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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
―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이운경
oksan97@hanmail.net
1. 자연에서 길어 올린 서정의 아리아
자연은 수필에서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이다. 자아를 자연이라는 대상에 의탁하거나 투사하는 전통적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은 ‘나’를 투사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경전(經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은 서정의 원천(源泉)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촉촉한 수액은 수필이라는 텃밭에 끊임없이 서정의 비를 내리게 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욕망의 필터를 거쳐 반복 인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노을을 읽다>), 고향의 상징과 성장기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호출되기도 한다(<맛있는 술잔>). 작품의 서두에 시그널 음악처럼 자연이 등장하거나, 어떤 사건의 배경으로 자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김만년 수필에서 자연은 소재주의의 범주를 뛰어넘은 문학적 이념으로써 독자적 위치를 점유한다.
수필이 자연을 선호하는 이유는 자연이라는 타자에 자아를 의탁하거나 반영하는 중세적 자연관이 피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자아의 품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자기 동일성을 보완하거나, 자연을 매트릭스(matrix)로 설정한 후 소비하기도 한다. 특히 수필에서 자연이 작품의 질료로써 소비되는 현상은 ‘기억의 재현과 해석’이라는 수필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측면으로는 자연이 수필의 서정성을 확보하는 유력한 자원인 까닭이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다양한 색깔과 무늬로 가족사의 상흔과 세상살이의 그림자를 조명한다. 나아가 어머니의 부재와 고향 상실로 인한 ‘그리움’의 상처를 위무하고 치유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 주목할 지점은 감각적 발화와 감응의 대상으로 자연을 호명한다는 점이다. 가령 <채마밭 소묘>는 채마밭의 사계를 시종일관 감각적 언술과 묘사로 장식한다. 화자가 정성을 들여 가꾸는 채마밭의 사계가 발라드 음악처럼 이어진다.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배열에서 파생한 은유적 표현, 화사하고 경쾌한 이미지의 나열은 ‘화조도(花鳥圖) 화첩’을 보는 듯하다. 감각적 달변이다. 이런 수필에는 철학적 진실이나 삶의 진정성에 대한 욕망이 얇다. 대신 언어와 감각이라는 다른 층위의 장으로 수필을 끌고 간다. 문장이 뿜어내는 매혹적인 향기가 가득한 이 작품은 감각적 층위로 체위를 전환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구체제를 뒤흔드는 이런 시도는 수필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 다른 작품 <민들레농장 열애기>는 수필의 문법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화자가 정성들여 가꾸는 ‘민들레농장’이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호명하여 자기고백과 성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이 작품에서 자연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 생명을 가꾸는 여백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흙을 만지면서 절망과 상처를 극복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주목할 지점은 전작과 달리 자연을 상상이나 관념의 층위에 두고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의 고단함과 상처를 묻어두는 화사한 인공정원도 아니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숭배의 대상이거나 초월적 대상도 아니다. 일상적 자아와 가깝고 친근한 그런 공간이다. “흙에 순종하고 흙에 위로받으며 흙의 말에 귀 기울이”며 상처를 치유하고 생의 순리(順理)를 깨친다. 요컨대 흙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자아를 성숙시키는 학교이자 위안의 성소(聖所)인 셈이다.
김만년의 수필에서 자연은 서정을 길어 올리는 ‘약샘’과도 같다. ‘그리움’으로 표상되는 김만년 문학의 발원지는 어머니와 자연이다.
<노을을 읽다>는 감각의 집적(集積)과 언어의 마술로 작가의 문학적 이념을 감각적 현현(顯現)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짙은 서정의 향훈은 안개 자욱한 강가에 흐르는 샹송처럼 몽환적이다. 노을이 주는 다채로운 이미지와 동화적 상상을 결합하여 진공상태의 언어미학을 구현한다. 시종일관 일정한 톤의 목소리와 몽환적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역량이 돋보인다. 비유컨대 미성의 소프라노가 부르는 한 편의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은 듯하다. 문장마다 서정의 누수가 흘러넘치고, 가을날 노을처럼 여운이 짙고 길다. 상상과 환영(幻影), 기억이 뒤섞이면서 발산하는 카오스적 매력이 분출하는 작품이다.
