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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安熙濟 (1885~1943)】 "독립자금 60% 조달, 백산 안희제’"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백산상회를 세운 '백산 안희제'
1885년 (음)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富林面) 입산리(立山里)에서 아버지 안발(安鏺)과 어머니 고성 이씨 사이에서 3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태약(泰若), 호(號)는 백산(白山)이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족형 안익제(安益濟)에게 한학을 수학했는데 소년시절 한시 작품이 뛰어나 『남유록(南遊錄)』에 32수가 「백산시초(白山詩抄)」로 묶어 실려 있다.
1904년 상경하여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 수학 후 1905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과(經濟科)에 입학하였는데 다음해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經濟科)로 전학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보성전문학교 설립자 이용익(李容翊)이 러시아로 망명하자 재정난을 겪게 되고 교장 이종호(李鐘浩)에 대한 배척운동에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보성·양정 학우들을 중심으로 청년지사들과 교류하면서 고향인 의령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양정의숙 재학 중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하였고, 1908년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의령군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 1908년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창남학교는 문중 재산으로 설립하였는데 설립 당시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족형(族兄)인 안효제(安孝濟)의 도움이 컸다. 또한 1907년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동래 구포에 현재 부산구포국민학교의 전신인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고 1909년 교장에 취임하여 2년간 직접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구명학교는 1907년 (음)9월 9일 개교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구명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은 장우석·오치현(吳致賢)·박용주(朴龍州)·서기표(徐琪杓) 등이 대부분을 조달하였다.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단원으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尹顯振)은 구명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1909년 10월경 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남형우(南亨祐)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다. 대동청년단은 비밀결사로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되었다. 대동청년단은 초대 단장 남형우, 서상일·김동삼·신채호(申采浩)·윤세복(尹世復)·신팔균(申八均)·이극로(李克魯) 등으로 주로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부단장과 2대 단장을 맡았다.
1910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병찬(崔秉瓚)과 함께 『독립순보(獨立旬報)』를 간행하였다. 또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고,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방문하고 1914년 9월 국내로 돌아왔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국내의 비밀연락망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고향의 답(畓) 2,000두락을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고 이유석(李有石)·추한식(秋翰植) 등과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상회의 명칭은 호(號) 백산(白山)에서 땄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에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였다. 1918년 최준(崔俊)·윤현태(尹顯泰)·최완(崔浣)·김용조(金容祚)·정순모(鄭舜模)·성태영(成泰永)·이정화(李楨和)·유덕섭(柳德燮)·안담(安湛)·허걸(許杰) 등 10명과 함께 자본금 14만원으로 모금하여 합자회사로 전환하여 3만 5천원을 불입·경영하였다. 합자회사 백산상회는 중역으로 본사대표 윤현태, 최준과 함께 무한책임사원을 맡았고, 영업 내용은 해산물(海産物)과 육산물(陸産物) 구매와 위탁 판매를 하고 회사는 부산부 본정 삼정목(釜山府 本町 三丁目, 현 부산시 중구 동광동 3가 10-2번지)에 위치하였다.
합자회사 백산상회를 확대 개편하여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1919년 1월 14일 설립인가를 받아 2월 17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최준·윤현태와 함께 발기인이 되었고, 자본금은 100만원이었다. 같은 해 5월 28일 백산무역주식회사 제1회 주주총회를 개최하였다. 항일적인 성향을 지닌 영남지역 자산가들이 대다수 주주로 참여한 1회 주주총회에서 윤현태·최준·조동옥(趙東玉)·정재원(鄭載源)·이종화(李鐘和)·윤병호·허걸·이우석(李愚奭)와 함께 취체역으로 선출되었다. 한 달 후 6월 9일 개최된 중역회의에서 사장에 최준, 전무취체역 윤현태, 조동옥·정재원·이종화·윤병호·허걸·이우석 등과 함께 취체역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임원 개선시 사장에 최준, 전무취체역에 최태욱(崔泰旭) 등이 선출되었다. 당시 2,560주를 소유한 최대 주주였으나 최준을 사장으로 내세운 것은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보다는 국내외의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담당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데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창립 후 국내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와 국외에는 중국 등 3개소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중 대구연락사무소는 태궁상점(太弓商店)을 경영하는 서상일(徐相日)이 맡았고 서울 연락사무소는 미곡상 이수영(李遂榮)이, 그리고 봉천연락사무소 해천양행(海天洋行)을 경영하는 이해천(李海天)이 담당하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지점과 연락사무소의 설치는 영업 활동지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과 독립운동자금 전달을 담당하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결손을 거듭하였는데 이는 경영 부실보다는 독립운동자금을 회사의 수지와는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자금의 전달 방식은 항상 장부상 거래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하여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였는데 백산상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의 국내 보급 통로였고 국내 독립운동기지였다. 이처럼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영남의 대지주 자본의 적극적인 참여로 부산 최대 규모의 회사로 일본인 회사를 능가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민족기업으로 발전해 가자, 일제는 회사 경영에 일본인을 침투시켜 탄압을 가함에 따라 1928년 1월 29일 해산되었다.
