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3-1)말법은 절복의 때
본초는 전편(全篇)을 통틀어 중요한 교시가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의 신행에서 특히 중요한 점 두 가지를 들겠습니다.
첫째, ‘말법은 절복의 때’라는 것입니다.
대성인님은 본초에서 「대저 불법을 수행하는 자는 섭절(攝折) 이문(二門)을 알아야 하느니라. 일체의 경론은 이문을 벗어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나라 안의 여러 학자들은 불법을 대강은 배웠다 할지라도 시각상응(時刻相應)한 도리를 모르니라.」(신편어서 p.672)라 말씀하셨는데, 불도 수행에는 섭수(攝受)와 절복의 이문이 있기에 때에 맞춰 불도수행의 자세도 달라짐을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섭수는 상대의 잘못을 용인하면서 점차 서서히 유인하여 정법으로 이끄는 화도법(化導法)이고, 절복은 상대의 사의(邪義)·사법(邪法)을 파절하여 정법에 굴복하게 하는 화도법입니다.
그렇다면 말법은 섭수·절복 중 어느 것을 행해야 하는 때일까요?
본초에서는 「권실잡란(權實雜亂)할 때에 법화경의 적을 책하지 않고 산림에 틀어박혀 섭수의 수행을 한다면 어찌 법화경 수행의 때를 잃은 괴이한 일이 아니겠느뇨.」(신편어서 p.673)라 하셨는데, 말법인 지금 절복을 잊고 섭수를 수행한다면 법화경 수행의 때를 잃은 괴이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법은 섭수·절복에 의할지니라.」(신편어서 p.578)라는 교시도 있듯이 불법에 있어서는 ‘때’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며 말법인 지금 행해야 할 불도수행은 근행 창제는 물론 절복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일련정종에 적(籍)을 두고 있으면서도 절복을 행하지 않는다면, 때를 잃은 것이며 불도수행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하는 곳에는 생활상에 공덕으로서의 실증이 나타날 리가 없고 어본존의 위광(威光)을 실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숙업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더더욱 절복행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본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복이 시각 상응한 불도수행임을 잘 인지하여 해이해지는 일 없이 매일 정진해 갑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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