농경시대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인 작가의 정서는 고향의 자연에서 뛰어놀며 체화(體化)된다. 이런 농경문화에서 발원한 정서는 문학의 장에서 서정으로 형질변경을 한다. 김만년의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수필의 서정을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킨 점이다. 언어를 다루고 직조하는 세련된 감각의 멋이 있다. 자연에서 서정을 포착하는 예리한 감각과 체화한 정서에서 발원하는 서정은 작가의 문학적 자산이다. 무엇보다 서정을 그리는 붓질이 탄탄하다. 그러나 자연을 서정의 순혈주의에 가두는 것도 경계해야 할 요소이다. “서정이란 어떤 근원을 되돌아보는 행위이고 존재의 ‘진정성’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노력이며 상실된 코스모스를 회복하려는 실천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70쪽).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서정은 자아의 본향인 고향과 자연을 사유하면서, 대가족의 따뜻함과 자연에 순응하였던 공동체의 질서 회복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문제는 ‘새로운 서정과 수필의 진정성’이다. 작가가 내장한 다양한 층위의 감각과 폭넓은 음역대로 자기만의 서정을 구축하기를 바란다.
2. 지방분권 체제가 불러온 효과들
모든 문학은 제 나름의 통치론과 체제론을 지닌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주체’라는 일인칭 체제 아래 ‘주제’라는 고지를 향해 일렬로 행진한다. 작품을 구성하는 화소들은 주체의 지휘 아래 움직인다. 말하자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이다. 질서정연한 선형적 구성은 모든 화소들이 주체의 지배 아래 복종하게 한다. 이런 체제를 기하학적으로 도식화하면 평면도이다. 맨 위에 주체가 있고, 그 아래로 화소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나란히 줄을 선다.
평면성은 수필의 한계이자 열등감이었다. 소설이 건축물의 투시도라면, 수필은 평면도이다. 주체와 체험이라는 두 지점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수필의 평면성은 계몽주의와도 연관이 깊다. 주체의 발화는 긍정적으로 본다면 지혜의 말씀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나를 따르라.’는 강요의 전언이다. 계몽적 목소리의 퇴조는 ‘주체와 권위’의 위기를 반영하는 시대의 증상이었다. 평면형의 그릇에 분출하는 인간의 영혼을 담을 수 없다는 변혁의 몸부림은 체제를 전복하기에 이른다. 주체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한 평면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주체의 권위를 양보한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수필에서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문학도 시대와 함께 흐르고, 인간과 함께 진화하니까.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지면이 무한정 제공되었고, 계몽주의의 쇠락이라는 시대의 흐름은 수필의 진화를 촉진한 외적 요인이다. 수필을 둘러싼 이런 외적 조건의 변화와 수필 자체의 진화 욕망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지도 위에다 평면도만 그릴 수 없다는 갑갑함이 주체와 계몽주의의 퇴장을 앞당긴다. 일인 통치의 욕망과 선형적 의미 생산체제를 내려놓은 자리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화소들이 들어온다. 김만년의 수필은 이런 체제 변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실천한다.
표제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살펴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독창적 구성이 가져온 효능을 체감할 수 있다. 기관차를 몰고 다니던 철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철길의 외형으로 넘어간다. 그런 다음 굽은 길을 지향하는 철길, 철길에서 피어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기까지는 철길의 외형과 의미, 이용객에 관한 부분이다. 다음 부분에서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가요 편곡에서 한 음 높이는 전조(轉調)전략이다. 철길의 궤간 1.435미터를 두고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성에 대한 해석에 들어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사람과의 거리, 부부 사이의 원심과 구심의 긴장 관계를 넘어선 존중과 배려의 거리 등이 등장한다. 전반부가 철길의 표면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면, 후반부는 철학적 주제와 심층적 의미를 펼친다. 뒤로 갈수록 주제를 향한 결집력과 호소력이 힘을 발휘한다. 치밀한 전략적 고민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작품 <감자 먹기 좋은 날>도 보면 감자라는 화소가 지닌 수많은 줄기들을 가져온다. 비 내리는 날 감자 삶는 냄새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던 농경시대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감자의 다양한 효능과 감자에 대한 추억, 주말농장에 피는 감자꽃의 아름다움, 감자 맛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밖에도 권태응의 동요 ‘감자꽃’과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화자의 유년기 체험담 등을 양념처럼 동원한다. ‘감자’라는 작은 화소 하나를 가지고 ‘감자열전’을 펼친다. 주체는 작품의 지휘권을 내려놓고 감자를 주인공으로 앉힌다. 하늘의 새처럼 ‘감자’라는 대상을 조망하고 자리 배치를 할 뿐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체는 화자가 아니라 감자이다.
김만년의 작품 대다수가 주제를 향해 한 우물을 파기보다 다면적 구성을 선호한다. 가축의 먹이를 찾아 몽골 초원을 이동하는 유목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주체는 뒤로 물러나거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화소들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전략이다. 주목할 지점은 다양한 화소들을 가져오지만, ‘주제’라는 광장을 향해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화소들이 지닌 부피와 무게를 가늠하여 적절하게 배치하고, 화소들이 옆길로 새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단속하고 세심하게 살핀다.
