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09호.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집. 지정면적 7,851㎡.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 집안의 고택(故宅)이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두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공포(栱包)를 짜 얹었는데, 주두(柱頭)는 굽면이 비스듬하고, 첨차(檐遮)의 끝은 비스듬히 끊기고 밑면은 연화두형(蓮花頭形)에 가깝게 초각(草刻)하였다.
살미[山彌]는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이들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의 공포를 닮았다. 이런 성격들은 특히 대청의 종도리를 떠받치고 있는 대공이나 솟을합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종도리를 직선에 가까운 솟을합장으로 결구(結構)하고, 종도리 밑의 장여를 굽면이 사면인 소로로써 물고, 이 소로를 사다리꼴의 대공으로 떠받치고 있다.
이 모습은 옥산(玉山) 독락당(獨樂堂)의 대공과 같은 모양이고, 또 은해사거조암영산전(銀海寺居祖庵靈山殿)의 솟을합장 및 대공과 같은 모습인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하나의 목조양식이라 생각한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중앙에 용마루를 가로지르고, 이를 다시 양쪽 방 위의 지붕 용마루가 받아 전후면에 박공을 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을 이루고, 방은 온돌바닥과 반자틀 간격을 넓게 만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대청 정면에는 들어열개의 井자살 창호를 달고, 뒷면에는 밖여닫이 판장문을 달았으며, 방에는 밖여닫이 井자살 창호를 달았다.
앞마당 한 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한 듯하나, 한편으로는 강학(講學)하던 자리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수백 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가옥의 형태는 "ㄷ"자형의 맛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 한다.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