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이네 살구나무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2.
관악산 봄빛
하늘이 넓다 해도 아랫마을 윗말 사이
해님이 밝다 해도 갓 돋아난 민들레꽃
관악산 넘는 봄빛은 만 리보다 더 먼데.
3.
나무 2
사람은
겨울이 오면
옷을 자꾸 껴입는데
나무는
입었던 옷을 자꾸
벗어 내립니다
다 벗고
더 넓은 하늘을
얻어 입고 섰습니다.
4.
갈대
-그것은 꿈이었다
흩을 만큼 흩었으니 세월도 허허롭고
울 만큼 울었으니 흰 터럭이 눈부시다
꺾이고 부러진 후라야 갈대라고 하느니.
5.
소
발자국 가슴에 묻으며 뚜벅뚜벅 걸어 왔다
태산도 머리로 받으며 물러설 줄 몰랐거니
목에 건 풍경소리가 왜 눈물로 고이는가.
6.
또하나의 종명鍾銘
나를 때리지 말아, 울리지는 더욱 말아,
울음 다 쏟고 나면 빈 껍질만 남을 것을
멧새도 청산을 떠나고 빈 둥지만 남을 것을.
7.
11월
봄날엔 민들레꽃, 여름날엔 해오라기,
해님도 가을이면 익을 대로 다 익어서
한 덩이 빛나는 모과로 내 이마에 와 얹힌다.
8.
엄마 목소리
보리밭 건너오는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시냇물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목소리가 더 환하다.
혼자 핀 살구나무 꽃그늘이 더 환하냐
눈감고도 찾아드는 골목길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그 목소리 더 환하다.
9.
적막한 봄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10.
앵두꽃
흐뭇하게 먹은 아기
배를 안고 일어서듯
손과 발 아랫도리
온 몸에다 밥풀 달고
앵두꽃 환히 웃는다
이 어여쁜 봄볕 앞에.
11.
겨울나무 5
저렇게 황홀한 것도 이 세상에 첨 보았고
저렇게 참담한 것도 이 세상에 첨 보았다
사슴이 사슴뿔 이듯 가지 위에 하늘 인 것.
12.
무공적無孔笛
나무도 한 백 년은 심고서야 나무란다
비바람 입을 줄 알고, 하늘 걸쳐 설 줄 알고
세월에 빈 가슴 내맡겨 피리 불 줄 저도 알고
나는 아흔에 세 바퀴 백년에는 성이 덜 차
비바람 상심도 모르고, 그 허심도 채 모르고
무공적, 흰 구름 한 자락, 피리 불 줄 영 몰라라
13.
가을 1
높이 뜬 구름결에도 가을 향기 흐르는 날
더운 물 실리는 숲 모닥불 놓는 황국黃菊
산 너머 외로운 고향이 있는 것도 싫지 않다
14.
안경 11
수수깡 안경만 써도 천 리 밖을 보던 소년
돋보기안경을 부쳐도 눈앞마저 침침하다
소년이, 소년이 왜 늙어 안경 제가 늙은 게지.
15.
춘수春愁
물오른 버들개지를 꺾어 들고 내려와서
겨우내 배고팠던 항아리에 꽂아준다
둥글고 어여쁜 수심도 봄 더불어 꽂아준다.
16.
제주도 기행시초紀行詩抄 1
-창파에 떠서
두둥실 창파에 뜨니 하자할 것 없는 목숨
조국도 유품만 같고, 인생은 꿈이다마는
지울 수 없는 사랑아, 먼 돛배야 갈매기야.
17.
월령부月嶺賦
내 있어 영嶺이라 하자, 만산 적적 꿈이라 하자
기러기 그나마 외기러기 다 울고 간 밤이라 하자
등 뒤에 저 밝은 달을 어이 지고 샐 건가.
18.
못다 한 말
내가 밤을 새워가며 시詩를 자꾸 쓰는 뜻은
낙화落花시절 보냈는데도 못다 한 말 있기 때문
꽃 지고 꽃 속에 물리는 까만 씨앗 있기 때문.
19.
무인도
바다가 넓다 해도 눈 감으면 지워진다
떠나는 흰 구름도 하늘 넘는 갈매기도
보내면 그뿐이지만 혼자 남을 무인도無人島
20.
초봄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
21.
나무는 1
사람은 겨울이 오면 옷을 자꾸 껴입는데
나무는 옷을 하나씩 자꾸 벗어내립니다
다 벗고 무욕한 하늘을 얻어 입고 섰습니다.
22.
설일雪日
흰 눈발 자우룩이 온 누리를 덮은 날을
고목나무 가지 끝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어디로 날아갈 건가 내 심두心頭에 앉아 있다.
23.
겨울나무 3
조금은 수척해 있어야 겨울새가 앉는 거래
조금은 비워 두어야 눈발이 와 닿는 거래
아니래, 가득해 있어야 동풍東風이 와 우는 거래.
24.
고향보다 더 먼 고향
고향을 찾아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
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
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
25.
다시 사모곡思母曲
살아생전 고향집 지키며 혼자 살던 어머님이
죽어서 산으로 돌아가 산에서도 혼자 사네
민들레 호롱불 켜놓고 봄밤 혼자 새우셨네.
26.
혼자
혼자서 살면서도 혼자인 줄 몰랐더니
아무도 없는 고향 그 고향을 다녀와서
맥 놓고 앉아있는 밤 혼자인 걸 알았네
27.
풍설風雪 열차
고향은 꿈도 잠도 떠나가고 다 없는데
노래만 별 하늘에 산탄散彈처럼 박혀 있고
추풍령 넘어선 열차가 지둥 치듯 합니다.
28.
안경 6
세월도 흩어놓으면 갈대밭이 되어 울고
머리맡 벗어놓은 안경이 그 갈밭에 앉아 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북천北天 가며 혼자 운다.
29.
조령관鳥嶺關 구름
어차피 한 냥 빚도 빈 소매엔 무거운 것
괴나리봇짐 벗어 솔가지에 걸어두고
정처도 없는 구름이 혼자 재를 넘고 있다.
30.
감을 따 내리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어디에다 가마 걸고
이렇게 붉은 열매를 주저리로 구워 내렸나
아흔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를 나는 몰라.
첫댓글 교수님!
고맙습니다.
언제 읽어도 마음의 고향 같은 정완영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고맙습니다.