김만년의 수필은 중앙집권 체제를 종식하고 지방분권 체제를 도입하여 성공한다. 주체 중심의 자명한 일인칭의 세계를 뛰어넘어 유기적인 전체성을 추구한다.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도 바뀐다. 주체가 직접 발화하지 않고 객체인 화소들에게 발언권을 넘긴다. 발화자의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각각의 화소들이 자유로이 어우러지면서 주제라는 큰 바다에 다다르는 자율성이 부여된다. 이런 곳에는 미증유의 풍경과 낯선 기운이 생성된다. 다양한 화소들이 접속하고 부딪치면서 발산하는 생경한 감성과 의미는 예상치 못한 상상의 열락(悅樂)을 제공한다. 화소들의 의도적인 잡종교배는 수필의 입체성을 구현할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빛나는 문체 앞에서
김만년은 언어를 부리고 문장을 직조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추상적 묘사와 서정적 진술로 이어지는 문장이 정교하게 계획된 배치의 기술처럼 보인다. 문장을 팽팽하게 조이다가도 놓아버리고, 느슨하게 풀어놓았다가 강렬하게 당기는 품새가 노련하다. 특정한 구절에 자주 눈길이 멈추고, 그 문장이 상징하는 장면을 응시한다. 밑줄을 긋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부시다. 감각이 승하면 내용이 빈약하고, 내용이 무거우면 감각이 무디다. 그의 문장들은 섬세하고 유연하지만, 은근하고 진중한 맛도 있다. 무엇보다 김만년의 문체는 감각적이나 주제를 향한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한 작가의 정체성은 문체로 드러난다. 문체는 한 작가가 살아온 이력과 타고난 기질, 문학의 계보 등을 총체적으로 증명하는 어떤 것이다. 김만년의 문체는 노련하고 정교한 세공사의 손길을 거친 보석처럼 반짝인다. 블루의 사파이어처럼 서늘한 빛깔을 내뿜는가 하면, 보라의 자수정처럼 깊은 음영(陰影)을 발산하기도 한다. 무형의 돌덩이를 섬세한 손길로 가공하는 중세의 장인처럼 그의 손길을 거친 문장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특히 자연의 풍경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은유와 상징, 비유 같은 수사학을 동원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대상의 움직임이나 빛깔,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한다. 그 솜씨가 가히 수준급이다.
김만년의 살아온 내력을 보면 맏이와 가장의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만만치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의 문체는 음울하거나 무겁지 않다. 예민한 감각을 지녔으나 밝고 건강하다. 그렇다고 인생의 얼룩이나 가족사의 그늘을 화려한 문체로 포장하거나 감추려하지도 않는다. 비유컨대 ‘솔’음 정도의 높이와 ‘장조’의 음률이 생의 무거움을 덜어준다. 그가 애착하는 텃밭의 채소들처럼 풋풋하고 상쾌한 문체가 있는가 하면(<채마밭 소묘>), 중후하고 묵직한 문체도 볼 수 있다(<월정리역 비가>). 대상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마치 노련한 트로트 가수처럼.
“해가 포물선으로 활강할 때 바다는 순식간에 냄비 물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노을에 덴 고기들이 허공으로 불방망이질을 친다. 마치 수평금반 위에서 은빛 무희들이 왈츠를 추는 듯 비상하는 선율이 역동적이다.”(<노을을 읽다>). 장려하게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묘사한 이런 문장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매혹적인 감성을 품고 있다. 대상과 언어가 겉돌지 않고 둘이 자연스럽게 몸을 섞는다. 어떤 경우든 파열음을 내지 않는다. 마치 노을 속에서 언어가 스스로 걸어 나와 말을 하듯 원초적 상징성을 발휘한다. 풍성한 어휘력, 언어를 배치하는 솜씨, 대상의 특질을 잡아내고 언어화하는 감각 등은 독보적이다. 김만년이 조각한 빛나는 문체들은 수필의 문학성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밖에도 김만년의 수필이 가진 장점과 미덕은 많다. <철의 향기>, <지하철 타는 아이> 등에서는 건강한 노동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들에 대한 연민 등이 내장되어 있다. 현대수필의 맹점으로 지적받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함의한 작품도 있다.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어머니의 깊은 상흔을 그린 <한 장의 사진>에는 전쟁과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비극적 가족사를 담아낸다. <즐거운 조문>, <월정리역 비가>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 상상을 도입하여 수필의 그릇을 확장한다. <개나리꽃 단상>, <오래된 집> 등에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이십 년 만에 묶은 수필집이라서 그런지 형형색색의 조각천을 이어 만든 퀼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이제 김만년의 수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첫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문체에 대한 숭고한 이념으로 가득 차 있다. 철학의 논리보다 감각의 논리가 그의 수필관을 지배한 듯싶다. 서정성 넘치는 문체는 감각의 쾌락을 선사하지만, 한 생이 품고 있는 깊이를 채굴하긴 어렵다. ‘그리움’으로 표상되는 서정적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도전을 요청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감각적인 문체가 김만년의 유력한 자산이라면, 앞으로 그의 수필은 무한대로 진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시점이다. 감각과 철학의 결합을 하려면 격렬한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대지적 삶의 원리를 채굴하는 철학적 깊이를 가진 작품을 기대한다. 그 모색이 힘들겠지만,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 문학을 견인하는 든든한 수레가 될 것이다. 모든 문학은 선 채로 잠을 자야 하는 운명이니까.