한편, 1919년 11월 백산상회 관계자들과 함께 부산 및 인근(隣近)의 군(郡)유지들의 발기로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국내와 국외에 유학시킬 목적으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였다. 기미육영회는 매년 10명씩 유학생을 선발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제1차 유학생을 선발하였는데 김정설(金鼎卨)·이병호(李炳虎)·이제만(李濟晩)·전진한(錢鎭漢)·문시환(文時煥) 등 5명이었다. 또한 기미육영회는 경남 각지 유지들의 후원으로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과 구미 각국에 파견하고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였는데 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신성모(申性模) 등은 기미육영회에서 파견한 유학생이었다. 기미육영회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 각지 유지 40여 명으로 조직되어 회원부담금으로 유학생을 선발하여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 78명 중 1인으로 백산무역주식회사 중역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동아일보 창간 당시부터 1921년 6월까지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역임하였다. 1926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국외독립운동 기지개척을 위해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6년 11월 15일 이우식 등 여러 유지들과 함께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개칭하여 경영하였다. 중외일보는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압수처분을 받았으며 1928년에는 「세계일주기행 (世界一周紀行) 조선(朝鮮)에서 조선(朝鮮)으로」가 문제가 되어 발행인 겸 편집인 이상협(李相協)과 기행문 필자 이정섭(李晶燮)이 기소되는 필화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6일자 사설 「직업화(職業化)와 추화(醜化)」로 인하여 두 번째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중외일보는 총독부로부터 무기 정간을 받았다. 1929년 9월 1일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33년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였다. 가산을 정리하여 1931년부터 김태원(金台原)과 함께 동경성에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는 목단강 상류의 일부를 석축으로 강을 막아 농지에 수로(水路)를 대어 광활한 땅을 개간하였다.
발해농장에는 주로 남한지역 이주 한국인 3백여 호를 정착시키고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고안하여 시행하였다. 자작농창제란 이주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 절반을 수곡(收穀)하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지 개간과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고, 5년 후에는 또 다른 지역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게 하였다. 아울러 농민에게 토지는 무상으로 분배하여 자작농을 육성하는 제도였다.
이와 함께 이주 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동경성 중앙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발해보통학교는 이후 조선인민회로 넘어가 동경성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하는 농장이었으나 실은 국외독립운동기지였다.
1934년 대종교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과 아들 윤필한(尹弼漢) 등 대종교 간부들을 대동청년단에 가입시켰다. 윤세복은 1934년 1월 하얼빈으로 가서 대종교재만주시교권인허신청을 만주에 주재한 일제의 전위 기관인 관동군특무기관·하얼빈총영사·조선총독부특파원에서 교섭하여 대종교 포교활동에 대한 양해를 받아 하얼빈시(市)에 대종교선도회를 설치하고 대종교총본사 현판을 달았다.
1934년 3월 15일 대종교 영계(靈戒)에 기수(祇受)하고, 1935년 1월 15일 대종교 참교(參敎)로 선출되었다. 1936년 6월 23일에는 대종교 지교(知敎)와 경의원부원장(經議院副院長), 1941년에는 대종교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게 되고 대종교서적간행회(大倧敎書籍刊行會) 회장(會長)으로 특임되었다. 서적간행회 회장 당시 출판된 서적은 『홍범규제(弘範規制)』·『삼일신고(三一神誥)』 등 8종으로 발행부수는 3만 5천부 정도였고, 매년 4회에 걸쳐 대종교 『교보(敎報)』도 간행하였다. 1942년 3월 대종교총본사에서는 발해고궁지에 천진전(天眞殿) 건축을 추진하였는데 같은 해 4월 신병치료를 위해 귀향하였다.
1942년 10월 천진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3일 개천절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많은 교우들이 모여 개천절 경축식을 거행한 후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천진전건축준비사무를 협의하였는데 대종교의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어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국내외의 대종교 간부들을 체포하고 탄압하였다. 당시 21명의 대종교 간부가 체포되었으며 그 중 10명이 사망하였다.
1942년 11월 19일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 형사대 3명에게 붙잡혀 목단강으로 호송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족제 안영제(安永濟)가 경영하는 영제의원(永濟醫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부산부 본정(현 부산 동광동 3가)에 위치했던 백산상회 본점 [판형3] |
1919년 조직된 기미육영회 관련 일제 측 보고(1920. 5. 4) [판형3] |
『중외일보』 사설 ‘작업화와 추화’(『중외일보』 1928. 12. 6) [판형3] |
헤이룽장성 닝안시의 발해농장 사무실 모습 [판형3] |
발해농장 수문 개통식(앞줄 가운데가 안희제)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