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과 2024년의 차이—역사의 반복이 소극으로만 끝나진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고...강내희 교수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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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3시간 ·
<1968년과 2024년의 차이—역사의 반복이 소극으로만 끝나진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내 나이 또래라면 서구인 가운데는 자신을 68혁명 세대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1960년 4월 혁명 세대는 있어도 68혁명 세대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964년 6월에 한일협정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난 적은 있으나 그 운동과 68혁명과는 큰 관계가 없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개인적으로 68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68혁명은 세계사적 혁명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기 때문이다.
68혁명 이후 5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와 맞먹는 지각 변동이 생기는 것 같다. 이스랄의 가자 인민 학살을 두고 세계의 인민대중이 일떠선 모습이 그것으로, 미국의 대학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친팔레스타인 행동이 특히 눈길을 끈다. 4월 중순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정을 장악한 농성이 시작된 데 이어 미국의 전역에서 벌이는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특히 농성이 만만치 않다. 전국적으로 100개 이상의 대학들에서 점거 농성이 벌어지고, 1,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체포되거나 구류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엊그제 CNN을 보니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이 현장 중계되더라. 컬럼비아대에서는 1968년에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치며 학생들이 점거해 농성하던 해밀턴홀이 이번에 다시 후배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다가 경찰에 탈환되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인데, 그해 5월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군인이 쏜 총에 학생 4명이 맞아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발한 적이 있다.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날 사건을 기록한, 내 세대라면 상당히 많은 이가 기억할 사진 하나가 있다. 총에 맞은 남학생이 너부러져 있고 여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 앞에서 양손을 들고 절규하는 모습.
2024년으로 돌아와서 미국에서는 지금 수많은 대학에 데모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경찰이나 군인이 쏜 총에 학생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가 시위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참극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개별 주마다 대응하는 방식은 달라 보이나, 대학에 따라 학생들의 평화집회 현장에 자동화기로 무장한 경찰이 진입하기도 하고, 미시간 대학인가에서는 대학 행정요원이 총을 든 저격병을 대학 건물 옥상으로 안내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미 의회는 학생들의 시위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그와 관련해 의원 몇 명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스랄의 인종학살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2024년 현재 세계는 1968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반체제 운동을 목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역사의 반복인 셈이다. 단, 역사의 이번 반복은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다고 여겨진다. 맑스는 거기서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라고 했다. 그러나 2024년 미국과 유럽 등의 대학에서 일어나는 반체제 운동을 소극으로 볼 일만은 아닌 듯싶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와 루이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를 비교하면 후자가 소극임은 분명하나, 지금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의 운동은 1960년대 말 운동의 반복인 것 같기는 해도 소극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현재의 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극 수준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1968년의 혁명은 세계혁명으로 치부된다.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68혁명은 미국과 영국, 독일, 그리스, 일본 등 서방 주요 국가들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68혁명은 ‘반체제’ 운동으로 규정되곤 한다. 그것이 반기를 든 대상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당시 기득권 세력 전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혁명의 가장 큰 적이었던 자본주의의 경우 받은 타격이나 상처가 그리 컸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당시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이윤율 하락을 겪으며 축적의 위기에 빠졌고, 그에 따라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며 세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축적 전략을 구사하며 자신의 생존 능력을 입증해냈다. 그 사이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퇴조하여 세계는 갈수록 자본주의 유일 체제로 환원된 셈이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속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역사의 장에 ‘종말’ 글씨가 쓰인 승리의 깃발을 꽂기까지 했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1960년대 말의 반체제 운동은 때를 잘못 맞춘 셈인지 모른다.
오늘날은? 1960년대와도 1990년대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가 싶다. 56년 전과 30여년 전에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오늘날에 비하면 심각한 위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서방 신세대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운동에 참여한 셈이기도 하다. 반제, 반식민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 등으로, 그리고 당시 신생 독립국의 우후죽순 탄생으로 성공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마는 그때의 성공은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UN의 창립 시에 51개이던 회원국 수가 1974년에 이르러 136개로 대폭 늘어난 것은 언뜻 보면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위대한 성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신생 독립국 대부분이 나중에 신식민지로 전락한 점을 놓고 보면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체계의 상황이 정말 크게 변했다고 봐야 한다. 과거 반식민지였던 중국이 이제 PPP 기준 GDP 세계 제1위 국가가 된 것, 대부분이 과거 피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된 브릭스 국가들의 GDP가 제국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G7의 그것을 능가한 것이 그 증거다. 오늘날 미국 등지에서 학생들이 일으키는 반체제 운동의 거대한 반향을 기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선배 세대의 노력이나 정성에도 불구하고 68혁명은 자본주의 극복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것은 그때는 아직 혁명의 시간이 무르익지 않았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아직은 운동이 미약할지 몰라도 시간은 무르익은 셈이라 할 수 있다. 서방 제국주의는 지금 더 이상 과거의 위력과 지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지금 반체제 운동의 핵심 안건은 이스랄의 가자 인민 학살 문제일 것이다. 세계인이 뻔히 지켜보는 앞에 가자 인민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이스랄의 안하무인식 태도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이스랄의 그런 태도는 반인륜적이고 반국제법적이며 반-무슨무슨적이겠지만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이스랄의 잔혹 행위를 과거 서방의 제국주의가 비서방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던 전통의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이 오늘날 백인 국가로 된 것은 유럽의 백인들이 광활한 비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 원주민들을 불법적이고 사악하고 포악한 각종 방법으로 제거해버린 결과다. (최근에 한 팟캐스트를 통해 들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리처드 울프에 따르면) 이전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때는 비서방 사회가 서방의 공격과 침략을 막을 방어력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랄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과거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하던 행태를 반복한다? 이것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도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스랄에는 그럴 권리도 없으려니와 그럴 능력도 없다고 봐야 한다.
이스랄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도 계속 이스랄을 지원할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지리멸렬한 모습이 말해주는 바다. 게다가 이스랄이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속한 서아시아의 국제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란과 터키, 이집트, 사우디, UAE, 예멘, 레바논, 시리아 등 팔레스타인을 지원해줄 수 있는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이 도열해 있지 않은가. 물론 이들 나라 가운데는 이집트와 사우디 등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랄과 우방이 된 나라도 있으나 그들은 올해부터는 브릭스에 새로 가입한 상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스랄이 속한 오늘날의 서아시아 국제정세는 그 일대에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유럽인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를 유린하며 그 일부 지역의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제거하고 정착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기는 이제 지난 지 오래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지금 새로운 세대가 들고일어난 것은 세계사적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아직은 강 건너 불로만 보고 있다. 그러나 기대컨대 대학소요가 잠잠해지지 않고 가을학기까지 이어진다면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쓰이는 것을 볼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태는 68혁명과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반복에 해당하는 것 같다. 단, 반복되는 역사가 꼭 불변을 낳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결과만 낳는다면 역사의 반복은 소극으로 끝날지 모르나, 반복을 통해 어떤 벡터 운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아직은 섣부르지마는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서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