이운경 《현대수필》(2010) 신인상, 《수필미학》(2015) 비평 신인상. 수필집 《그림자 놀이》 외, 비평집 《수필의 진화와 그 스타일》 외. 현재 《수필미학》 편집장.
[대표작 2편]
김만년 연보
1961년 경북 예천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남. 봉화에서 성장.
1979년 영주공고 기계과 졸업.
1986년 철도청 부기관사 입사.
1988년 2월 12일 母 사망. 2월 12일 위순희와 상중(喪中) 결혼.
‘88 노동자 대투쟁’ 때 <지옥의 전선>, <구속결단선언문> 같은 현장 시, 투쟁격문을 씀. 이후 6년을 노동활동에 몰입.
1989, 1991년 두 아들(예일, 문일) 태어남.
2000년 주말농장(소작) 시작. 흙을 만지면서 삶을 돌아보게 됨. 생의 변곡점이 됨.
2001년 방송대 국문과 졸업.
2003년 제6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 부문 국무총리상.
수필 <상사화는 피고 지고>를 《월간문학》에 발표.
2004년 제25회 근로자문화예술제 시 부문 대통령상.
제7회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행자부장관상.
시 <겨울, 수색역에서>를 《월간문학》에 발표.
첫 작품(시와 수필)이 등단작이 되면서 다시 습작기로 돌아감.
2006년 코레일 홍보실로 전직. 일간지에 철도 관련 칼럼을 씀.
<낭독의 발견>(KBS), <현대시 100주년 시인 만세>(KBS) 등에 출연. 수필 <상사화는 피고 지고>가 재연 드라마(MBC)로 방송됨.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노동현장(기관사)으로 복귀.
2007년 父 사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문예창작) 졸업.
2011년 경북문화체험 대구일보수필대전 금상, 국가인권작품공모전 우수상 수상.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수필 <노을을 읽다> 당선.
독도문예대전 산문부 최우수상, 《에세이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2017년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
2018년 《에세이문학》 수필 <하회에 젖다>로 재등단.
2018년 김포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
2020, 2021, 2022, 2023년 《The 수필》 ‘빛나는 수필가 60’ 선정.
2021, 2022년 《좋은 수필》 ‘베스트 10’ 선정.
2021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
2021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작가 선정.
2022년 12월 코레일 퇴직. 민들레농장(자경) 시작.
2022년 첫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 출간.
《에세이문학》 편집위원 역임.
2023년 제41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시 분과 회원,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수상 소감]
뿌리의 힘
김만년
sanha3000@hanmail.net
밤새 눈이 퍼부었다. 강아지를 앞세우고 밭으로 갔다. 새들이 밭둑에 앉아 낟알을 쪼고 있다. 눈밭 위로 은빛 햇살이 산란한다. <만종>처럼 경건하다. 마늘밭이 늦잠에 빠져 있다. 막대기로 눈을 살짝 밀치고 비닐을 들추어보았다. 손톱만 한 마늘 촉들이 동안거를 하고 있다. 눈 거적을 덮고 묵언정진 중이다. 봄 햇살이 궁금했던지 몇 놈은 성급하게 파란 촉을 밀어 올린다. 일필휘지, 봄이 오면 맨 먼저 푸른 문장들을 허공으로 휘갈길 기세다.
저 펜촉을 밀어 올리는 힘은 뿌리에 있다. 뿌리가 튼실해야 잎이 번성해진다. 잎의 광합성을 먹고 뿌리(마늘)는 자란다. 뿌리는 바닥과 동거하고 잎은 허공을 지향한다. 바닥은 토양이고 허공은 햇살이다. 얼핏 음양이 상생하는 것 같지만 실은 뿌리의 공덕이 크다. 모든 식물이 그렇듯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고 수액을 힘껏 밀어 올릴 때 잎은 빛난다. 절실할 때 꽃은 핀다.
