‘억압적 인내’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이렇게 참다보면, 성격이상이 올 수 있습니다. 건강도 해치게 됩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과잉행동장애(ADHD)가 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 참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 사람은 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참아야 할 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임마누엘 인내’를 해야 합니다.
☞ 인내하는 힘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주님 인내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 인내가 우리의 속성이 되어야 〉
사람은 ‘인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내는 평생을 해도 부족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인내는 불완전합니다.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인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면 어찌 될까요?
인내가 인격(人格)이 됩니다.
인내가 인품(人品)이 됩니다.
인내가 인성(人性)이 됩니다.
인내가 인정(人情)이 됩니다.
인내가 인자(仁慈)가 됩니다.
인내가 인애(仁愛)가 됩니다.
인내가 인화(人和)가 됩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를 위한 기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인내로서 인품, 인격, 인성을 이룹니다.
우리는 인내로서 인자, 인애, 인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의 인내로, 영혼을 얻게 됩니다.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야 영혼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로 영혼을 회복한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갑니다!
인내로 우리의 인격을 이룹니다!
인내로 영혼을 얻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