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은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서 복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02m이다. 청계산 북쪽에 약수봉 남쪽에
남산재를 넘어 향노봉이 있다. 중생대 쥐라기에 암석을 뚫고 들어간 흑운모 화강암이 분포한다. 화강암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암괴들이 드문드문 노출되어 있지만 대체로 산지는 토양이 고루 덮여 있고 소나무보다는 낙엽수가 무성한 식생을 형성하고 있다.
그에 따라 산지 비탈면은 다소 급하지만 평평하고 넓은 직선 비탈면을 이루며 주변 곡지로 이어지고 있다.
산 남쪽 기슭의 청룡사지에는 석조물 등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청룡 골짜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부근에 599번 도로가 지나며, 소태면 소재지로부터 청룡사지까지 접근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산행일ː2023년 03월 08일(수)
▶산행지ː 청계산(401.5m) 향로봉(335.7m) 약수봉(269.5m) 응봉산(300m) 노루봉(326.1m) 매봉1(327.2m) 매봉2(332.5m) 황로봉(99m)
▶코 스ː 복탄2구회관-향로봉-남산재-청룡사지-청계산-약수봉-인다고개-응봉산-노루봉-매봉-황로봉-복탄2구회관
▶난이도ː B+
▶누구랑ː부산한마음산악회
▶시 간ː11:53 ∼ 16:18(휴식포함 04ː24분)
▶거 리ː약 10.00㎞
▶날 씨ː맑음 구름(조금)
☞복탄2구마을회관(원점회귀)ː충북 충주시 소태면 복탄1길 47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탑으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청룡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고,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석탑
국보 제197호 이 모탑은 고려 말의 고승인 보각국사의 묘탑이다. 묘탑은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부도라고 부르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까지는 전형적 형태인 8각원당형이 주류를 이루며 이후로는 종모양이 많이 만들어졌다. 외형적 특징은 몸돌과 기단부 중간들을 부풀려 놓은 모습이고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특이하게 용머리와 봉황이 수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8각의 몸돌에는 사천왕을 새긴 것으로 보이며, 각 모서리 기둥은 엔터시스(기둥 중간의 불룩나온 부분)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면에는 반룡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과 정교함이극치를 이루고 있다.
지대석과 몸돌 윗면에는 사공이 있어 보각국사의 사리 및 옥촛대, 금송아지, 금잔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반적 형태 및 세부조각 등에서 고려말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보기 힘든 것.♣
해가 지는 것을 보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해가 지는 쪽으로 가야 해. 가끔 폭풍, 안개, 눈이 너를 괴롭힐 거야.
그럴 때마다 너보다 먼저 그 길을 갔던 사람들을 생각해 봐. 그리고
이렇게 말해봐.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비밀 하나를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마음으로 봐야 더 잘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