수필도 이와 유사하다. 잎이 문장이고 문체라면 뿌리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이다. 안목, 통찰, 직관 같은 것들이다. 문장은 인식이라는 자양분을 먹었을 때 빛난다. 분내를 풍기지 않는다. 인식은 삶에서 나온다. 그래서 좋은 수필은 좋은 삶에서 온다고 했다. 수필이 태생적으로 자기 삶을 표절해야 하는 장르이기에 더욱 그렇다. 기쁨, 좌절, 사랑, 가족, 이별, 직업, 독서, 자연 등의 표층들이 융합된 것이 삶이다. 그러한 삶의 총합들이 언어의 씨앗들로 결집되고 발아되는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된다. 이 총합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누구나 겪는 일을 주체적인 인식의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문학은 낮고 젖은 곳으로 흐른다. 낮고 젖은 곳은 바닥 쪽이다. 그래서 삶이 바닥으로 기울수록, 경험의 진폭이 클수록, 절실할수록 뿌리는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뿌리가 깊어지면 대상을 보는 안목도 깊어진다. 비로소 ‘왜 쓰는가?’라는 궁극의 질문에 닿을 수 있다.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소재론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문체나 문장론이 덧없어진다. 기초체력이 중요하다. 모든 문학의 에너지는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뿌리는 나를 키우고 안목을 키운다. 소재를 통찰케 하고 문장의 잎을 틔운다. 꼬인 문맥들을 통합시키고 분산된 화소들을 하나의 주제에 수렴시킨다. 그러나 뿌리는 실체가 없다. 아우라로 문맥을 관류할 뿐, 미세한 언표들로 글의 행간에 잠복해 있다. 들숨 날숨으로 자모 속에 묻어 있다. 때로는 문체가 되고 문체 뒤에 숨기도 한다. 속도나 리듬, 또는 모호한 기표들이 끊임없이 문장을 밀고 당긴다. 보이지 않는 뿌리의 힘이다.
다시 마늘 촉을 본다. 마른 잎들은 뿌리가 부실하다는 신호이다. 뿌리가 말랐을 때 마늘은 생명력을 잃는다. 수필도 그렇다. 문장으로만 넘나드는 글은 향기가 없다. 인출된 복사지처럼 개성이 없다. 자모들을 혹사시킨다. 뿌리에서 밀어 올리는 글은 향기가 짙다. 주머니에 감추어 둔 향낭(香囊)처럼 잔향이 오래 간다.
나는 어떤가. 나의 뿌리는 건재한가. 누항(陋巷)을 떠도는 부표처럼 시류를 기웃거리지는 않았는지. 글 단장에 치중하거나 너무 오래 닦아 관념으로 흐르지는 않았는지. 작위적이거나 풋것 함부로 내놓지는 않았는지. 나의 글이 자폐적인 ‘나’를 떠나 세상의 공로(公路)로 흘러가고는 있는지.
뜬금없는 마늘 이야기가 수상소감이 되었다. 허락된 지면이기에 자유롭게 썼다. 나를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 삼았다. 얼마 전 첫 작품집을 출간했다. 텍스트가 죽은 시대라고 하는데 나도 거기 죽은 책 한 권 보탠 것은 아닌지. ‘시집은 시인만 읽고 수필집은 수필가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뼈아픈 말이다. 도공은 달항아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흔아홉 개의 달을 깬다고 했다. 아작(亞作)을 허용치 않는 도공의 장인정신을 다시 새긴다.
부족한 작품집을 선(選)해주신 심사위원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에세이문학》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현대수필문학상’이란 명패를 오래 보듬어야겠다. 다시 봄이다. 봄, 봄이 오고 있다.
사랑의 거리 1.435미터
(외 1편)
김만년
sanha3000@hanmail.net
철길은 차가운 대지에 붙박인 채 육중한 기관차를 떠받치고 있다. 두 가닥 은빛 선을 잇대어 세상 어디든지 간다. 상처 같은 세월을 나란히 베고 누워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사람 사는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정거장마다 숱한 물상과 인정(人情)들을 집결시키고 분산시킨다. 한순간 용융점으로 끓어올랐던 기억 때문일까. 겉보기엔 딱딱한 쇠붙이지만 속은 따뜻하다. 그래서 철길을 두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혈맥이라고 불러왔다. 기관차가 한때 우리 민족의 여명기를 견인했던 심장이었다면 철길은 그 심장을 뛰게 한 핏줄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철길의 외형은 단순하다. 그냥 강철로 이어진 두 줄기 철선이다. 그러나 저 단순성이 기차를 무탈하게 안착시키는 힘의 근원이다. 철길은 직각으로 꺾이거나 돌아가는 법이 없다. 샛길로 빠지거나 허황된 꿈을 좇아 탈선을 꿈꾸지도 않는다. 애오라지 한자리를 유지하며 직곡(直曲)의 단순성만 반복한다. 일생 외길만 고집하시던 아버지의 괭이질처럼 달 뜨면 달바라기를 하고 해 뜨면 해바라기를 한다. 행여 사나운 바퀴의 횡력(橫力)에 밀릴까 제 몸을 침목 위에 단단히 결박시킨다. 철커덕철커덕, 제 살을 깎아 기차를 떠받치고 세상을 공명시킨다. 시류에 개의치 않는 뚝심이고 철심(鐵心)이다. 보시라면 이만한 보시가 또 있을까. 묵묵하고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철길은 굽은 길을 지향한다. 기차가 강줄기를 따라 느리게 돌아갈 때면 철길도 굽은 허리춤을 들썩이며 장단을 맞춘다.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어 달캉거리는 절음(絶音)을 반주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산과 마을이 뻐끔담배처럼 흘러가던 시절이었다. 아마 철길에 마음이 있다면 열두 굽이 강줄기를 따라 아라리가락처럼 흘러가던 그때가 호시절이었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모든 길이 직선으로 펴지면서 흥얼거리던 콧노래도 차창을 스치는 고즈넉한 풍경도 사라졌다. 저 철길도 머잖아 굽은 허리를 펴고 직선의 시간에 들 것이다. 기차가 휘모리장단으로 질주할 때 심장은 두근거리고 기억은 어질하다. 누군가 속도는 망각에 비례한다고 했다. 속도가 욕망으로 등치되는 곧은길이라면 굽은 길은 욕망의 뒤쪽에 있고 과거로 가는 길목에 있다. 과거는 종종 그리움으로 환원된다. 욕망과 그리움이란 중량을 저울에 달았을 때 그리움 쪽으로 기우는 것도 굽은 길 위에서다.
그래서일까. 철길에는 회귀성 짙은 촉매들이 묻어 있다. 나란히 이어진 침목들이 먼 과거로 가는 기억의 사다리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물가물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철길을 바라보노라면 철길 끝에서 깨꽃 같은 이야기들이 피어오른다. 산딸나무 같은 소녀들이 지나가고 능금 같은 웃음들이 흘러간다. ‘후후’ 우동 국물을 불어먹는 소리, 플랫폼을 뛰는 발자국 소리, 왁자한 입영 군가 소리가 들린다. 철둑 너머로 뭉게구름과 염소의 말뚝과 아버지의 지게가 흘러간다. 늙은 오동나무가 서 있고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오래된 마을이 보인다. 손 흔들며 미지의 세계로 출항하던 옛 소년의 불안한 발걸음도 보인다. 한때 내 삶의 발원지이자 그리움의 기항지이기도 했던 그 먼 고향집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갈 수 있는 기억의 처소이다. 오래전에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내 주머니에 그리움이란 잔고가 남았다면 탈탈 털어 오늘은 그 먼 곳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싶다.
철길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일생을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가 소원해져 속상해하고 관계가 좋아져서 안도한다. 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다. 이 심리적 관계를 물리적 거리로 환산하면 얼마쯤이 적당할까. 철길의 궤간은 1.435미터이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다. 어느 한쪽이 멀어지거나 가까워져도 기차는 탈선한다. 철길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정교한 맞물림으로 평형(平衡)을 잡고 평행을 유지한다. 캔트*로 원심을 잡으며 험한 곡선을 함께 돌아간다. 철길의 불변성 때문이다. 이 약속된 거리가 있기에 기차는 긴 밤을 달려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시킨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늘 넘치거나 모자람이 문제다. 너무 가까우면 상처를 입게 되고 너무 멀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손 닿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먼 길을 동행하는 철길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1.435미터, 아쉬울 만큼의 여백의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오래가는 사람들이라면.
부부 사이의 거리 또한 그렇다. 흔히들 살을 맞댄 거리를 부부 사이의 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이지 정신적으로까지 합일된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평생 한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살을 맞댄 거리를 부부간의 거리라고 곡해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풋풋한 사과꽃 같은 마음에서 빛바랜 사과만 남고 꽃을 잃어버린 날들이 아니었는지. 한 방향을 응시하기보다는 마주보기를 했다. 아내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했던 것 같다. 신혼 때는 구심을 잃고 자주 밖으로 튕겨 나가기도 했다. 삶의 궤간이 너무 팽팽해서 마찰음을 내며 탈선의 곡예를 했다. 살을 맞댄다는 것이 그만 화를 맞대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보면 생의 험한 곡선을 돌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 것은 언제나 아내가 아니었던가. 두 줄기 철길처럼 내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이었다면 아내는 나를 끌어당기는 구심이 아니었을까. 먼 길 돌아와 보니 알 것 같다. 시리고 험한 길 함께 굽어준 아내의 곡정(曲情)이 고맙다.
나란히 뻗은 철길처럼 이제 둘은 한곳을 바라보며 걷는다. 원심이 구심에 조응하는 시간이다. 그런 계절이 왔다. 세월이라는 궤간이 생긴 것이다. 부부간의 거리를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면 역시 1.435미터가 아닐까. 배려의 거리이자 존중의 거리이다. 백년을 동행하는 지순한 사랑의 거리이기도 하다.
산모롱이 돌아가는 철길을 바라본다. 어느 먼 고대의 산맥에서 흘러온 지류이기에 품이 저리 크고 넉넉할까. 한생 바닥에 눕혀 푸릇한 산맥으로 기차를 떠나보내는 철길, 저렇게 은빛 팔을 뻗어 산을 품고 세상을 잇는다. 때론 먼 곳을 반추시키고 그리운 사람들을 전송한다. 치우침 없이 살라는 평심(平心)의 지혜를 일깨운다. 한자리를 지키라는 항심(恒心)의 마음을 읽는다. 바닥에 누운 생이라고 어찌 하찮게 여기랴. 골판지에 쭉 그어놓은 묵화처럼 단순한 철길, 어쩌면 저 철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선이 아닐까. 긴 세월 나와 고락을 함께 해왔으니 오늘은 그만한 헌사쯤은 해두고 싶다. 나를 여기까지 무탈하게 데려다준 철길의 곡정이 또 고맙다.
동륜에 깎인 철길이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상처 뒤에 오는 것일까. 우리네 인생도 그러한지. 철길이 은빛 손을 흔들며 가뭇없이 멀어져간다.
*캔트(cant) : 기차가 곡선을 돌 때 밀림을 방지하기 위해 레일 바깥 부분을 더 높게 하는 것.
발을 잊은 당신에게
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 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 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 시간 기다려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 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않네요. 취중이었다고요? 늘 허드레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당신,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나를 딛지 않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죠? 꽃다발을 받거나 악수를 하거나 스테이크를 자르던 당신의 빛나던 손, 그 손의 숨은 조력자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주었나요. 먼 길 함께 걸어온 나를 지긋이 바라본 적이 있었나요. 땅은 당신을 키우고 발은 당신의 일생을 지탱시키죠. 그러니 바닥과 맞닿은 것들은 대개 습하고 천하기 마련이란 당신의 편견은 오류 아닌가요. 느닷없이 쓰레기통을 차서 엄지발가락을 기절초풍하게 만들던 당신의 심술은 또 어떻고요. 발을 쥐고 아파서 쩔쩔매는 꼴이란.
당신은 그새 잠들었네요. 하루의 노동을 베고 누운 당신을 보니 조금은 안쓰러운 생각도 드네요. 생각해보면 당신과 사는 동안 행복했던 날이 영 없었던 것은 아니죠. 우리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시절이었어요. 밤송이에 찔려 엉엉 울던 당신 엄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네요. 말간 발등이 땡볕에 보송보송 말라가던 시간이었어요. 당신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풍덩, 냇가로 뛰어들곤 했죠. 그땐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주었죠. 따끈한 금모래로 발마사지를 해주거나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햇살 찜질을 해주기도 했죠. 풀밭을 뛰어다니며 나비를 쫓고 천렵도 했어요. 여우비를 맞으며 방천을 달리기도 했죠. 발가락의 촉수는 온통 풀과 꽃과 태양을 향하던 맨발의 시절이었죠. 밤이면 대야 가득 물을 받아놓고 “어이구 이놈아, 발이 이게 뭐꼬!” 하시며 흙 묻은 발을 뽀득뽀득 씻어주던, 나를 금쪽같이 보듬어주시던 당신 어머니의 그 손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땐 행복했죠. 그러나 시간은 한곳을 맴돌지 않고 우리들은 자라죠. 자란다는 것은 슬픈 일인가요. 발이 자라면서 당신은 멀리까지 가게 되었죠.
2.
멀리 간다는 것은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일이고 그것은 아픔이고 슬픔이죠. 풀밭을 떠나면서 당신은 나를 잊었어요. 당신의 고행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죠. 작은 입들이 당신 신발에 승선하면서 삶의 보폭도 빨라졌죠. 급할수록 질러가던 당신, 언젠가 엇길로 들어 진창에 빠진 날도 있었죠. 허욕을 움켜쥐려다 그만 허방에 빠졌던가요. 그날 당신이 바닥이라고 탄식하며 주저앉았을 때 나는 떠나본 적도 없는 바닥을 걱정해야 했죠. 노심초사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당신의 직립의지를 읽느라 촉수를 곧추세웠죠. 어쩌겠어요. 우선은 먹고사는 일이 급했죠.
풍파가 거셀수록 당신과 나는 멀어져갔어요. 우리가 함께 뒹굴던 시간, 신발을 벗어두는 시간, 그러니까 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 거죠. 언젠가 푸릇한 길 하나 오랫동안 굽어보던 당신, 서른이나 마흔 즘엔 습작노트 한 권 들고 사막이나 새들의 숲으로 가자던 당신의 옛 맹세는 어디로 갔나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막을 걷는 낙타였던가요. 발바닥에 사구(砂丘)처럼 불쑥 솟은 굳은살이 그것을 증명하네요. 당신 파랑 같은 생의 나날들이 굳은살로 새겨지는 동안 당신은 나를 잊고 나는 당신 속에서 시들어왔네요. 당신이 편애하는 손을 바라보며 볼품없이 늙어왔네요. 당신의 보폭에 하루의 운세를 맡기고 오늘도 먼 길 걸어왔네요. 당신의 손은 현실을 꿈꾸고 나는 당신 해진 신발 속으로 스며들던 한 줌 햇살을 꿈꾸던 시간이었죠.
신발을 벗어두고 떠나고도 싶었죠. 십 문 반 당신의 먹살이 일생을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고 싶었어요. 우리가 맨 마음으로 뒹굴던 그 풀밭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야생의 발을 찾아 먼 유목의 초원을 꿈꾸기도 했죠. 은어 떼 날아오르는 바이칼이나 자작나무 숲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눈 덮인 오두막도 좋아요. 석 달 열흘쯤 세상으로 가는 문을 닫고 오롯이 당신과 독대하고 싶었죠. 대야 가득 물을 받아놓고 세상에 짓무른 상처 오래도록 다독이고 싶었어요. 순한 햇살에 자적(自適)하는 당신 모습 보고 싶었어요. 뜨거운 불심지 돋우고 순백의 문장 한 줄 받아 적고도 싶었죠. 사족 없는 맨발이면 어디든 좋아요. 내 온전한 의지로 직립의 풍적(風跡)을 찍으며 며칠이고 걷고 싶었죠. 무른 발가락에 파릇한 싹이 돋을 때까지, 한번은 내 생각대로 살고 싶었어요. 당신을 풀밭으로 그만 방목하고 싶었던 거죠.
3.
곤히 잠든 당신을 보네요. 발을 잊고 잠든 당신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이네요. 당신의 무관심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저 발은 누구일까요. 문득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던 선승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말씀의 궁극(窮極)은 다르지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랬군요. 처음부터 나였던 당신, 일체(一體)이면서 딴 마음을 품었던 나, 결국 내가 찾던 풀밭은 당신 신발이었군요. 알고 있죠. 나는 땅땅, 발바닥이란 천형을 선고받은, 당신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당신의 무기수인거죠. 가끔은 초원의 망루를 꿈꾸며 탈옥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당신은 조롱박 같은 눈망울들이 달린 저 신발을 결코 벗을 수 없었던 거죠. 발의 인생사가 다 그런 것이었네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었네요. 저마다 겹별 하나씩 간직한 채 ‘아’ 하고 입 벌리는 불빛을 찾아가는 가난한 영혼의 유목민들이었네요. 어쩌죠? 이쯤에서 당신을 이해해야 하나요. 행장을 꾸렸다가 다시 푸는 여인의 마음이 이러할까요. 아침이슬을 묻히며 조붓한 오솔길을 걷는 것으로 위안해야 할까요.
언젠가 당신 고요히 수평에 드는 날, 욕망도 집착도 울음처럼 잦아드는 날, 그땐 신발을 벗을 수 있겠죠. 그때는 나도 바닥을 떠날 수 있을까요. 홀가분하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조금은 낯설기도 한 당신 평안한 얼굴 바라볼 수도 있겠죠. 발 ‘我’를 잊고 사는 당신, 그때까지 부디 강녕하세요. 참, 발은 꼭 손으로 씻으세요.
첫댓글 철향님 축하드립니다.
천천히 읽겠습니다^^
수상소감도 멋지시네요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